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련군 재봉대 녀전사 김벽영

2019-10-12 09: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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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에는 김벽영(金碧荣)이라는 조선족 녀전사가 활동하고 있었다. 김벽영은 1936년에 겨우 15살밖에 안돼 재봉대 녀전사들로부터 쑈진(小金儿)으로 불리였다. 1936년에 15살이니까 1922년생이고 통하현 산구(通河县山里) 출신이라는 걸 보아 통하현 태생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통하현 조선사람들 거개가 오늘의 청하진(清河镇) 경내 대고동(大古洞)과 서북하(西北河)에 이민 온 조선이주민들이고 그 시초이주가 1920년 초라 할 때 더욱 그러하다. 김벽영은 청하진에 이주한 후 태여난 조선이주민의 후예라고 함이 옳을 듯하다.

오늘의 통하현 청하진 일대는 1928년 봄과 가을에 벌써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조선인 혁명가 김지강(金志刚, 즉 崔镛健)과 김재연(金在渊), 장세진(张世振) 등이 선후하여 나타나 활동하면서 서북하와 대고동 일대는 혁명의 기운으로 넘쳐났다. 1930년 가을에는 대중적 추수투쟁 물결이 드세게 일어나고 1935년 봄에는 청하 서북하의 30여호와 대고동의 20여호 조선사람들이 통하일대에서 활동하는 항일부대ㅡ동북반일련합군에 참가하게 되니 지방에서 소선대원으로 활동하던 김벽영이 우리 당이 지도하는 항일부대에 참가한 것이 이 시기의 일이 아닌가 싶다.

대부분 조선족으로 구성된 주하반일유격대가 동북반일련합군ㅡ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으로 개편된 것은 1935년 1월의 일이다. 제3군은 건립된 후 신속한 발전을 거치면서 산하에 전문 재봉대를 두어 군복문제 해결에 전력을 다하였다. 1935년 11월 이후 3군 재봉대는 통하현의 대고동과 소고동 깊은 산속에 설치된 밀영에 자리잡았다가 1936년 8월 1일 동북항일련군 제3군으로의 개편을 앞두고 소서림하(小西林河) 상류의 심산밀림 속  로도묘골, 랑랑궁(老道庙沟娘娘宫)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

로도묘골과 랑랑궁은 오늘의 이춘시 서림구에서 18킬로메터 되는 홍성촌 동남산 북쪽비탈(西林区18公里红星村东南山北坡山脚处)에 위치하고 있으며 탕리천(糖梨川) 항일련군 3군 재봉대라고도 불리운다. 모아산밀영이라고도 한다. 3군의 후방류수처는 언녕 탕리천에 자리잡고 있었다. 1936년 여름 항일련군 3군에서는 닥쳐올 겨울에 대비하여 동복을 해결하기 위하여 모아산으로 불리우는 심산 속에 탕리천밀영을 새로 일떠세우게 되였다.

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 녀전사 김옥선의 해방 후 회고에 따르면 재봉대의 최초 7명은 진정산(陈静山), 장의숙(张义淑), 곽숙진(郭淑珍), 리종부(李钟孚), 김호련(金浩莲)과 자기, 후근일을 맡아보는 고씨(顾氏)라는 분  등 7명으로 알려진다. 3군 재봉대 관련 자료를 보면 1936년 9월에 통하현에서 홍명숙, 김벽영, 장경숙, 김옥선, 장희숙, 박경숙(洪明淑、金碧荣、张景淑、金玉善、张熙淑、朴景淑) 등 녀전사들이 새로 재봉대로 오는 데서 3군 재봉대 녀전사들은 15명으로 늘어난다. 이들 15명중 진경산 등 11명이 조선족 녀전사로 알려진다. 김벽영이 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에 참가한 진실한 력사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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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련군 3군 재봉대 출신인 김백문의 회고에 따르면 그 시절 재봉대 대장은 진경산, 당지부 서기는 김백문이고 재봉대밀영은 3군 군부와 수십리 떨어진 산속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재봉대밀영은 워낙 염씨 성을 가진 염감독(闫把头)과 그보다 나이가 어린 30여세의 작은 감독(小把头)이 살아가는 산막이였다. 그들은 산막 주변에 약간의 뙈기밭을 일구어 옥수수와 호박, 감자 등을 심는 한편 수렵에 나서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재봉대가 그 자리에 간편한 귀틀집을 세우니 곧 재봉대밀영으로 자리를 잡았다.

김벽영이 처음 3군 재봉대에 참가할 때만 해도 재봉대에는 일본제 낡은 재봉기 한대 뿐이고 재봉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도 대장 진경산(陈静山,조선족) 한 사람 뿐이였다. 김벽영 등 녀전사들은 진경산 대장에게서 재봉기술을 부지런히 익히였다. 그런데 그 시절 3군부대에서는 만일을 고려하여 적들에게서 로획한 천이나 솜, 식량 등을 재봉대밀영에서 20~30리 떨어진 곳에 숨겨놓은 데서 재봉대녀전사들이 자기절로 날라와야 하였다.

때는 한창 8~9월이라 맡겨진 동복과업을 질적으로 제때에 완수하자면 시간을 다그쳐야 하였다. 눈 내리기 전에 옮겨야 눈 내린 후의 어려움과 눈 우의 발자취로 인한 적들의 자취추적을 피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진경산 대장은 동지들과 토의하고 20~30리 밖 비밀거점의 천 등을 전부 옮겨오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로부터 김벽영 등 10여명 재봉대 녀전사들은 매일 한차례씩 왕복 수십리 길에 나서면서 인당 식량 한주머니 아니면 천 몇필씩 지여 날라야 하였다. 나이 어리고 단련이 없는 김벽영은 처음에는 선배들 만큼 지여나를 수는 없었지만 차츰 적응되여갔다. 어깨는 부어오르고 발에는 물집투성이여도 누구 하나 어렵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1936년 9월 18일, 소흥안령의 심산 속에 위치한 탕리천 3군 재봉대밀영에서 주하-탕원 중심현위와 3군-6군 당위 성원들이 참가한 ‘주하탕원련석회의’(珠汤联席会议)가 열리였다. 련석회의에서는 중공만주성위를 없애고 길동, 동만, 남만, 북만 4개 성위를 설립할 데 관한 상급 당의 지시와 당면한 정치군사 정세, 조직에 대한 중대한 문제들이 토의되면서 중공북만림시성위를 정식으로 조직하였다. 련석회의기간 김벽영 등 재봉대 녀전사들은 회의참가자들의 숙박과 식사 등 후근일들을 전반적으로 맡아나서며 최선을 다하였다.

주하탕원련석회의에는 통하현사람이고 공청단북만성위 서기인 황성식도 참가하였다. 련석회의에서 중공북만 림시성위가 조직되면서 황성식이 림시성위 청년부장으로 당선되였다. 의미 있는 것은 련석회의에 참가한 황성식(黄成植, 1918-1939)과 재봉대 녀전사 김벽영이 련인 사이라는 것이다. 여러 자료들에서는 김벽영이 황성식의 련인으로, 후에는 안해로 등장하는데 둘 다 통하현사람이여서 원래부터 알고 련인관계로 지냈는지 아니면 련석회의에서 련인관계를 가지고 후에 부부관계로 발전하였는지는 알려지지가 않는다. 혹자는 1936년에 15살밖에 안되는 김벽영이 너무 빨리 련인으로 발전하지 않았나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겠지만 1930년대 그 세월은 남녀 15살쯤이면 의례 결혼해야 하는 나이, 15살 정도를 넘기면 로처녀, 로총각으로 불리였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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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2월에 중공북만 림시성위 청년부장 황성식은 중공하강특위 서기 중책을 짊어졌다. 중공하강특위(中共下江特委)는 송화강 하류지역항일운동을 지도하는 당의 기관으로서 1936년 9월 18일 주하탕원련석회의 결의에 의해 중공탕원중심현위를 개편하여 조직되면서 중공북만 림시성위의 지도를 받았다. 중공하강특위는 하동(河东), 상강(上江) 특위와 더불어 림시성위 산하 하나의 특위로 떠오르면서 특위 아래에 가목사시위(佳木斯市委)와 탕원, 화천, 의란, 부금, 수빈(汤原、桦川、依兰、富锦、绥滨) 등 5개 현위를 두었다.

김벽영의 남편 황성식은 중공하강특위 서기로 부임한 후 산하 가목사시 항일운동을 지도하다가 적들에게 발견되여 총상을 입었다. 황성식은 중공가목사시위 제1임 서기 동선교(董仙桥)의 집에 머물렀으나 상처가 중하였다. 동선교의 부인은 황성식을 녀자로 분장시키고는 마차편에 가목사로 호송하였다. 가목사에서 다시 항일련군 6군의 조선족 서광해에게로 넘어가니 서광해는 황성식을 다시 쏘련 쪽과 가까운 7군의 최석천에게 보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황성식은 1937년 겨울을 흑룡강너머 그 시절 쏘련땅에 가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젊은 안해인 김벽영은 남편의 치료과정을 두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려지는 자료가 전혀 전해지지 않아 유감이기만 하다. 가목사시작가협회 회원이고 교원 출신이며 항일련군 녀전사 연구가인 교화(乔桦)와의 2015년 5월 1일 통화에 따르면 김벽영과 황성식 사이의 딸이 지금 흑룡강성 의란현일대에서 살고 있다고 하니 김벽영의 결혼생활과 이왕지사가 적지 않게 알려지리라고 믿어마지않는다.

지금 인터넷을 달구며 하나하나 략력으로 알리는 <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 녀전사들> 자료에 의하면 김벽영과 리민은 1938년 9월 28일 6군 1사로 전근한 것으로 알려진다. 실상 탕원현 오동하촌(梧桐河村) 출신인 리민(李敏)이 항일련군 6군부대에 참가한 것은 1936년 겨울의 일이고 그 후 인차 배성춘을 재봉대 대장으로 하는 6군 재봉대 녀전사로 활동하게 되였다. 리민 관련 글들이거나 개별적인 회고문, 리민회고록을 헤아리면 리민과 비슷한 또래 김벽영은 가장 미더운 친구로서 그와 더불어 1938년 9월 이전에 벌써 6군 재봉대 녀전사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김벽영이 3군 재봉대에서 6군 1사로 넘어온 1사밀영은 오늘의 보청현 과회산(宝清县锅盔山)에 자리잡은 데서 과회요밀영이라고 한다.

2012년 12월, 흑룡강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리민회고록에는 1938년 9월 이전에 김벽영이 이미 6군 1사 재봉대에 나타나고 리민과 함께 원래의 <산나물채집곡>에 자체로 지은 가사를 붙이고 배성춘 대장 등과 함께 부르는 장면이 나타나며 1938년 5월의 어느 날 6군 정위 장수전(张寿钱,즉 李兆麟 )으로부터 총을 발급받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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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1938년의 일이다. 그해 8월 리민(1924년생)은 6군부대의 제1사 후근처 처장으로 활동하던 아버지 리석원(李石远)이 식량 운반 도중 적들을 만나 조부관 등과 함께  불행히 희생되였다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되였다. 이 뜻하지 않은 소식으로 리민과 그의 동지들이 격분에 떨 때 황성식이 항전승리의 그날이 멀지 않으니 비통을 힘으로 바꾸자면서 자기가 지은 노래 <언제 봉화 끝나면 언제 환고향하리>란 노래를 리듬감 있게 박자를 치면서 한구절 한구절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대설산아 천리에 미치고 용사들아 로숙하누나

눈 속에 풍찬하면서 우등불로 몸을 덥히니

서로 뭉치며 송구영신하누나

에헤 에헤요 송구영신하누나


서정인들이여 전전하누나 싸움터로 돌격하누나

야초로 기아 이기고 나무껍질로 추위 막아도

구국일념으로 달갑구나

에헤 에헤요 구국일념으로 달갑구나


용사들아 높은 산에 올라 고향을 바라보자

고향 바라보니 연기로 덮였구나

송화강 물 마이고 흑룡강 마이누나

에헤 에헤요 남아의 마음속 복수로 넘치누나


용사들아 구름 타자 싸움터를 들부시자

싸움터를 들부시며 기개 높으니

중화 광복의 붉은기 휘날리누나

에헤 에헤요 언제 봉화 멈추면 언제 환고향하리


가사는 눈 속에서 풍찬로숙하면서 1939년 새해를 맞는 항일련군 전사들을 정면화 하고 있다. 모진 기아와 강추위 속에서도 구국일념으로 불타면서 고향을 그리는 그네들, 광복이 되는 날 고향에 돌아가리라는 그네들이 돋보이기만 한다. 항일련군 그네들은 이같이 일제침략자들과 싸우는 강철의 대오였다. 노래는 가사부터 가슴을 울리여 서로 앞다투어 배우면서 광복의 그날을 그리여보았다.

아래 이야기는 항일련군 녀전사 김백문 관련 이야기가 된다. 1938년 5월보다도 이른 이해 음력설경에 3군 재봉대 당지부 서기로 활동하다가 잠시 북만성위 비서처에서 일을 보게 된 김백문은 무슨 원인인지 온 얼굴에 누런 물이 흐르는 부스럼으로 번져갔다. 그때를 두고 김백문은 한편의 회고문에서 누런 물이 어디로 흐르면 어디에서 부스럼이 생겨나면서 나중에는 두 눈까지 덮을 기세로 말이 아니였다고 회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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