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명장 팽사량

2019-11-06 14:28:36

음력설이 지난후 호남성에서는 흐리고 비오는 날씨가 계속되였다.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호남성 서북쪽에 자리잡은 석문현 신관진 안락지역 암문구의 ‘팽사량장군 순국처’기념비가 장엄하고도 숙연했다.

팽사량은 호가 추호이며 1904년 8월 5일 태여났으며 호남 류양 사람이다.  황포군관학교 제4기를 졸업하고 북벌전쟁에 참가했으며 패장, 련장, 영장, 부퇀장 등 직을 력임했다.

1932년 팽사량은 륙군대학 제11기에 진학하여 학습했고 1935년 12월 제83사 참모처 처장으로 승진했다. 얼마후 팽사량은 예비 제4사 참모장, 부사장 등 직을 맡았다.

1937년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폭발한후 팽사량은 부대를 거느리고 선후로 송호회전, 태원회전, 서주회전, 무한회전, 제1차 장사회전에 참가했다.

팽사량 렬사

1941년 팽사량은 제6전구 사령장관부 고급참모 겸 간부훈련단 교육처장을 맡았다. 1942년말 륙군 제73군의 림시편성 제5사 부사장직을 맡고 부대를 거느리고 제3차 장사회전에 참가했다.

1943년 팽사량은 림시편성 5사 사장으로 임명되였다. 11월 일본군은 중국군대를 견제하기 위하여 운남성 서부에서 상덕회전을 일으켜 중국군대의 사기를 타격했다. 림시편성 5사는 명령을 받고 석문을 고수하면서 일본군이 서쪽으로부터 상덕을 포위공격을 하는 것을 제지했다.

11월 8일 일본군 제3사단, 제13사단은 비행기와 대포의 엄호를 받으면서 석문을 향해 맹공격을 발동했고 림시편성 5사는 팽사량의 지휘하에 혈전을 벌렸다. 소속부대 장병들은 8일 낮과 밤을 고수했으며 사상자가 막심했다.

15일 날이 밝아 제73군 철수엄호임무를 완성한뒤 림시편성 5사는 명령에 따라 석문으로부터 철퇴하던 도중 암문구에서 일본군의 저격을 받았으며 팽사량은 부대를 지휘하여 필사적으로 반격했다. 부대를 조직하여 접수하를 건늘 때 팽사량은 불행하게도 적들의 기관총에 요해처를 맞고 중상을 입었다. 림종을 앞두고 그는 부하들에게 “대장부로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민족을 위해 효도를 다했으니 죽은들 무슨 한이 있으랴!”라고 높이 웨쳤다. 희생될 때 그의 나이는 겨우 39세밖에 안되였다.

팽사량은 희생된후 륙군 중장으로 진급추서되였다. 1985년 민정부는 팽사량을 혁명렬사로 추인했다. 그는 첫패로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과 호남혁명렬사기념탑에 입주한 국민당군 항일장령이다. 남악 충렬사에는 팽사량렬사의 기념비, 유서와 묘지가 있다.

2015년 12월, 호남성 석문정부는 팽사량렬사를 기념하고저 석문현 암문구에 팽사량장군을 위해 ‘팽사량장군 순국처’로 명명한 기념비를 수건했다.

석문현 문사학자 장우량은 팽사량장군은 항일전쟁에서 친히 전선에 나아가 일본군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전장에서 전사한 유명한 항일장령으로서 림시편성 5사를 거느리고 생명으로 강산을 지켜냈고 혈육으로 장성을 구축했다면서 그들은 나라의 신성한 령토를 지켜냈고 전국 군민의 항전신심을 북돋아주었으며 중화민족의 자손후대를 위해 빛나는 본보기를 수립했다고 말했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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