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우구 출신 항일련군 7군 녀전사 최용희

2019-11-25 08:43:00

흑룡강성 요하현성에서 서북으로 19킬로메터 되는 곳에 위치한 대정자산(大顶子山). 대정자산은 최용희 소속 항일련군 제7군의 대본영이자 주요활동지로 알려지고 있다.(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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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무장투쟁의 피어린 나날 북만땅 요하(饶河)를 중심으로 호림(虎林), 보청(宝清), 부금(富锦), 동강(同江), 무원(抚远) 등지에서 활동한 항일련군 제7군은 당지 조선족을 주체로 이루어진 항일련군부대로서 조선족녀전사들도 적지 않았다. 조선족녀전사들 거개가 북만 당지 출신들인데 그중에는 희한하게도 동만(연변)의 연길현 왕우구 출신의 최용희(1898ㅡ1939)도 있어 주의를 끌고 있다. 연길현 왕우구 출신의 최용희가 어찌하여 동만도 아니고 북만의 조선족주체로 조직된 항일련군 제7군에서 활동하게 되였을가? 이를 알자면 최용희의 발자취를 추적하지 않으면 안된다.

최용희는 1898년생으로서 출생지가 그제날 동만이라 불리운 연변이 아니라 함경북도 경성군의 한 농민가정으로 알려진다. 그 세월은 학교교육이 아닌 서당교육이 한창일 때여서 최용희는 소학공부를 할 나이에 4년간 구식서당에 다니며 글을 익히였다. 펴이지 않는 살림 때문에 용희는 구식서당을 나온 후에는 부모를 도와 농사일에 나서야 했다.

그 시절은 10대 중반이면 너나없이 의례 결혼해야 할 나이라 최용희도 부모님의 주선으로 10대 후반의 한창 나이에 이웃마을의 가난한 집 총각 림용흡과 례를 올리니 결혼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다가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넘어서게 되였는데 관련 자료에 보이는 최용희는 남편을 따라 중국 길림성 연길현 왕우구마을로 이사한다.

내부자료로 된 《룡정현지명지》를 보면 왕우구의 한 마을을 이룬 구룡평마을이 일어서기 시작한 것은 광서 초년이고, 룡암평, 상대흥촌, 명랑촌의 시작 역시 광서 초년으로 기록된다. 이 뿐이 아니라 태양촌, 춘흥촌, 련화촌, 고성촌, 합수, 류채촌, 명흥촌, 서흥촌, 남양툰 등 마을들도 마을의 건설 시작이 광서 초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게 시작된 왕우구의 개척은 20세기초에 이르러 1000여호의 인가를 가진 활약적인 지대로 번지였다.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이주한 최용희네도 그 1000여호중의 한 가족으로 새 삶을 차리게 되였다. 그 새 삶이 남의 땅을 맡아 부치는 소작농사라 하여도 좋았다. 생활은 쪼들려도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그때 그 시절 왕우구, 즉 의란구의 남동과 북동에만도 수백호나 살고 있었다. 그들은 거개가 조선이주민들과 그들의 후예로서 왕우구는 반일독립운동을 벌리는 데 든든한 후원기지로, 중요한 거점으로 떠올랐다. 1920년대초 이후 로씨야 10월혁명의 사상 전파와 더불어 조선공산당 활동이 활발히 벌어졌다.

연길시 의란진 고성촌 원 고성소학교 모습. 고성소학교 동쪽가가 당년 최용희 소속 연길현 왕우구 구쏘베트정부 자리이다.  (2019년 1월 12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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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흥중학교를 다니던 의란구 장재동 김철산(1905-1932)과 의란구 태평동 방상범은 학교를 졸업한 후 의란구(1898-1933)로 돌아와 사회주의 계몽운동에 뛰여들면서 자기들 고향마을을 중심으로 의란구일대를 혁명화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1929년에는 김철산을 서기로 하는 조선공산당 서상파 왕우구지부가 재조직되면서 조공당계렬의 청년단, 농민협회, 반제동맹, 부녀회 등 혁명단체가 결성되였다. 림용흡은 농민협회와 반제동맹에 가입하고 최용희는 여기 두 단체외에도 부녀회까지 참가하면서 혁명의 장도에 올랐다.

1930년 연변 5.30폭동 이후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은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의 원칙에 따라 개인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였다. 1930년 7월에는 김철산을 서기로 하는 중공왕우구지부(일명 의란구지부)가 조직되여 중공연길구위의 지도를 받았다. 잇달아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공청단, 농민협회, 반제동맹, 부녀회, 소선대, 아동단 등 혁명군중단체들이 륙속 조직되면서 최용희와 림용흡의 활동이 돋보였다. 그러나 이들 부부가 농민협회 등 군중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한것은 사실이지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는지는 모르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 부부가 1930년 5.30폭동에도 적극 참가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중공당원이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그 후의 의란구 반일대시위와 추수춘황투쟁에서의 표현이 이를 잘 알려주고 있다.

1931년 9.18사변과 일본침략군의 대거 동북출병은 온 중국 대륙을 분노에 떨게 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중공의란구위에서는 상급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수백명 군중들을 조직하여 성세호대한 반일대시위를 단행하였다. 최용희와 그의 남편은 그번 반일대시위의 주력군들이였다. 당황해난 국자가 연길령사분관에서 산하 경찰들을 총동원하여 그번 반일대시위를 무력진압하면서 재차 반일대시위가 터져올랐을 때에도 여전히 진압하였다.

1931년 그해 가을, 연변 각지에서는 당조직의 지도하에 천지를 진동하는 추수투쟁의 불길이 곳곳에서 타올랐다. 의란구도 례외가 아니였고 최용희 부부도 례외가 아니였다. 의란구의 왕우구와 남양동을 비롯한 여러 마을 혁명군중 2000여명은 소작료를 4.6제, 3.7제, 2.8제로 실시하자는 구호를 부르며 구룡평에 모여들었다. 이날 2000여명의 군중들은 구룡평에서부터 시작하여 멀리 위자구에 가 투쟁을 마무리를 지으면서 의란구 추수투쟁을 승리에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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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1932년 봄 온 연변이 춘황투쟁의 물결을 이루었다. 의란구일대의 군중들은 당조직의 지도하에 재차 일떠나 식량을 꾼다는 조건부를 내걸며 춘황투쟁, 즉 기민투쟁을 기세 드높이 벌리였다. 의란구의 새 부락, 토성촌, 왕우구 중촌, 상촌, 청학동, 신흥동, 륙년지골, 봉서동, 류채골, 매가골 등지의 400여명 군중들은 류채촌 지주 원룡보의 집에 모여 성세를 이루고 구룡평 지주 황일보의 집에 가서도 성세를 이루었으니 그번 투쟁은  그 전해 추수투쟁의 계속으로서 련속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932년 4월부터 일본침략자들이 연변 각지에 대한 제1차 ‘대토벌’을 감행하면서 연길현 왕우구일대에도 련속 ‘토벌’대를 풀어놓을 때 중공왕우구구위에서는 1932년초 이후 우수한 당원과 공청단원들로 지방돌격대와 적위대, 유격대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이해 봄에 이르러 남양동에는 무기탈취대 한개 중대가 조직되고 구산과 토기막골에도 각기 한개 중대씩 나왔다. 이해 여름에 이르러서는 지방의 돌격대와 적위대, 유격대를 토대로 왕우구유격중대를 정식으로 조직하였다. 왕우구유격중대는 조직된 후 일제놈들의 군용 트럭을 기습하고 주동적으로 적들을 기습하면서 자기의 대오를 확대하여갔다.

적들과의 직접적인 전투도 수시로 가지였다. 그중 일정한 규모를 가진 전투들로는 1932년 6월 의란구 적병영 습격, 그해 7월의 소백초구 일위군 ‘토벌’대 습격, 그해 8월 반일부대와의 팔도구 습격전, 그해 9월의 춘흥가 일본군 군용 트럭 습격과  반일부대와의 구룡평 련합공격 등이였다. 최용희와 그의 남편은 농민협회, 반제동맹, 호제회의 회원들과 함께 항일유격대에 량식을 운반하고 일제 ‘토벌대’의 군사정보를 탐지하여 전해주었다.

최용희와 그의 남편 림용흡의 맹렬한 활동은 당지 구룡평 일제 경찰들의 주의를 자아내면서 적들이 검거대상에 올랐다. 당지에서 더는 배겨낼  수가 없었다. 1933년초에  그들은 조직의 지시에 따라 외지 피난길에 올랐다가 ‘친척이 있는 흑룡강성 요하현 대엽자구로 피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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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0월, 중공요하중심현위에서는 최석천(崔石泉), 김문형(金文亨), 김동천(金东天), 최룡석(崔龙锡), 허성재(许成在), 박영근(朴英根) 등 조선족 6명 중공당원으로 항일무장세력인 특무대를 조직하였다. 이 특무대는 요하현의 삼의툰(三义屯), 단산자(团三子), 대대하(大岱河), 소가하(小佳河), 삼인반(三人班), 대별라캉(大别拉坑) 등지에 거주하면서 5개월간의 간고한 투쟁의 시련을 거치였다. 1933년 4월 21일, 이 특무대는 요하현 대엽자구(大叶子沟)에서 요하농공의용군(饶河农工义勇军)으로 확대, 개편되였다.

신생한 요하농공의용군은 최석천과 김문형이 각기  대장과 정치부 주임을 맡고 산하에 3개 소대를 두었다. 대엽자구는 최용희 부부가 피신하여 림시 살고 있는 북만의 한 마을인 데서 최용희와 림용흡도 요하농공의용군의 첫패의 의젓한 대원으로 되였다. 이들이 의용군의 3개 소대에서 각기 어느 소대에 귀속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지만 의용군 부대를 따라 요하, 보청 일대에서 일제와의 피어린 유격전에 나섬은 틀림이 없다. 요하농공의용군에서의 최용희 관련 구체적인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그해 1933년 6월 하순, 요하농공의용군은 동북국민구국군 제1려 특무영으로 개편되였다. 특무영 산하에 3개련과 하나의 권총소대를 두었다. 이듬해 1934년 2월 3일, 요하농공의용군은 요하민중반일유격대대로 개편되고 1935년 9월 18일에는 요하현 사합정자(四合顶子)에서 다시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4퇀으로 개편되였다. 4퇀이 퇀장 리학복(李学福), 부퇀장박진우(朴振宇), 참모장 최석천 모두가 조선족이였다. 병력수는 250여명으로서 조선족과 한족의 비례는 거의 같았다. 최용희와 림용흡은 여기 250여명 속의 두 전사였다.

1936년 3월 25일, 최용희 소속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4퇀은 관문취자(关门嘴子)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2사로 발전, 장대해졌다. 그해 11월 15일에는 석두와자(石头窝子)에서 제4군 제2사가 동북항일련군 제7군으로 개편되면서 산하에 제1사와 제2사를 두었다. 1937년 3월, 제7군 군장 진영구(陈荣久)가 천진반(天津班)전투에서 희생된 후 최석천이 대리군장으로 부임하고 2사 사장 리학복이 제1사와 제2사를 합병하여 편성된 1사 사장으로 부임하였다. 최용희는 소속부대가 항일련군 제7군으로 개편된 후 남편과 함께 군부 후방부 간부로 활동하면서 부대의 발전과 장대에 나름의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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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0월 10일,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이 탄생하였다. 제2로군은 항일련군 제4군과 5군, 7군, 8군, 10군으로 구성되였는데 최용희 소속 제7군이 중공길동성위의 지시에 따라 제2로군에 편입된 것은 1938년 8월의 일이였다. 그 시절은 일본관동군이 북만에서 활동하는 우리 항일련군 부대들에 대해 련속되는 대토벌을 감행하면서 항일련군 부대와 인민군중과의 관계를 악랄하게 차단하는 데서 항일련군의 식량, 소금, 천 등 물자 원천은 엄중한 위기에 빠지였다.

더우기 식량문제는 부대의 생존과 관계되는 큰 문제였다.  7군 부대에서는 1939년 봄부터 유격전을 견지하며 적들을 타격하는 한편 갖은 방법을 다하여 식량문제를 풀어나가야 하였다. 군부의 후방간부로 활동하는 최용희와 그의 남편의 책임은 보다 커지였다. 한편 그들은 일제 ‘토벌대’의 군사정보를 수시로 정탐하면서 수시로 부대와 련락하는 과업을 짊어졌다.

군사정보 정탐도 1939년 봄의 일이였다. 그러던 이해 봄의 어느 날 최용희는 7군 군부의 지시로 요하현 경내에서 적들의 군사정보를 수집하다가 그만 적들에게 붙잡히게 되였다. 적들은 최용희를 현내의 소가하로 압송한 후  7군 부대의 움직임과 림시밀영, 련락점들을 알려고 모진 고문과 더불어 회유를 들이대면서 미쳐날뛰였다. 그러나 닫혀진 최용희의 입은 열리지 않았으며 죽을지언정 굴하려 하지 않았다.

최용희는 악에 받친 적들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였다. 《중국조선족혁명렬사략전》 2의 최용희 략전에 따르면 최용희가 희생된 후 그의 ‘전우들은 비분의 심정으로 최용희의 유체를 요하현 소가하에 안장’하였다. 해방 후 1960년 8월 23일에는 최용희의 장녀 림영애에게 민정부문의 렬사증이 발급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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