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학, 그는 왕우구의 혁명군중이였다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56

2019-10-08 08:56:38

김봉학은 운반하는 사람을 물색하다가 태양촌 건너마을에 사는 한원순을 찾았다. 믿을 만한 사람이였다. 한원순은 과연 소금과 신을 발구에 싣고 황초령을 넘어서 부암평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필자를 안내하여 한원순렬사묘에 이른 김영빈씨. (2008년 2월 5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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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 초반 그 험악한 세월에 일본놈들은 맥동에 수비대를 주둔시키고도 모자라 고성자와 련화촌에 자위대를 조직하였고 태양촌과 부암 등지에도 구룡평 자위대를 풀어서 감시하느라 야단을 떤다. 김봉학은 이 같은 적들의 움직임을 제때에 유격대에 알리였다. 한편 유격대의 지시로 삐라를 뿌리거나 전화선 끊기, 적정 탐지, 유격대의 길안내 등 일들에 발벗고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구룡평의 일본경찰과 자위대 놈들이 동흥동 김봉학의 집에 들어서더니 “전화선은 누가 끊었는가? 삐라는 누가 뿌렸는가? ”고 따지며 물어본다.

“우리야 량민인데 어떻게 알겠수? ”

김봉학의 대답에 놈들은 김봉학의 멱살을 틀어쥐고 차고 박더니 “이후 삐라를 발견하거나 전화선이 끊어지면 즉시 보고해라! ”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는 더 얻어낼 게 없다고 생각하고 나가버렸다.

1933년 이른 봄이 되였다. 한 밤중에 유격대에서 길잡이를 나와달라는 소식이 왔다. 김봉학은 먼길을 떠날 때면 항상 미시가루를 몸에 지녔다. 안해는 작은 주머니에 미시가루를 넣어주며 언제 돌아오는가 물어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게 나가더니 온종일 기다려도 오지 않고 한 밤중에야 집에 돌아왔다.

“어딜 갔다가 이리 늦어유? ”

“석현쪽 룡암에 다녀왔소. ”

“그 먼 룡암엔 왜유? ”

“건 임자가 알 일이 아니요. ”

김봉학은 안해 허성녀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먼길에 너무도 피곤한 나머지 밥상을 갖추어놓았으나 먹지는 않고 아는 집에서 대충 요기를 했다며 누워버렸다. 요기를 했다는 집은 훈춘으로 다닐 때 늘 들려다니던 집이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연길현 팔도구 석인촌공청단지부 서기 려영준을 안내하여 석현쪽 룡암으로 다녀왔던 것이다.

려영준은 1916년 생으로서 함경북도 성진군 태생이다. 열세살을 잡던1928년에 살길을 찾아 일가 일곱 식구가 두만강을 넘어서니 화룡현 동남차요, 다음은 연길현 횡도자이다. 횡도자 마을에서 려영준은 김명희 아저씨의 영향하에서 야학에도 다니고 소년선봉대에도 가입하였다. 그해가 1930년 11월말. 이듬해 1931년 봄부터는 중공연길현위 산하 룡정, 국자가, 의란구 등지 원거리통신 과업을 맡아나섰다.

1932년 이해 려영준은 17살 소년, 조직의 수요로 활동무대를 팔도구 석인촌으로 옮긴 뒤에는 공청단석인촌지부 서기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33년 이른 봄 이후 조직의 파견으로 석현의 룡암으로 적후공작을 나서게 되였으니 그 안내자가 바로 김봉학이였다. 조직에서 주는 과업이였다. 그날의 룡암행을 두고 려영준은 려영준 구술 , 한태악 정리로 된 항일투쟁회상기 《준엄한 시련 속에서》(연변인민출판사 출판, 1987년 2월 출판, 제102페지)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아침에 왕우구근거지에서 떠났다. 한 련락원동무가 길잡이를 하며 나와 동행하였다. 우리는 하루종일 험준한 산을 넘어서 깊은 골짜기를 빠져 내려갔다. 룡바위골에 들어서니 늦은 저녁 때였다.

연길시 의란진 구룡평 옛 개울가 김봉학, 한원순 두분 희생지에 이르러. (2008년 2월 5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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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밝혀진 한 련락원은 김봉학을 가리킨다. 그해 김봉학은 59세이고, 려영준은 한창내기 18세 소년, 나이 차이도 41세이다. 김봉학의 안내와 동행으로 적후공작차 석현쪽 룡암에 이른 려영준은 당지 지하당조직을 통해 당지 항일활동을 보다 활기띠게 하였으니 국경도시 도문에 공산당의 삐라가 살포되였다는 소문은 도문과 주변 마을들에 파다했다.

그해 1933년 봄의 일이다. 김봉학 댁에서 간장을 달일 때 밤중에 유격대원 한사람이 와서 무엇인가 상론하더니 나가버린다. 안해가 무슨 일인가고 물어도 가타부타 대답이 없다. 이튿날 아침 손자 영빈이가 울타리밖 말뚝 옆에 자기가 무져놓은 쓰레기를 쓸어버리려고 비자루를 들고 따라 나섰다. 할아버지는 큰소리로 손자를 꾸짖으며 “집에 들어가 있어! 밖에 나가면 총에 맞아죽어!” 하고 야단을 쳤다. 그리고 김봉학은 뒤산 감자밭에 올라가 감자싹이 올라오는 것을 보는 척하며 길청령 쪽을 주의하여 살폈다. 안해 허씨보고 담배쌈지를 가져오라고 소리치기에 손자 영빈이가 할머니의 분부대로 달음박질로 다가가서 담배쌈지를 엉덩이에 찼다고 알리였다.

“이것 봐라, 정신이 나갔지.” 그러면서 담배 한대 말아 피우면서 손자 영빈이를 보고 말했다.

“저 건너편 산마루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보이지? 저 사람들이 총을 쏘면 위험하니 빨리 내려가. 집에서 절대 나오지 말아라.”

손자 영빈이가 내려온 후 오전 9시쯤 되여오니 김봉학은 부랴부랴 내려와서 검불더미에 불을 달아 연기를 피웠다. 그러자 산꼭대기에서 사람 셋이 내려와 목도고개 옆에 숨었다. 이윽하여 자동차 한대가 달려오다가 련발 총소리와 함께 개울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김봉학은 자동차 망을 보다가 검불에 불을 단 것이였다. 자동차 습격 결과에 대해서는 김봉학의 집에서는 알지 못한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일본령사관의 주요인물이 나온다고 해서 자동차 습격을 한 것이였다.

1933년 초여름의 어느 날 밤, 유격대원 몇몇이 김봉학의 집을 찾았다. 그들은 김봉학과 오래도록 이야기 나누다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안해 허성녀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던 김봉학은 새벽에야 톱을 멘채 푹 젖은 몸으로 집에 들어섰다. 아침에 김봉학은 만일을 고려하여 이웃에 사는 정로인을 찾아가 근심조로 말했다.

“간밤에 개가 몹시 짖었으니 큰 일이 난 듯하오, 경찰서에 보고하지 않으면 큰 봉변을 당할 것 같구만.”

기실 간밤에 김봉학은 유격대원들과 함께 봉서동으로부터 왕우구에 이르는 구간의 전주 10여대를 베고 전화선을 몽땅 걷어간 것이였다. 정로인이 지게를 메고 꼴 베려 가는 걸음으로 나가보니 과연 전주가 몽땅 잘려있었다. 그는 다급히 경찰서에 가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야난났소. 야단났소. 공산당이 저ㅡ전화선을 몽땅 걷어갔소.”라고 알리였다. ‘급보’를 받은 왜놈들은 현지에 가서 보고 펄쩍 뛰였지만 어쩔수없이 돌아가야만 했다.


연길시 의란진 고성촌 부근의 김봉학 렬사묘. (2008년 2월 5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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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933년) 음력 5월의 어느 하루 유격대에서 사람이 와서 소금과 신이 떨어져 어려운 사정이라고 한다. 그 시절 소금은 전매품이여서 소금표가 없으면 사지도 못하고 가지고 다니지도 못했다. 신은 멀리 국자가에 가서야 살 수 있는데 산다 하더라도 구룡평은 물론 멍지장령 경계가 심하여 어찌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유격대에서 사람이 와서 소금과 신은 이미 사서 황치동에 갔다놓았으니 왕우구까지 운반해 달라고 했다.

김봉학은 운반하는 사람을 물색하다가 태양촌 건너마을에 사는 한원순을 찾았다. 믿을 만한 사람이였다. 한원순은 과연 소금과 신을 발구에 싣고 황초령을 넘어서 부암평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물건을 수레에 바꾸어싣고 꼴단을 덮은 후 동흥동으로 향하였다. 태양촌을 지날 때 공교롭게 박창만이란 특무놈을 만났다. 원래 한 마을에서 살던 사이였다.

“꼴베러 왔소?”

“양!”

한원순은 태연스레 대답하면서 갈길을 재우쳤다. 박창만은 멀어져가는 한원순을 보면서 “저 사람은 구룡평에 사는데 왜 이렇게 먼 곳까지 꼴 베러 왔을가?” 하고 의심을 하였지만 건드리지는 않았다.

김봉학은 한원순이 집에 가져온 물품을 같이 왕우구에 직접 가져갔다. 유격대원들은 기뻐하면서 연신 수고했다고 치하했다. 하지만 한원순은 수심에 잠기면서 태양촌에 개들이 많아 물품송달을 하기 어렵다고 터놓았다. 길가에서 박창만이를 만난 사실을 이야기 했다 . 유격대에서는 위험은 사실이지만 항일의 수요이니 고생스러운 대로 한번만 더 수고해달라고 간곡히 청들었다.

이때 누군가 태양촌에 개들이 많으니 태양촌 건너쪽 인가가 없는 곳까지 갖다달라고 하였다. 한원순은 더 이상 말치 않고 두번째도 갖은 애로와 고생을 하면서 소금과 찌까다비 신을 약정한 지점에 감춰놓고 통지하였다. 김봉학은 밤중에 이 물건을 싣고 새벽에 부암평을 지나 곧추 왕우구 류채골 갈림길에 이르렀다. 뜻밖에 길에서 박창만과 의란구 자위대 대장 곽남섭을 만났다.

“어디로 가시우?”

“백초구 아들의 상점으로 가져가는 길이오.”

그러면서 김봉학은 소금표를 꺼내 보이였다. 두말없이 무사히 지나가게 되였다. 소금은 그날 밤으로 유격대에 련락하여 몇사람이 나누어 지고갔다.

그런데 일이 급격히 탈리는 사건이 터지였다. 6월말에 이르러 왕우구 부녀주임 지금순(池今顺)이 본가집이 있는 구룡평으로 내려갔다가 적들에게 붙잡히더니 자수하고 말았다. 적들은 워낙 김봉학과 한원순을 의심하던차라 지금순을 잡고 조사하니 이 녀자는 소금을 나른 사람의 얼굴은 알지만 이름은 모른다고 한다. 그런 줄도 모르는 김봉학은 7월 2일은 구룡평 장날이라고 두만강 역섬에서 왔다는 사돈도 만날겸 소도 살겸 구룡평으로 내려갔다.


2008년 음력설에 김영빈씨를 취재하다. (2008년 2월 7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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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학은 사돈을 만난 후 한원순이네 집에 모여앉아 셋이서 술을 마시였다. 이때라고 경찰놈들과 자위대 놈들이 우르르 달려들더니 다짜고짜 김봉학의 몸을 수색하였다. 돈 100원이 나오자 적들은 소금 살 돈이라고 력설하면서 빼앗더니 이들 3명을 림시 자위단실인 지주집 마당으로 끌고갔다. 집안에서 의란구 분주소 소장은 지금순더러 창구멍으로 내다보면서 유격대에 소금을 나르던 사람을 대라고 하였다.

지주집 마당에 이른 김봉학과 한원순은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곤 생각지도 못하였다. 그들은 유격대에 물품을 전한 일이 없다고 끝까지 뻗치였지만 김봉학과 한원순을 알아본 지금순은 저 사람들이 옳다고 머리를 끄떡이였다. 적들은 김봉학과 한원순을 잡아패다가 이튿날 새벽에 경찰서 토성 밖 개울 옆에서 이들 두 사람의 목을 잘랐다. 항일유격대를 성원하여 나선 김봉학과 한원순의 장렬한 최후였다. 1933년 7월 3일에 있은 일이다.

남편의 비장한 소식을 듣고 김봉학의 안해 허성녀가 그날로 시체를 찾으려고 구룡평으로 내려가니 적들은 총을 마구 쏘아대면서 시체에 접근도 못하게 하였다. 하는 수 없이 아는 사람을 통하여 시체라도 찾으려고 애걸하니 그 사람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항일한 가족은 몽땅 죽여버린다고 야단이니 어서 빨리 피하시우.”라고 한다. 김봉학의 가족 식구들은 공포에 떨다가 시체도 돌볼 사이 없이 피난길에 오르게 되였다.

잔인무도한 적들은 김봉학과 한원순의 목을 자르고도 성차지 않았다. 이 자들은 김봉학의 머리를 베여 칼로 꿰여가지고 갔다. 한원순의 시체는 반나절이 지나 놈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그의 삼촌이 꼴단에 머리를 싸 업고 다리를 바로 묶어서 10길을 거슬러올라가다가 개울 옆에 자리를 찾아 초장하여놓았다.

이튿날 김봉학 가족이 배초구로 피난가면서 길청령을 넘을 때였다. 허성녀 녀인은 비통한 마음을 걷잡지 못한 채 마구 통곡하였다.

“아이구 원통해라! 생사람을 잡아먹은 이런 세상이 어디 있소! 하늘이나 아시옵시사! 그 가족마저 죽여버린다니 아이구 원통해라!”

“그만 하세요. 누가 들으면 어떻게 해요?!”

시동생의 말림에 허성녀는 울음을 그치였으나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 그는 피비린 1920년 10월 “경신년 대토벌이 이러했지! 의란구, 의란구, 하였더니 일난 곳이라 해서 의란구라 하였구나!” 하며 긴 한숨을 내쉬였다.

1956년에 김봉학의 진실한 력사가 밝혀지면서 정부로부터 렬사증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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