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련군 재봉대 녀전사 김벽영
리민은 눈구덩이 속에서 적들과 생사결단을 내자는 배성춘의 웨침소리를 너무나도 똑똑히 들었다. 그 웨침소리는 곧 적들의 총성과 함께 사라졌다.

2019-10-21 08:41:21

김벽영 소속 동북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 유적비. (사진자료)

심산 속에서 먹을 것도 얻기 어려운데 약품은 더구나 볼 수도 없어 부스럼은 보다 기승을 부렸다. 한번은 적토벌대와 조우하게 되였지만 두 눈이 보이지 않아 동지들이 깊은 산속으로 내뛸 때 김백문은 전우들의 소리를 따라 달릴 수밖에 없었다.

조직에서는 김벽영을 찾아 상의하고 김백문을 통하현 산간지대의 김벽영 집으로 보내였다. 마침 김벽영의 집에는 항일의식으로 꽉 찬 벽영의 부모와 녀동생까지 있어 시름놓고 지성어린 보살핌을 받을 수가 있었다. 벽영의 어머니는 마땅한 약이 없다고 맥을 버린 것이 아니라 매일 소금물로 온 얼굴의 부스럼을 깨끗이 소독하여주는 한편 산에 가서 까마귀열매(老鸹眼)를 뜯어다가 물과 함께 끓이며 그 물로 부스럼부위를 부지런히 닦아주었다. 또 까마귀열매나무 뿌리를 캐다가 불에 쪼이면서 내돋는 물로 얼굴을 발라주었다.

한달이 푼히 흐르자 김백문의 부스럼은 깨끗이 나아져 조선족 녀전사는 다시 동지들의 신변으로, 성위 비서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는 북만 항일련군부대의 치료미담으로 지금까지 전해져내려오고 있다.

항일련군 제6군 재봉대 대장 배성춘 초상화. (조선족, 장가요전투에서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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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벽영은 6군 재봉대에서 재봉대 대장 배성춘 언니와 리민과 장옥춘(张玉春)과 넷이서 군복짓기를 도맡았다. 배성춘 대장이 재단하면 김벽영 등 셋은 부지런히 재봉기를 돌리였다. 교도대의 남전사들은 염색하고 널어서 말리는 것을 책임졌다. 재봉대 녀전사들은 군모만들기에서 어려움에 봉착했는데 그 어려움이란 붉은 오각별을 만들 붉은 천이 없는 데 있었다.

그 시절 부대전사들은 권총을 붉은 천으로 싸기를 즐기였다. 김벽영 등 재봉대 녀전사들은 그들에게 붉은 천을 내주기를 바랐지만 전사들은 보배처럼 아끼는 권총용 붉은 천을 쉽사리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거듭되는 동원으로 분분히 내놓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붉은 천은 태반이나 모자라서 적지 않은 군모에 붉은 오각별을 댈 수가 없었다.

1938년 5월, 6군 군부에서는 배성춘이 이끄는 6군 재봉대 동지들을 모두 군교도대에 편입시키였다. 군교도대는 군부와 함께 행동하는데 2개 중대로 무어진 군교도대의 당지부 서기는 배성춘이였다. 김벽영은 재봉대를 따라 군교도대에서 활동하면서 오동하반(梧桐河畔)의 로등산(老等山)에 가서 부대의 서정을 후원하여 나섰다. 그들의 후원사업은 주로 서정부대를 위해 탄알띠와 모자, 각반 등을 깁는 일들이였다.

그해 8월과 9월 사이 김벽영 등이 믿고 따르는 배성춘이 6군 1사의 후근처 책임자로 전근하게 되였다. 군교도대의 류수인원들인 김벽영 등 한패의 동지들은 배성춘을 따라 보청현의 과회산 과회요(锅盔山锅盔窑)밀영으로 가서 6군 1사 정치부 주임이고 조선사람인 서광해(徐光海)의 소부대와 만났다. 과회요밀영은 과회산의 동남쪽에 위치한 6군 1사의 밀영으로서 1937년 여름에 건립되여 줄곧 리용되고 있었다. 6군 1사 사장 마덕산(马德山,본명 金乘浩)도 조선사람이였다.

1938년 겨울은 북만항일련군투쟁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기로 기록된다. 적들의 그칠 줄 모르는 참빗질(篦梳) 토벌 앞에서 심산속의 밀영들은 하나 또 하나 파괴되여 말이 아니였다. 그때 6군 군부에서는 과회요밀영의 재봉기를 망라한 모든 물건들을 감추고 즉각 전이하라는 명령을 내리였다. 6군 1사 정치부 주임 서광해와 배성춘은 밀영의 20여명의 소부대를 이끌어 고청현내의 장가요(张家窑)쪽으로 전이하였다.

김벽영 소속 소부대는 세찬 눈보라속에서 하나 또 하나의 산을 넘다가 장가요의 산봉을 가까이 두고 적정을 발견하였다. 그날은 1938년 11월 23일. 마동무(小马)가 금방 산정에 오른 놈한테 덮치다가 키크고 우람진 놈에게 도로 깔리였다. 류패장(刘排长)이 마침 이르러 총 한방을 먹이자 놈은 그자리에서 나동그라졌다. 찰나 마동무는 적의 시체를 음페물로 삼고 첫방에 군도를 휘두르는 놈을 거꾸러뜨렸다. 300여명의 적들이 산마루를 차지하려고 아득바득 달려들었다.

항일련군 제6군 제1사 정치부 주임 서광해. (조선족, 장가요전투에서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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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해는 지형부터 살피였다. 서쪽은 현애절벽이고 남쪽은 눈으로 덮힌 골짜기였으며 동산쪽에 듬성듬성 나무들이 서있어 음페할 수가 있었다. 서광해는 배성춘한테로 기여가 일부를 데리고 동산쪽을 에돌아 북산쪽에서 적들을 습격하겠으니 먼저 적들을 막아내다가 북산에서 총성이 울리면 동산으로 철거하라고 말하고는 10여명을 이끌고 동산쪽으로 쳐나갔다.

이윽고 동산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적들의 주의력은 동산에 쏠리였다. 배성춘이 재봉대 녀전사들더러 탄알을 아끼라고 할 때 마동무가 허리에서 수류탄을 끄집어내여 가까이 다가든 적들을 향해 뿌리였다. 또 련속 2개의 수류탄을 안기자 적 10여명이 무더기로 죽어나가고 기관총이 벙어리가 되였다. 마동무가 세번째 수류탄을 뿌릴 때 적탄이 그만 그의 복부를 관통하였다. 마동무는 피못에 쓰러지면서도 곁의 리민에게 적들과 싸워가라고 나지막한 소리를 남기였다.

이날의 전투를 장가요(张家窑)전투라고 일컫는다. 적들의 기관총이 벙어리가 되자 류패장이 재빨리 굴러내려가 기관총을 수중에 넣으려고 하였다. 배성춘이 권고하려고 할 때는 이미 늦어 여러 사람들은 화력을 집중하여 류패장을 엄호하였다. 기관총가로 다가간 류패장이 기관총을 잡으려는 순간 적들의 집중화력이 그한테로 쏟아졌다. 조금 지나 류패장이 다시 기관총을 잡으려고 서두를 때 적들의 집중사격이 다시 시작되였다. 류패장은 다시 움직이지 못하였다.

분노한 배성춘이 희생된 동지의 원쑤를 갚자며 주변의 전사들을 이끌어 적들의 몇차례 진공을 물리쳤다. 동산쪽으로 짓쳐나간 서광해 주임쪽에서도 적들의 포위에 들어 전투가 자못 치렬하였다. 아군의 두 진지에서는 적들과 생사판가리 싸움을 벌리였다.

김벽영도 이 생사판가리 싸움 가운데 한 전사였다. 어느 순간 탄알이 떨어지자 김벽영은 배성춘 대장한테 탄알을 다 써버렸다고 나직히 소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성춘은 다가드는 적들을 족치라고 높이 소리쳤다. 우리 전사들이 마지막 탄알을 다 써버리자 적들은 포복전진으로 한걸음한걸음 다가들었다. 적들이 40메터 쯤까지 다가들자 배성춘의 명령과 함께 김벽영은 등은 마지막 수류탄으로 선두에 몰킨 적들을 물리쳤다.

적들은 삼면으로 다시 조여들었다. 탄알과 수류탄까지 전부 써버렸기때문에 배성춘은 “빨리 남산으로 퇴각하라!”고 지시하였다. 재봉대의 녀전사들이 산을 오르던 길을 따라 산아래로 퇴각할 때 김봉숙(金凤淑)녀전사가 앞에서 그들을 이끌고 배성춘이 뒤에서 동지들을 엄호하여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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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숙은 옆에 선 리민이를 보고 앞에서 눈길을 헤치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눈이 무릎을 치는 데서 리민은 몇걸음 나아가지 못했는데 뒤쪽에서 동정(动静)이 없었다. 뒤를 돌아보며 동지들을 부르려는데 적탄이 마구 날아들었다. 눈우에 넘어진 리민은 눈앞의 개암나무숲으로 기여가다가 눈구덩이에 뛰여들었다.

리민은 눈구덩이 속에서 적들과 생사결단을 내자는 배성춘의 웨침소리를 너무나도 똑똑히 들었다. 그 웨침소리는 곧 적들의 총성과 함께 사라졌다. 적들은 물러가고 어둠이 몰려들었다. 마동무, 류패장, 배성춘 큰언니가 희생되였다면 김봉숙, 김벽영 등은 어떻게 되였을가? 홀로 남은 리민은 눈구덩이 속에서 기여나와 가까이에 쓰러진 키다리 녀전사와 배성춘을 차례로 안으며 울다가 별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밤을 헤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천신만고로 대오를 다시 찾은 리민은 뒤늦게야 마동무, 류패장, 배성춘 등 동지들외에도 동산쪽으로 나간 조선족 서광해 주임 등도 장렬히 희생되고 김벽영, 장옥춘(张玉春), 김봉숙(金凤淑), 심영신(沈英信) 등은 포위를 돌파하다가 불행히 적들에게 체포되였다는 비보를 접하고 비통에 잠겼다.

사실 필자는 김벽영외 장옥춘, 김봉숙, 심영신 등 세 녀전사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러던 차 필자는 2019년 10월 6일, 위해 석도를 모처럼 찾아준 류영씨와 만남의 기회를 가지였다. 류영씨는 동북항일련군력사문화연구회 부비서장이고 항일련군 제6군 재봉대 녀전사였던 리계란의 딸로서 최근년간 중문으로 10여만자에 달하는 실화문학 ㅡ《나의 어머니 리계란》과 항일련군 녀전사 리민회고록ㅡ《풍설정정》(风雪征程, 중문 80여만자), 《동북항일련군 녀병》(38만여자) 등 적지 않은 책들을 펴낸 이름난 작가이기도 하다.

《동북항일련군 녀병》에 따르면 장옥춘은 흑룡강성 하강지구의 한 부녀간부로서 1938년초 이후 항일련군 부대에 참가한 녀전사로 알려진다. 김봉숙(조선족)은 1938년에 24세이고 항일련군 제5군의 한 지도간부의 안해. 심영신(조선족)은 1938년에 19세이고 항일련군 제7군 제1사 제2퇀의 김주임의 안해로서 인물이 고운데다가 말하기와 노래를 즐기고 춤을 즐기는 활발한 녀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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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1월 23일 이날의 김벽영 등 체포과정과 적들에게 끌리여가는 과정에 대해서도 필자는 잘 모르고 있었다. 이 과정을 알고 있는 항일련군 녀전사 연구가이고 가목사시작가협회 회원인 교화를 여러 모로 찾다가 딸애의 도움으로 2015년 4월 30일 밤 드디여 직접 통화를 가질 기회를 가지였다. 교화는 자기가 직접 수집 정리한 <김벽영 체포되여 적기가를 부르다> 한편과 관련 정리자료들을 인터넷으로 사심없이 보내주어 심한 감동을 받았다.

여기에 교화의 글 <김벽영 체포되여 적기가를 부르다>의 몇구절을 그대로 옮기여본다.

1938년 11월 23일, 적들의 토벌에서 벗어나고저 항일련군 6군 재봉대 대장 배성춘(裴成春)은 뼈를 에이는 설한풍과 온 하늘에 흩날리는 눈을 무릅쓰고 오동하(梧桐河)를 떠나 보청현(宝清县)으로 전이하고 있었다. 리민과 김벽영이 이 소부대 속에 섞이였다. 기아에 허덕이던 전사들이 보청현 장가요(张家窑)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양청매(杨青海)가 이끌며 토벌에 나선 위만군 35퇀과 조우하게 되였다. 그번 혈전에서 항일련군 6군 재봉대 대장 배성춘 등 여러 전사들이 장렬히 희생되고 김벽영 등 4명 녀전사들이 체포되였다. 리민은 눈구덩이 속에 떨어져 살아날 수가 있었다.

양청매 무리들이 김벽영 등 4명 녀전사들을 강가요로 압송하는 도중 김벽영 등 네 자매들은 <적기가>를 높이 불렀다.

……

적기가의 노래소리는 산곡간에 울려퍼지면서 양청매 등 위만군 병사들의 마음을 크게 울리였다. 아직 량심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위만군들은 당당한 오척남아도 보가위국을 생각지 않고 몇 사발 수수밥에 매달려있으니 저 녀인들보다 못하다고 개탄하면서 반란할 생각까지 가지였다.

김벽영 등 4명 녀전사들의 견강함이 보여준 거대한 항일의 힘이였다. <항일련군 3군 재봉대의 녀전사들> 관련 자료에 따르면 김벽영은 적들에게 체포되여도 굴강하게 싸웠고 나중에 적들에 의해 무기형을 선고받았으며 남차감옥(南岔监狱)에 투옥되였다가 옥중에서 빛나는 생을 마감지었다. 김벽영의 생전 친밀한 전우인 리민도 김벽영은 후에 장렬히 희생되였다고 관련 회고를 남기였다. 김벽영의 남편 황성식은 1939년 6월, 학북 로등산(鹤北老等山)으로 가는 도중 한차례 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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