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을 엄호하다 희생된 왕광

2019-11-04 08:46:35

“청산에는 렬사의 유골이 묻혀있고 시내물은 졸졸 흐르며 영령을 노래한다”. 산서성 안택현 두촌향 동당촌에는 매번 겨울방학, 여름방학이거나 청명절이 되면 수많은 중소학생과 각계 인사들이 왕광렬사릉원에 찾아와 선렬을 기리고 력사를 되새기며 사명을 명기하군 한다.

왕광 렬사

왕광은 1920년 산서 운성의 한 빈곤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지주집에 팔려가 시녀로 된 그녀는 굴욕을 참지 못하고 호랑이굴에서 도망쳐나왔다. 후에 마음씨가 좋은 한 집에서 왕광을 양녀로 받아들이자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선후하여 운성녀자사범부속소학교와 운성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진보사상을 접수하였다.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폭발한 후 왕광은 항일구국운동에  적극 투신하고 전단지를 뿌리고 표어를 쓰며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하며 항일을 선전하고 항일유격대오의 전렬에 나서군 하였다. 왕광의 안전을 걱정한 양어머니는 집에 있으라고 권고하였지만 그녀는 “내가 하는 일이 대사이고 좋은 일이니 근심하지 말라.”며 내심하게 해석하였다. 후에 그녀는 집과 몇십리 떨어진 라촌에서 항일선전사업단에 참가하였다.

혁명사업중에서 단련과 학습을 거치고 전우인 마보진, 포안수 등 혁명청년들의 영향을 받은 왕광은 항일에 대한 신념이 더 확고해졌으며 1939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녀는 라촌, 책촌 일대의 부녀구국사업을 책임지고 부녀들이 용감하게 낡은 봉건가정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  항일에 참가하도록 고무하였으며 이 일대 부녀구국사업을 기세드높이 전개하였다. 왕광도 부녀들에게 ‘혁명의 큰언니’로 친절하게 불리웠다. 1941년 당조직은 그녀를 기씨현(오늘의 산서 안택현)에 파견하고 1구 구장, 구당위 서기 등 직을 맡겼다. 보다 간고하고 복잡한 사업환경에 직면하여 그녀는 생산을 적극 전개하도록 군중들을 발동하고 부녀들을 조직하여 실과 천을 짜며 군화를 만들어 팔로군의 전선을 지원하였다.

1943년 10월, 일본군은 악남근거지에서 잔혹한 ‘포위소탕’을 진행하며 근거지를 ‘무인구’로 만들겠다고 떠벌렸다. 적들의 한차례 대소탕에서 기씨현 1구 반‘소탕’ 총지휘인 왕광은 군중의 전이를 엄호하는 과정에서 적들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혹형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최후에 장렬하게 희생되였는데 당시 나이가 23살이였다.

70여년간 왕광의 영웅사적은 무수한 후대들을 감화시키고 격려하였으며 왕광이 희생된 향촌은 홍색혁명교양기지로 되였다. 선렬들의 정신을 한층 선양하고 계승하기 위해 2018년 4월 안택현은 왕광 렬사 이름으로 명명한 녀자민병반인 안택현 왕광녀자민병반을 설립하였는데 민병반 성원들의 평균년령은 25살로 일선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로 구성되였다. 설립 이후 이들은 왕광 렬사의 정신을 충분히 계승하고 발양하며 향촌관광 월간 의무진찰, 농민풍수절 당직, 렬사기념일 보장과 태악혁명정신 강연  등 활동에 적극 참가하면서 태악혁명정신 선전강사, 당의 혁신리론 전파자 역할을 주동적으로 감당하고 있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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