김봉학, 그는 왕우구의 혁명군중이였다

2019-09-29 09:5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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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가을 이후 연길현 각지에서 활동하던 지방 항일유격대들이 륙속 왕우구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11월 2일, 왕우구 중촌에서 왕우구구쏘베트정부(王隅沟区苏维埃政府,후에는 인민혁명정부로 불리움)가 수립되면서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가 정식으로 창설되였다. 적들은 왕우구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수비대를 맥동(麦洞)에 주둔시키며 고성자(古城子), 합수(合水) 일대를 봉쇄하고 자위대를 풀어놓아 부암(富岩), 삼산동(三山洞)에 경계망을 늘여 봉쇄하기 시작하였다. 왕우구항일유격대는 적들의 동정을 알아내기 위하여 밤이면 적들의 삼엄한 봉쇄망을 뚫고 나와 동흥동(东兴洞,지금의 류채 1촌)의 김봉학과 련계를 맺고 자주 적들의 동향을 탐지하였다.

연길시 의란진 고성촌으로 가는 길 오른쪽 산기슭에 자리한 김봉학 렬사묘와 렬사비가 보인다.  (2008년 2월 5일 현지촬영)


동흥동 김봉학(金凤学, 1875ㅡ1933)의 집이 유격대 련락점이 된 것은 이때부터의 일이다. 김봉학의 어린 손자 김영빈은 할아버지가 시키는대로 낮이면 집에 있는 큰 개를 풀어놓아 왜놈들이 오면 짖어대게 하고 밤이면 짖지 않도록 집안에 가두어 유격대원들이 드나드는 데 편하도록 하였다. 김봉학은 항일유격대의 지시에 따라 삐라살포, 전화선 끊기, 유격대의 길잡이 등 일에 발벗고 나섰다.

그럼 김봉학이란 누구일가? 왕우구항일유격대에서 왜 이토록 김봉학을 믿어줄가? 이를 알자면 김봉학의 래력을 추적할 필요가 있을것 같다.

김봉학은 1875년 7월 18일에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 위남동( 吉州郡德山面谓南洞)에서 태여났다. 1910년에 일본침략자들이 강제적으로 조선을 병탄하자 김봉학은 울분에 참지 못해 일가족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섰다. 그때 김봉학의 아들 재경이는 9살이고 동생 을산이는 6살이니 일행은 김봉학의 아버지와 동생내외분까지 모두 7명 식구였다. 도보로 무산령을 넘어서 등짐을 푼 곳이 화룡현 청산리 송월동이다.

송월동에서 3년 세월, 소도 기르고 밭도 개간하니 생활은 펴이기 시작하였다. 김봉학은 아버지가 송월동에서 사망하게 되자 연길현 의란구 버드나무골이라는-류채로 이사를 왔다. 1916년, 버드나무골은 분지호 지주 류천순(刘天顺)의 땅이여서 개간하여 3년은 조세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밭을 일구어 삼년간 지어먹으며 또 다른 밭을 일구니 해마다 풍작이라 생활도 퍼그나 펴이여갔다.

김봉학의 안해는 허성녀이고 처가집은 그때 로씨야 이만에 자리잡고 있었다. 해삼위로 가는 길쪽에 신안촌이란 조선인 마을이 있었는데 녀동생이 그 마을에 살고 있었다. 매부 최씨는 농회장이다. 때문에 김봉학은 로씨야로 자주 다니였다. 익숙한 걸음이고 로씨야말도 곧잘 했다. 하지만 로씨야로 가면 ‘욧또요마지’요, 중국으로 가면 ‘꼬리빵즈’라고 하니 김봉학은 “나라 없는 설음에 분하기 그지없다.”고 늘 개탄하였다.


김봉학 렬사묘 왼쪽켠 골짜기. 이 골짜기 따라 조금 들어가면 한원순 렬사묘가 자리하고 있다.  (2008년 2월 5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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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룡정에서 3.13반일 대시위가 터지며 반일독립운동이 시작되자  의란구에도 국민회라는 조선인 반일독립단체가 고고성을 울렸다. 김봉학은 렵총을 다루던 솜씨가 있은 지라 국민회 산포대에 들어 중대장 책임을 짊어졌다. 중대장으로서의 그는 그해 1919년 봄부터 여러 사람들을 거느리고 로씨야 연해주에 가서 두번이나 총을 구입해왔다. 그 이듬해 세번째로 무기구입차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훈춘까지 갔지만 돌아오라는 급보를 받고 의란구 집으로 와보니 1920년 경신년 대토벌이 쳐들어오는 때라 의란구에도 일본토벌대가 들이닥치였다. 의란구 국민회는 해산되고 무장대는 어디론가 전이하여 김봉학은 대오에서 떨어지게 되였다.

일본토벌대는 무장대를 붙잡기만 하면 가만 놓아두지 않겠다고 벼르는 판이였다. 김봉학은 죽어도 적들에게 귀순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로씨야로 도망갈 타산이였다. 그러나 로비가 없었다. 김봉학이 한창 조바심으로 안절부절 못할 때 의란구 민회에서 대부금을 나누어주었다. 이때 아들 김재경이 자칭하여 마을의 참의원이라고 둘러대고 겨우 대부금 100원을 손에 쥐였다. 김봉학은 그 돈으로 일행 세사람이 로씨야로 갔는데 그렇게 떠난 집에서는 돈이 오지 않으니 의란구 동흥동에서 김봉학의 남동생과 아들 김재경이 3년간 숯을 구워 겨우 그 대부금을 갚았다.

사실 김봉학은 로씨야로 갔으나 모든 것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2년 후에 국민회 무장대는 김좌진 부대와 합류하였다. 하여 갖은 노력으로 그쪽으로 찾아가니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거니와 그 부대는 다시 밀산쪽으로 넘어갈 타산을 하면서 김봉학을 외면하였다. 김봉학은 할 수 없이 로씨야 루스끼의 집에서 새도 비여주고 말을  먹이는 품팔이 일을 하면서 망명 생활로 나날을 보내였다.

세월이 흘러 1927년에 김봉학은 손자(김영빈)가 태여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제야 7년 만에 의란구 동흥동으로 돌아오니 국민회 무장대를 더는 추구하지는 않았으나 세월은 무사하지만은 않았다. 당시 중국 남방은 남창봉기요, 광주봉기요, 추수봉기가 터졌고 북방은 반일사조가 날따라 고조되여갔다.

1931년 봄에 이르자 지방정부들에서는 민생을 돌보라는 손중산의 지령에 의해 감조감식을 실시할 데 대한 포고문을 내리였다. 민간에서는 3.7제를 실시하는가 안하는가 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또 3.7제를 실시안하면 농민의 고혈을 빨아먹던 지주놈들을 때려부셔야 한다, 지주 뿐만 아니라 그와 단짝인 갑장들도 때려 부셔야 한다, 민회에서 대부금을 준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준 건데 참의원들이 제 마음대로 안목있는 사람끼리 나누어가졌으니 그놈들도 함께 때려야 한다-이러루한 소문이 자자하자 김봉학의 아들 김재경은 시름놓지 못하였다. 기실 김재경은 몇년 전 대부금을 맡기 위해 자청으로 참의원이란 이름을 달았을 뿐 이지 7,8호 되는 마을에서 누구를 해친것도 없고 공짜로 얻어먹은 것도 아니니 별 문제없으리라고 생각 하였지만 정작 불어치는 바람을 맞받아 나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당시 “참의원은 모두 죽여버려야 한다.”는 소문이 많이 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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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8월, 김봉학의 아들 내외와 김영빈 그리고 동생까지 네식구가 국자가로 피해 내려갔다. 김봉학의 아들 김재경은 남의 차로 세실이를 하면서 근근히 생활을 유지하였다. 하루는 한동네서 살던 허도유사가 달리동에 돈 안내고 가져가라는 말고기가 있으니 가지러 가자고 알린다. 안해 리은숙은 더운 고열에 애를 업고 말고기를 이고 오는데 어린 것은 젖을 토하며 기침이 그치질 않았다. 집에 이르자 바람으로 의원을 보이고 약을 썼으나 고열에 더위를 심하게 먹은 병든 어린 것은 밤중에 그만 숨지고 말았다.

어린 둘째 아이를 잃은 리은숙은 아들 영빈이를 데리고 멍지장령을 넘어서 의란구 동흥동에 들어섰다. 김봉학의 안해 허성녀는 “살려고 갔다가 죽이구 왔구나. 이런 기가 찬 일이 어디있나.”하고 통곡하며 락루하였다.

그 후 반달도 못되여 국자가에도 일본군대가 욱실거렸다. 일본놈들은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짐운반용 소수레를 내놓으라고 성화를 부렸다. 김봉학의 아들 김재경은 말초리로 소홀목을 졸라매고 있는데 군대 몇놈과 관리가 오더니 소를 보자고 했다. 보니 다리를 절기에 나무라면서 가버렸다. 사흘 후에 또 문뜩 뛰여드니 꼼짝 못하고 붙잡혀가 일본군 짐을 싣게 되였다. 의란구 집에서는 이렇게 강제로 끌려간 줄도 모르고 있는데 하루는 일본군 200여명이 대렬을 지어 길청령쪽으로 들어가고 뒤에 소수레 십여대가 늘어섰다. 김재경은 그제야 소리치며 달려와서 군대에 잡혀가니 그리알라고 하면서 따라갔다.

김봉학의 안해 허성녀는 진지를 지어놓고 북쪽을 향해 “제발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십사!”라고 손이 닳도록 빌었다. 그래서인지 아들은 약 한달이 지나 목단강 서쪽 해림까지 갔다가 10월 하순에 구사일생으로 귀가하였다. 김봉학은 아들이 돌아오니 반갑기는 하지만 “왕우구에서 알면 큰일난다. 어서 빨리 피해라!”고 권하였다. 강제로 일본군 짐실이로 나섰던 것이 사람들이 일본개라고 할가봐 두려웠다. 그렇게 귀가 며칠 만에 아들 김재경은 안해 리은숙과 아들 영빈이를 데리고 배초구로 피해가서 상점을 하면서 근근득식으로 살아가야 하였다. 이듬해 배초구의 현정부가 왕청으로 옮겨가니 상점은 영업도 되지 않아 문을 닫고 말았다. 할 수 없이 김재경은 로송령 턴넬을 빼는 데 가서 자갈실이에 나서야만 했다.


4

때는 벌써 1932년 늦가을, 산속에서 활동하던 왕우구항일유격대가 의란구 동흥동 김영빈의 할아버지 김봉학을 찾아왔다. 유격대 대장은 김봉학의 친구의 아들인 김락천이고 서로 잘 아는 익숙한 관계였다. 김락천은 김봉학이 아버지의 친구인 데다가 사람됨을 잘 알기에 구김없이 청을 들었다.

“아바이, 우리를 좀 도와주시우.”

“이 늙은 몸이 이제 무엇을 안다고 나서겠소…”

“아바이는 경신년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습니까?”

“그때야 나라 없는 설음이 제일 커서 분김에 싸운거지. 허나 몇해 동안 망명생활을 하고 보니 몸도 좋지 않고 지금은 늙어서 꼼짝 못하우다.”

사실 그때 김봉학은 60고개를 바라보는 나이였다. 김봉학이 이렇게 말하자 김락천은 한걸음 다가섰다.

“아바이두… 총을 들고 싸워 달라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필요할 때 련락이나 해달라는 겁니다.”

김봉학은 워낙 일자무식에 무툭툭한 말씨라 대번에 잘라 말했다. 그는 나름 대로의 견해가 있었다.

“보시구려. 지금 권력도 없는데 제도부터 세우려 하니 안될 말이지. 단술에 배불린다는 건 불가능하우다. 나도 로씨야에서 혁명하는 걸 눈여겨보았댔수.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백방으로 뭉쳐야 하고 싸울 때는 로농군중이 힘이 제일 세지. 지금은 왜놈들이 들어왔으니 모든 력량을 동원하여 왜적과 싸워야 하지 않소?”

“아바이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도 혁명을 하느라 하지만 처음하는 일이라 틀리는 것이 많아요. 그래서 틀림을 고치면서 통일전선을 취하여 왜놈부터 쳐부시자는 겁니다.!”

김락천(金洛天, 1902ㅡ1935)의 말은 리치에 딱딱 들어맞았다. 김락천은 1902년 생이고 공산당원이며 의란구 사람이다. 1932년 봄 이후 의란구 돌격대와 적위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이해 여름에 왕우구유격중대가 정식으로 조직되자 유격중대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왕우구유격중대를 이끌어 배초구로 통하는 길청령 산중턱 굽인돌이 길가에 매복하여있다가 적의 군용트럭 한대를 습격하여 일본놈 3명을 격살하고 두자루의 보총을 로획하기도 하고 그해 9월에는 또 류채촌의 륙년지고개에서 일제 군용트럭 2대를 습격하여 두놈을 죽이고 보총 두자루를 로획하기도 하였다.

적들과의 직접적인 전투도 수시로 가지였다. 그중 일정한 규모를 가진 전투들로는 1932년 6월 의란구 적병영 습격, 그해 7월의 소배초구 일위군 ‘토벌’대 습격, 그해 8월 반일부대와의 팔도구 습격전, 그해 9월의 춘흥가 일본군 군용트럭 습격과 반일부대와의 구룡평 련합공격 등이였다.

김락천은 바로 이런 사람이였다. 이런 김락천이 모처럼 찾아와 청을 드니 김봉학은 뿌리칠 리유가 없었다. 김봉학은 이렇게 되여 나이 륙십을 앞두고 다시 항일에 나서게 되였다. 때는 연길현 각지에서 활동하던 항일유격대들이 일본군 토벌에 견디지 못하여 륙속 왕우구에 집결하여 쏘베트정부를 세우고 왕우구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던 그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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