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에 종군한 항일명장 전수요

2019-10-08 14:29:02

강소성 련운항시 감유구 왕홍촌의 항일산렬사릉원에는 장엄하고 숙연한 소사동해전 렬사묘소가 있는데 전수요 렬사가 바로 이곳에 안장되여있다. “국난에 분연히 일떠나 천하를 호령하였고 동해가에서 일본침략자와 싸우다 장렬하게 희생되였네. 국난에 붓을 내던지고 종군하여 환남에서 단련받고 중임을 짊어지였네. 평형관 앞에서 특훈을 세우고 부부의 희생으로 충성심 보여주었네.” 이는 83세 고령의 진학문이 2014년 렬사릉원에 찾아가 언니 진락련과 형부 전수요를 기리며 쓴 시구이다. 

전수요 렬사

전수요의 원명은 전작룡이고 1915년 안휘성 륙안현 신안집(오늘의 륙안시 유안구 신안진) 전가돈의 한 소작농 가정에서 태여났다. 1930년 4월, 륙안 8구 4향 소년선봉대에 가입하고 이듬해 륙안 하서농민폭동에 참가했다. 1932년, 중국공농홍군 제25군에 편입되여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일찍 중국공농홍군 제25군 교통대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1934년 11월, 장정에 참가하였고 섬서 남부에 진입해 유가하전투에 참가했으며 후에 제225퇀 영장으로 임명되였다. 1935년 4월, 중공 악예섬 성당위 상무위원으로 선거되여 악예섬쏘베트구역을 구축하는 투쟁에 참가했다. 섬북에 도착한 후 홍군 제15군퇀 제78사 사장으로 되였으며 부대를 거느리고 선후로 로산, 유림교, 직라진, 동정, 서정 등 전역에 참가했다. 서정에서 회군하던 과정에서 그는 전투기회를 틀어쥐고 부대를 지휘하여 안변, 염지 2개 현을 공략해 팽덕회의 표창을 받았다. 

1937년,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전수요는 팔로군 제115사 제344려 제687퇀 부퇀장으로 되였으며 평형관전투에 참가해 부상을 입고도 담가에 누워서 전투를 지휘했다. 1938년 봄, 제687퇀 퇀장을 담임하고 산서 동남지역의 반‘구로포위공격’에 참가하였으며 장점저격전에서 부대를 지휘하여 용맹하게 싸워 저격임무를 출중하게 완수했다. 

1939년 후 전수요는 제344려 부려장, 팔로군 제2종대 신편 제2려 려장, 제5종대 제2지대 사령원 등직을 맡았다. 1940년, 명령을 받고 부대를 거느리고 남하해 화중에서 신사군을 지원하고 소북항일근거지 구축 사업에 참여했다.  

1941년, 환남사변 후 전수요는 신사군 제3사 제8려 려장으로 부임되여 부대를 거느리고 염부지역에서 유격전쟁을 벌려 해적, 토비, 괴뢰군과 봉건종교조직을 타격하는 전투를 여러차례 전개하였으며 정담구전투, 향수구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고급지휘원으로서의 우수한 자질을 보여주었다. 간고한 투쟁환경 가운데서도 그는 능란하게 간부들을 단합시키고 군중과 밀접히 련계했으며 사상정치사업을 중시하여 전개했다.   

1943년초, 전수요는 신사군 제3사 참모장 팽웅 등 퇀급이상 간부들과 함께 연안에 가 학습하게 되였다. 3월 17일, 감유현 구리향 소사동 해면에서 일본순라정과 조우하였으며 적과의 격전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도 여전히 완강하게 전투를 견지했다. 팽웅이 희생된 후 그는 과단하게 전투를 지휘해 륙지에 올라갔으며 중상을 입은 몸으로 동지들을 위해 퇴각로를 뚫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당시 그는 28세밖에 되지 않았다. 

1943년 9월, 소북의 군민들은 팽웅, 전수요 등을 위한 추도회를 거행했다. 추도회에서 황극성은 “팽웅, 전수요 두 동지는 모두 우리 군의 우수한 청년 고급지휘관으로서 당에 충실했고 작전에서 단호하고 용감했으며 전쟁과 사업 경험이 아주 풍부하였다. 이번에 해상에서 적들과 조우하여 용감하게 작전을 지휘하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였는데 참으로 손실이 막대하다.”고 침통하게 말했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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