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원유격총대 참모장 리인근
탕원민중반일유격총대는 1935년 겨울에 700여명의 병력을 가진 항일무장력량으로, 그 후에는 다시 동북항일련군 제6군으로의 성장과정을 거치였다. 황포출신 리인근은 탕원민중반일유격대의 조직과 발전에서 마멸할 수 없는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2019-11-04 09:11:50

◀후일 중공탕원중심현위 서기 배치운.(1893-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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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에 한때 끊어졌던 중공만주성위와의 련계가 이어지고 탕원중심현위가 재조직되면서 배치운이 중심현위서기를 맡고 원 중심현위 서기 리춘만은 새로 개척되는 안방하(安邦河)구위서기로 파견되였다. 이해 5월에 탕원현이 일본침략자들에게 함락되자 탕원중심현위의 사업중심은 무장투쟁에로 전환하였다. 김지강이 요하일대에서 항일무장 건설에 전력할 때 리인근은 탕원과 그 일대에서 항일유격대 건설을 책임지고 나섰다.

1932년 오동하 량안에서는 조선사람들이 동원되여 쌀과 물건을 내면서 무기를 구입하는 활동이 활발히 벌어졌다. 몇달 동안의 노력을 거쳐 10여자루의 장총과 단총을 사들이였다. 이해 10월 10일, 중공탕원중심현위에서는 현안의 반절하(半截河)에서 원래의 송동모범학교 출신들을 토대로 홍군 33군 탕원반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첫패의 유격대원들은 40여명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로 무어지고 황포출신 리인근을 대장으로, 배치운을 정위로 내세웠다. 항일련군 제6군 관련 자료들은 리인근을 참모장이라고 밝히였다. 사실 리인근이 참모장으로 불린 것은 그 뒤의 일이다.

흑룡강당사자료 제1집(1985년 4월, 내부발행으로 출판)에 실린 <동북항일련군 제6군> 연구물에 따르면 탕원현반일유격대는 한개 중대에 3개 소대로 이루어졌다. 신생 유격대의 첫 과업은 당지 복풍도전회사에서 조직한 자위단의 무기를 탈취하여 자기를 무장하는 것이였다. 그런데 이 소식이 새여나가는 탓에 복풍도전회사에서는 ‘영호(荣好)’라는 토비무리를 수매하면서 “일본의 주구인 고려놈들이 중국사람들을 습격하려 하니 먼저 손을 써달라.”고 하였다. 결과 유격대는 행동도중에 우세한 이들 토비무리의 매복에 들어 10여자루의 총을 전부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 탕원중심현위에서 당대표를 새로 파견하며 반일유격대에 대한 지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개편부대들인 구강(九江)산림대와 손옥강(孙玉刚)산림대의 악랄한 책동으로 당대표와 여러 골간들이 피살되거나 부상당하면서 유격대는 재차의 파괴를 면치 못하였다.

1933년말에 중공탕원중심현위에서는 유격대를 다시 개편하면서 대홍빈(戴洪滨)을 대장으로, 리인근을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유격대는 산하에 청년대와 중년대 두개 대를 두었다. 청년대 대장은 배경천이고 중년대 대장은 고려왕이 맡았다. 전체 대원은 50여명인데 그중 녀대원이 7명이였다.

1934년 가을에 탕원민중반일유격대는 탕원민중반일유격총대로 다시 확대개편되였다. 대홍빈이 총대장으로, 하운계(夏云阶)가 정치위원으로, 리인근이 참모장으로 부임하였다. 이해 겨울에 일본침략자들은 위만군의 박격포련과 기관총련, 보병련과 탕원경찰대대 등 5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탕원항일유격근거지와 후방기지 대거토벌에 광분하였다. 탕원민중반일유격총대는 여러 갈래로 나뉘여 흉악한 적들과 맞서 싸우면서 대소 10여차의 전투 끝에 끝내 적들의 이해 동기토벌을 물리쳤다.

▶중공탕원중심현위 위원 김성강.(1899ㅡ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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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되는 투쟁의 시련 속에서 탕원민중반일유격총대는 작은 데로부터 큰 데로 발전하면서 1935년 가을에 이르러 3개 중대를 가진 총대로 발전하였다. 그해 겨울에는 700여명의 병력을 가진 항일무장력량으로, 그 후 동북인민혁명군 제6군으로, 다시 동북항일련군 제6군으로의 성장과정을 거치였다. 황포출신 리인근은 탕원민중반일유격대의 조직과 발전에서 마멸할 수 없는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이로부터 우리는 황포출신 리인근이 김지강, 즉 최석천과 더불어 북만 탕원과 그 일대 항일무장투쟁의 조직과 발전을 이끈 쌍벽이라는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지난세기 30년대 초반과 중반 연변의 당조직에서 벌어진 이른바 반 ‘민생단’ 투쟁은 북만에도 영향을 미치여 탕원반일유격총대에서도 얼토당토않은 ‘민생단 사건’이 한차례 발생하였으니 리인근이 이 사건의 주모자로 몰릴 줄을 누가 알았으랴.

사연은 탕원반일유격총대의 조선인 변절자 조동국과 관련된다고 력사자료들이 밝히고 있다. 조동국은 일본특무기관의 파견을 받고 다시 유격대에 잠복하여 암암리에 파괴활동을 진행하였다. 연변대학 김성호 교수의 관련 반 ‘민생단’ 연구저서에 따르면 조동국은 유격대내부에서 비관정서를 조장하고 민족관계를 도발하며 내부혼란을 일으켰다. 1935년 3월에 유격총대의 정치위원 하운걸(夏雲杰)과 만주성위에서 파견되여온 전학문(田學文)은 성위에서 알려준 동만 반 ‘민생단’ 투쟁의 ‘경험’을 상기하고 탕원유격대내부에 반드시 민생단의 조직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먼저 조동국을 체포하여 심문하면서 부대내의 이른바 민생단조직 상황을 공술받게 되였다. 그들은 조동국의 공술대로 유격총대 참모장 리인근(李仁根)과 기타 3명의 정치지도원을 포함한 17명의 조선사람을 민생단으로 몰아 체포, 고문하였다. 이들 이른바 민생단조직의 핵심인물 6명은 공산당 당령이 모두 5~6년 내지 9~10년인데, 지난해 겨울부터 조직적으로 반혁명활동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북만지역에는 원래부터 민생단이라는 조직이 없은 것은 두말할 것 없다. 이때 그들이 렬거한 소위 민생단의 활동죄목에서 “조선인을 사랑하고 중국인을 미워하는 것을 고의적으로 표시하고 어느 때나 경상적으로 매우 친근한 체 한데 모여서 “디루뚜루(的露毒露)” 조선말을 하며 좋은 음식이나 옷이 있으면 중국인에게 주지 않고 령도기관에 착오가 있을 때면 공개적으로 반항한다는 것이 특히 주목된다.

유격대내부에서 ‘민생단’으로 몰아 체포한 조선사람 17명중 리인근 등 4명의 간부는 총살하고 6명은 제3군으로 전근시켰으며 ‘무능한’ 3명은 본 부대에 그냥 남겨 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1명은 의용군에 파견하고 2명은 산에 남겨 두었는데, 진정한 특무 조동국은 도망쳐 버렸다. 그들은 이것으로 유격대내  ‘민생단’ 조직을 ‘소멸’하였다고 인정하였다. 조동국의 특무활동은 확실하지만 리인근 참모장 등을 터무니없이 민생단으로 몰아 숙청한 것은 억울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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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교수의 관련저서에 나오는 북만 탕원반일유격총대의 이른바 ‘민생단’ 사건 취급이다. 탕원반일유격총대의 이 사건은 항일로간부 리재덕 녀사의 회고와 탕원유격대 관련 여러 자료들에서도 그대로 증명되고있다. 이는 그 시절 동만이라고 불리운 연변에서 진행된 반 ‘민생단’ 투쟁의 악영향을 잘 알려주는 생생한 자료이다.

북만  ‘민생단’ 사건에서 피살된 탕원반일유격총대 참모장 리인근에 대한 구체적 자료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1932년 10월 10일에 학립강 남안의 7호툰에서 탕원의 첫 반일무장―중국로농홍군 제33군 탕원유격대가 조직되였을 때 유격대원은 40여명이였다. 이들중 4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조선사람들인데 리인근이 유격대 대장이였다. 유격대원들이 마을에 오면 항일녀성 김성강은 석광신, 손명옥 등 부녀회원들과 함께 밥을 지어주고 그들의 옷과 장갑, 신을 기워주었다. 식량을 이고 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유격대에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그중 항일녀성 김성강(金成刚)은 보통 인물이 아니였다. 그는 탕원의 열두투사로 불리우는 12명중의 한 인물로서 1899년 평안북도 개천군 내남면 답도리  출신이다. 헴이 들자 한 마을의 머슴군 리씨에게 시집을 가 딸 재덕이를 낳았다. 딸이 두살 나던 해에 시아버지는 지주네 산으로 땔나무하러 갔다가 주인에게 들통나 매를 맞고 한많은 세상을 하직하였다. 살길이 막연하였다.

일가식솔은 1920년 겨울에 낡은 이불 두채와 솥 하나를 이고 지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 (오늘의 단동시)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듬해 1921년에 남편은 독립단체에 가담하여 싸우다가 일제놈들에게 체포되였다. 그는 일본헌병대감옥에서 적들과 불요불굴하게 싸우다가 옥사하였다.

시어머니는 땅을 치며 락루하였다. 집에는 시어머니, 김성강 그리고 어린 딸― 이렇게 달랑 세 녀인이 남았다. 그때 김성강은 23살이였다. 남편의 희생은 순박하고 어질기 그지없던 김성강의 가슴속에 비애와 함께 복수의 씨앗을 묻어놓았다.

그후 김성강 일가는 다시 흑룡강성 탕원현 복흥툰의 하동조선인부락으로 이사하였다. 그때 최석천 등은 하동과 하서에 라흥소학교와 송동모범학교를 꾸리는 한편 밤에는 야학을 꾸리고 농민들을 가르쳤다. 김성강은 배치운 등과 함께 야학에서 글을 배우며 계급의식을 틔워갔다. 그의 계몽선생은 최석천, 리인근 등이였다. 1929년에 이르러 복흥툰에 부녀회 등 군중단체가 결성되자 김성강은 선참으로 부녀회원으로 되였고 좀 지나자 부녀회골간으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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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봄에 김성강은 최석천, 리인근 등의 교양을 받아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당조직에 가입한 후 낮이면 논밭에 나가 일하였고 밤이면 계몽사업을 벌리면서 30여명 조선인녀인들을 부녀회에 결성시키고 부녀회장으로 되였다.

1931년 9.18사변 후 학립강일대의 농민들은 공산당의 지도 밑에 항일투쟁을 줄기차게 벌리였다. 당조직에서 농민들을 조직하여 도시에 들어가 반일시위행진을 하게 되면 성강은 부녀회 회원들과 함께 시위의 선두에 나섰다. 그해 가을 김성강은 탕원현위의 지도 밑에 농민들과 녀인들을 불러일으켜 소작투쟁을 벌리였다. 1932년 봄 이후에는 중공탕원중심현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김성강은 바로 이 같은 항일녀성이였다. 그는 당지 부녀회 회원들과 함께 탕원유격대 후원사업을 깐지게 내밀었다. 탕원유격대 부름은 여러가지로 나타나지만 기본은 탕원유격대로 불리운다. 탕원유격대는 군중토대가 좋은 태평천일대에 근거지를 앉히고 흑금하 등지의 자위단을 쳐서 무장력량을 확대하고 군중을 발동하여 농민정권을 세우고 지주 한간들을 투쟁하였는데 그 기세가 자못 드높았다.

후에 탕원유격대는 200여명에 달하는 항일무장대오로 발전, 장대하여졌다. 따라서 유격대의 군복이 문제로 나섰다. 마침 대지주 하가네 집에서 탈취한 한대의 재봉침과 몇필의 흰천이 있어 이를 토대로 근거지군복공장을 세웠다. 관련 자료를 보면 처음에는 재봉침을 사용할 줄 몰라 한편으로 배워가며 나무껍질을 삶은 물로 흰천을 물들여 누런 군복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군복공장은 옷을 만드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전투에서 부상당한 상병들을 치료하는 림시후방병원이기도 했다. 배성춘, 허정숙, 리재덕 등이 이 군복공장 및 후방병원의 창시자이고 골간이였다. 그들은 드높은 혁명열정과 청춘의 열기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항상 락관적이였다. 자그마한 일에도 웃고 부상병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춤도 췄다.

그 시절의 항일녀투사 리재덕은 후일 회고록에서 그러다가 생각지도 않던 내부투쟁에 봉착하게 되였다면서 동만(연변)지구에서 일어난 반‘민생단’사건이 탕원유격대에도 파급되여 참모장 장인추(즉 리인근) 등 우수한 공산당원을 총살하는 엄중한 사태가 조성되였다고 아주 통분해하였다. 뜻밖의 사건으로 너무 일찍 희생된 리인근의 이야기는 후세에 전해진 것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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