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원유격총대 참모장 리인근

2019-10-28 09:36:21

리인근의 조카 리영근(1910년-1976년)은 항일련군 녀전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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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렬처절한 북만의 항일무장투쟁력사를 펼치면 황포 출신으로서 항일련군 제6군의 건설에 디딤돌 역할을 한 공산당원 리인근 렬사가 서서히 떠오른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리인근 렬사를 잘 몰랐으며 항일련군의 녀전사 리영근의 삼촌인 리운건과 1935년 봄에 이른바 ‘민생단사건’으로 억울하게 피살된 리인근을 같은 사람으로 이어보지 못하였다. 자료가 각각 흩어진 데다 연구가 따르지 못하여 필자가 정리한 한편의 리인근 렬사 전기는 무척이나 강마르기만 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재작년 2017년 1월 5일과 6일에 여러 면으로 수집한 자료에 따라 《예술세계》지에 련재할 <항일련군 노래>(1)를 정리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리영근의 삼촌 리운건과 ‘민생단’으로 피살된 탕원유격총대 참모장 리인근은 한 사람이였다. 살아 움직이는 새로운 리인근 렬사 전기는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알고 보면 리인근(李仁根, 1895년ㅡ1935년)은 그냥 스쳐지날 인물이 아니였다. 항일련군의 녀전사 리영근으로 전해지는 여러 연구물에 따르면 리인근은 리영근 녀전사의 삼촌으로 본명은 리운건(李云健, 별명은 李仁根, 张世振, 张秋), 고향은 조선 황해도, 출생은 1895년생, 중국행은 1921년으로 나타난다. 1921년 이해 어느 날, 리인근은 형님 리운강(李云岗)의 일가족과 더불어 두만강을 건너 북상하면서 오늘의 흑룡강성 연수현 옥하향 영승조선족툰(延寿县玉河乡永胜朝鲜屯)에 삶의 터전을 잡았다. 조카 리영근(李英根)은 1910년 5월 20일생으로 후일 리영화(李英华), 장영화(张英华), 장패산(张佩珊)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리인근으로 말하면 그 시절 알려지는 자료가 더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남하하여 남녘땅 광주로 달려가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황포군관학교 시절 자료도 보이지 않지만 황포 제11기생으로 알려지는 리운산(李云山, 张致文, 李云焕)이 리인근과 비슷한 인물로 보인다. 리운산-리운환이니 리운건과 비슷하고, 장치문으로도 불리였으니 후일 장세진, 장추로 알려진 장씨와도 련관성이 없을가도 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남녘땅에서 활동하던 리인근이 북만땅 연수에 다시 나타난 것은 1928년 5월의 일이다. 그가 형님 리운강(李云岗)의 집에 들어서니 형님 리운강은 워낙 부지런한 사람이여서 몇해 사이 일약 원근에서 한다하는 대부자로 살고 있었고 형님의 무남독녀 외동딸 리영근은 어릴 때부터 단아하고 총명하기로 이름이 있더니 소학교에 이어 중학교 공부까지 한데 다가 진보적인 서적을 읽으며 일제놈들의 침략으로 인한 조선의 현실, 반일지사들의 항일투신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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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인근은 유일한 조카인 리영근에게 남녘땅 광주와 북벌전쟁의 정세, 남창봉기와 광주봉기 등을 소상히 말해주면서 “중국사람이나 조선사람은 망국노가 되여서는 안된다.”, “일본놈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항일의 도리를 깨우쳐주었다. 이에 리영근은 결연히 다니던 고중을 떠나고 안온한 집을 떠났다. 그녀는 삼촌 리인근과 삼촌의 동지 김지강(즉 최석천, 최용건)을 따라 탕원으로 달려갔다. 탕원에서 삼촌이 장세진(또는 장추)으로 나타나자 리영근도 삼촌을 따라 이름을 장패산(또는 장영화)으로 바꾸었다. 리영근이란 본명을 아는 사람은 삼촌과 김지강 그리고 새로 알게 된 리춘만 뿐이였다.

리인근과 김지강의 탕원행은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이였다. 탕원에 간 것이 1928년 5월 이후이니 조선공산당 당원들인 채평(蔡平), 리춘만(李春满), 한우(韩友), 김리만(金利万), 최영일(崔英日) 등 선각자들이 그 전해인 1927년 여름에 이미 탕원현 오동하 복흥툰 하동(河东)에 선참 나타나 라흥학교(罗兴学校)를 꾸리면서 반일사상을 선전하는 한편 여러 반일군중단체를 조직하고 있었다.

오동하는 라북현(오늘의 탕원현) 경내 송화강 하류에 위치한 고장으로서 오동하가 송화강에 흘러드는 하구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고장은 토지가 비옥하고 수원이 좋아서 1922년에 이미 몇호의 조선이주민들이 이주하여 논을 풀고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1924년경에는 민국 흑룡강성정부에서 조선이주민을 많이 받아들여 오동하 량안을 개척하게 해 오동하 하류 량안의 조선이주민은 일약 300여호에 달하였다. 조선사람마을은 대외로 복흥툰이라 불리였다.

1925년경에 그 시절 흑룡강 독군(督军)인 오준생(吴俊生)과 만복림(万福林)이 오동하일대를 차지하고 조선이주민들을 받아들여 농장을 꾸리였다. 그 후까지 도합 두세패로 심양, 할빈 등지에서 조선이주민들이 들어서면서 가장 많을 때는 600여호까지 치달았다. 농장은 후일 ‘복풍도전회사(福丰稻田公司)’로 개칭되였다. 리춘만 등 조공당원들은 이런 고장에 뿌리박고 활동을 벌리고 있었다.

리인근과 김지강은 먼저 활동을 개시한 채평, 리춘만 등 조선족혁명가들과 함께 대소동-고소동과 오동하 일대에서 원래의 복흥툰 라흥학교(萝兴学校)를 계속 잘 운영하는 한편 오동하 하서(河西)에 송동모범학교(松东模范学校)를 더 꾸리고 학생 모집 범위를 하강(下江) 전체의 조선학생들로 넓히였다.

리인근 등은 교원신분을 내세워 낮에는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밤에는 농민강습소와 농민야학교를 꾸리면서 반일사상을 선전했다. 학생들 가운데서는 소년탐험대를 조직하고 농민동맹, 부녀동맹, 반제동맹, 청년회 등 혁명군중단체들도 조직하였다. 1928년 이해 가을, 송동모범학교에서는 규모가 엄청 큰 농민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강연회 내용은 남녘땅 광주봉기와 로씨야 10월혁명 기념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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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말에 배치운(裴治云), 김성강(金成刚)이 당지에서는 첫패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1929년초에는 김정국(金正国), 마덕산(马德山), 서광해(徐广海), 장흥덕(张兴德) 등이 또 입당하면서 하강(下江)에서의 첫 중공당지부가 조직되였다. 이어 압단하(鸭蛋河), 칠마가(七马架) 등지에도 당지부와 당소조가 륙속 무어졌다. 1929년 11월에 이르러 중공만주성위의 문건 규정에 좇아 리춘만(李春满) 등 5명 조선공산당 당원을 중공당원으로 넘기니 당조직의 활동은 보다 활기를 띄였다. 이에 앞서 리인근은 김지강 등과 토의하고 의란현 팔호령(《연수현조선족100년사》, 민족출판사, 2005년 1월 출판, 제56페지)에 집을 잡고 활동하고 있었다.

1929년 11월에는 김지강, 리인근, 채평, 리춘만 등의 노력으로 탕원현 학립북 7호툰(鹤立北7号屯, 오늘의 新华车站)에서 리춘만(李春满)을 서기로 하고 배치운(裴治云), 김성강(金成刚), 채평 등을 위원으로 하는 중공탕원현위(후에 중심현위로 됨)가 조직되였다. 현위 구성원 모두가 조선족들이였다.

1930년 봄에 외지에서 활동하던 중공당원들인 리인근이 돌아오고 최계복(崔圭复)도 돌아오니 탕원현의 당지도력량은 한결 생기를 띠였다. 이에 힘입어 그해 6월에 리인근은 김지강 등과 더불어 송동모범학교에 2개월을 한기로 하는 군정간부훈련반을 2기 꾸리였다. 김지강이 송동모범학교 실제책임자와 군사지도로 나서고 리인근과 리춘만 등이 문화과와 정치과를 맡아 강의하였다. 삼촌을 따라 탕원현으로 간 리영근은 음악교원으로 나서면서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베여버리고 맑스머리라고 불리우는 단발머리를 하였다. 비단옷을 벗어버리고 중국식 검은 두루마기까지 입으니 더는 안일한 규중아씨가 아니였다.

리인근과 김지강은 그의 동지들과 함께 송동모범학교를 기지로 련속 2기에 걸쳐 매기 2개월을 기한으로 하는 군정간부학교를 꾸리면서 170여명(어떤 자료는 140여명이라고도 한다.)의 혁명간부를 양성하였다. 양성을 받은 동지들은 통하(通河), 라북의 압단하(鸭蛋河), 탕원현의 격절하(格节河), 부금현(富锦县)의 안방하(安帮河)와 하다밀하(哈达密河) 등지에 파견되여 혁명의 불씨를 지피였다. 그 후 10여년에 달하는 피어린 항일투쟁과 항일무장투쟁에서 송동모범학교 사생들과 군중단체 골간들 가운데서 리인근(李仁根)외에도 서광해(徐光海), 마덕산(马德山), 오옥광(吴玉光), 장흥덕(张兴德), 배성춘(裴成春), 배치운(裴致云), 김성강(金成刚), 최청수(崔清洙) 등 쟁쟁한 북만 항일인물 40여명이 선후하여 장렬히 희생되였으니 송동모범학교는 그야말로 조선족 항일지사들을 키우는 혁명의 요람이였다.

최석천 작사, 리영근 작곡의 모범학교 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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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모범학교란 이 혁명의 요람은 송동모범학교 창시자 최석천의 마음을 잔뜩 부풀게 하였다. 최석천은 이 부푸는 마음을 한수의 노래가사에 담아 <모범학교 교가>를 지어냈으니 리인근의 영향하에 혁명의 장동에 오른 조카 리영근에 의해 작곡되여 송동모범학교 사생들과 혁명동지들, 아동단원들에 의해 널리 불리여졌다. <모범학교 교가>는 아래와 같다.


모범학교 교가

최석천 사


모범학교 소년들아 배움에 힘쓰자

우리우리 모범소년 되여 나날이 향상하자

너도나도 모두다 모범소년 되자

너도나도 모두다 레닌의 소년 되자


모범학교 소년들아 레닌주의 배우자

레닌의 소년 되자 레닌의 사상 배우자

너도나도 모두다 레닌의 사상 배우자

너도나도 모두다 레닌의 사상 배우자


과도시기 길지 않다 공산주의 멀지 않다

다가오는 새 사회 인간락원이려니

건설하자 건설하자 우리 힘으로

건설하자 건설하자 우리 힘으로


<모범학교 교가>는 살길을 찾아 북만 멀리 탕원현에 이른 조선이주민들을 혁명에로 부르는 힘찬 전투의 노래였다. 그때 그 시절을 두고 당지 출신인 그 시절 아동단원 리민은 자기는 매일 기쁘게 학교로 나갔고, 저들 또래 아동단원들은 회의나 활동 때면 늘 <레닌 탄생가>와 더불어 최석천의 작사로 된 <모범학교 교가>를 불렀다고 회고하여 깊은 인상을 남겨준다.

1930년 10월, 리인근과 김지강의 지도하에 현위에서는 농민들을 조직하여 복풍도전회사를 상대로 감조감식투쟁을 전개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감조감식 투쟁을 농민폭동이라고도 하는데 이 폭동은 그 시절 ‘좌’경지도자들이 통치하던 당중앙과 성위행동위원회로 개칭된 만주성위의 지시에 의해 일어난 투쟁이였다. 곧 도래할 전국적 폭동승리를 맞이하는 지방투쟁이라지만 감조감식 투쟁을 통하면서 하강지구에서의 당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갔다. 이해말에 이르러 기층당지부가 16개로 늘어나 탕원현의 혁명활동은 현위를 중심으로 통일적인 지도핵심을 이루게 되였다.

이듬해 1931년 봄에 현유의 중공탕원현위는 중공탕원중심현위로 발전하고 리춘만이 계속 중심현위 서기를 맡아 나섰다. 중심현위는 압단하, 오동하, 대소고동(大小古洞), 흑금하(黑金河), 격절하, 고성강(古城岗), 반절하 등 당구위를 이끌게 되였다.

역시 1931년 봄 리인근과 김지강은 중공탕원현위와의 련계 속에 요하, 보청 등지에 가 당조직을 발전시키는 일에 나서게 되였다. 이해 가을 전례 없는 송화강 대홍수가 오동하 복흥촌을 밀어갔으나 혁명의 불씨는 주춤하지 않았다. 당조직과 혁명자들은 안방하(安邦河)로 전이하여 혁명활동을 이어갔다.

리인근, 김지강과 동지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31년 9.18사변 후 중공탕원현위가 지도하는 산하 구위는 압단하(鸭蛋河), 오동하(梧桐河), 대소고동(大小古洞), 흑금하(黑金河), 격절하(格节河), 고성강(古城岗), 반절하(半截河) 등 7개 구위와 가목사(佳木斯), 삼성(三姓) 2개 특별지부로 늘어났다. 소속 7개 구위는 탕원, 라북(萝北), 부금(富锦) 등 현들에 널리였다. 이해 12월에 재건된 중공만주성위에서는 탕원 등 4개 현위를 중심현위로 뜨게 하였다. 1932년 음력설기간에 탕원중심현위에서 42명 골간으로 화장양걸선전대(化妆秧歌宣传队)를 조직하여 하강지구를 도니 군중들의 반일열성은 전례없이 높아지면서 반일동맹회 회원수가 1000여명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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