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심으로 한간을 제거한 항일영웅 마효운

2019-11-09 10:16:32

산동성 치박시혁명렬사릉원에는 푸르른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우거진 가운데 로중지역의 유명한 항일영웅 마효운의 묘비가 거연히 솟아있다. 묘비의 사진을 보면서 해설원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애국주의와 혁명 전통 교양을 받으러 이곳에 온 참관자들은 마치 전쟁의 불꽃이 튕기는 년대로 또다시 돌아간듯했으며 이 백절불굴의 항일영웅을 더없이 존경하게 된다.

마효운의 원명은 마방고이며 1906년 9월 4일 산동성 장산현 북왕장(오늘의 치박시경제개발구 북교진 북왕촌)에서 태여났다. 1924년 동북군에 가입했다.

마효운 렬사

1931년 9.18사변 후 마효운은 고향에 돌아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동북인민의 항일을 성원했으며 동시에 총기를 모아 련장회를 조직했다. 1937년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고향에서 항일대오를 발동, 조직했다. 같은 해말, 형님 마요남, 동생 마천민과 함께 흑철산봉기에 참가함과 아울러 모은 3자루의 권총과 몇백원의 은화를 전부 봉기부대에 바쳤다. 1938년 4월 마효운이 거느린 부대는 산동인민항일구국군 제5군 제7지대로 편성되였고 마효운이 지대장을 맡았다. 7월 팔로군 산동인민항일유격대 제3지대 제7퇀 퇀장으로 임명되였다.

1939년 여름, 마효운은 명령에 따라 부대를 거느리고 적의 후방으로 들어가 적들과 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전사들을 거느리고 적들의 거점을 짓부시고 일본군의 화약고를 폭파시키며 철도를 파괴해 일본군의 군용렬차를 탈선시키는 등 행동을 실시하여 항일근거지에 대한 적들의 ‘소탕’을 견제했다. 7월 22일, 그의 형님이며 팔로군 산동인민항일유격대 제3지대 사령원인 마요남의 희생은 가족의 원쑤를 갚고 나라의 한을 풀려는 결심을 일층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마효운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0년초, 마효운은 연안항일군정대학에 파견되여 학습했으며 1942년 초여름 산동에 돌아와 청서군분구 부사령원직을 맡았다. 이 기간 일본군은 ‘치안강화운동’을 미친 듯이 추진하면서 항일근거지에 대한 반복적인 ‘철통포위’를 진행하고 야만적인 ‘삼광’ 정책을 실시했다. 마효운은 부대를 거느리고 일본군과 첨예한 투쟁을 벌렸으며 이들은 변절자를 사형에 처하고 한간을 사살했으며 간첩을 소멸하여 적들의 기염을 호되게 타격하고 청서항일투쟁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했으며 청서항일근거지가 더욱 공고해지도록 했다. 그 후 상급은 투쟁형세의 수요에 따라 청서전원공서의 설립을 비준하여 마효운이 전원으로 임명되였다.

1944년 1월 중공산동분국, 산동군구의 지시에 따라 청서군분구를 발해군구 제6군분구로 개명하여 마효운이 부사령원 직무를 맡았다. 적들을 더욱 힘있게 타격하기 위하여 부대는 두갈래로 나뉘여 행동했다. 사령원 허운헌이 일부 부대를 거느리고 소청하 이남에서 싸웠고 정위 리만촌과 마효운은 일부 부대를 거느리고 청성현 왕가장의 거점을 제거하기로 했다. 8월 10일 마가장 거점을 공격할 때 마효운은 불행히 희생되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마요남, 마효운, 마천민 일가 3형제는 모두 항일을 위해 희생되였다. 서향전은 ‘마요남, 마효운, 마천민 렬사는 영생불명하리’라는 친필제사를 썼다.

마효운의 후대인 마가는 “마씨 일가 3명 영웅렬사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정보다 나라를 먼저 위하는 애국주의정신과 홍색혁명정신은 줄곧 우리를 격려하고 있으며 우리도 이런 정신을 영원히 계승해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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