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기로예변구 금융사업의 창시자 고첩성

2019-10-10 08:37:05

복건성 장주에는 70여년간의 비바람 속에서도 여전히 전해져내려오며 칭송되고 있는 영웅렬사가 있다. 그가 바로 우리 당의 금융사업 창시자의 한 사람인 고첩성이다.

고첩성은 1909년 9월 복건성 장주에서 태여났다. 청년시기에 혁명에 뛰여들었다. 1926년 국민혁명군이 장주를 공격하자 그는 반제대동맹에 참가했다. 대혁명이 실패한 후 그는 국민당군대를 떠났다. 1928년 그는 하문대학에 들어가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졸업하기 전에 상해 중남은행에 취직했다. 얼마되지 않아 다시 장주에 돌아와 백천은장에서 출납직을 맡았다.

고첩성 렬사

1932년 4월, 고첩성은 중국로농홍군에 참가하였고 후에 서금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선후하여 선전대장, 총무처장, 회계, 조직과장을 담임했다. 그는 금융지식을 충분히 활용하여 모택민의 쏘베트구역 경제사업 계획 및 쏘베트국가은행의 화페발행 사업을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처음으로 전군의 회계사업 제도를 구축했다.

1934년 10월, 고첩성은 장정에 참가하여 중앙홍군을 따라 섬북에 도착한 후 홍군대학 제1기에 들어가 학습했다.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그는 팔로군 제129사를 따라 화북 적후에 들어가 진기로예항일근거지를 개척하고 기남세무총국 국장, 진기로예재정처 처장을 맡아 기남과 태항구 재정경제사업의 본보기를 개척했다.

적들의 금융전쟁에 대처하고 근거지 경제건설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팔로군총부와 중공중앙 북방국은 기남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고첩성이 이 중임을 맡게 했다. 1939년 10월, 기남은행이 설립되고 고첩성이 본행 행장 겸 정치위원직을 담임했다. 기남은행의 지페발행은 진기로예변구 군민들이 적들과의 금융전쟁 서막을 열었음을 표징한다. 그의 인도와 선전하에 기남은행의 지페는 재빨리 시장에 발을 붙였고 인민들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으며 ‘항일화페’로 불리웠다. 그는 또 근거지 물질기반을 강화하여 공동으로 외화에 대처하고 항일화페의 신용을 공고히 하며 항일군민들에 대한 공급을 조절하고 늘이며 근거지 경제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5개 은행(진찰기은행, 섬감녕은행, 산동북해은행, 진서북농민은행, 기남은행) 송금거래 전략성 계획을 제기했다.

1943년 5월 14일, 고첩성은 하북성 내구현 백록각촌에서 일본군과 조우하여 포위를 뚫는 과정에 전우를 구출하고 기밀문건을 보호하기 위해 장렬히 희생되였다.

고첩성의 손자 고경린은 “혁명과 민족의 해방, 숭고한 신앙을 위하여 할아버지는 가정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했고 공산주의자의 책임과 력사가 부여한 신성한 사명을 짊어졌으며 당과 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하여 원망과 후회도 없이 용감히 앞으로 나아갔다.”고 말했다.

고경린은 “이 몇년간 아들을 데리고 여러차례 할아버지가 생활하고 싸웠던 태항산에 와 할아버지의 전투 발자취를 좇아 할아버지의 홍색의 혼을 느꼈다. 이는 할아버지에 대한 추모이고 더우기는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긴 귀중한 정신재부를 후손들이 대대손손 전해가려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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