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64
동녕 로흑산 특별지부서기 리경천

2019-12-01 13:21:54

리경천 렬사 사진.(리근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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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근 30년 전 1991년 7월, 민족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조선민족발자취총서 4ㅡ《결전》에는 제4부분 <소부대활동과 항일련군의 개선>에 <피로 물든 로흑산>이란 리종수 서명글이 오른 바가 있다. 이 글은 지난 세기 30년대 초반부터 40년대 초반까지 근 10년 사이 흑룡강성 동녕현 로흑산과 그 일대 피어린 항일활동을 펼쳐 보이면서 상당한 편폭으로 중공로흑산특별지부 서기 리경천(李擎天,1896ㅡ1941)렬사를 다루어 깊은 인상을 주고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조선족학계와 관련 부문에서는 이에 마땅한 중시를 돌리지 못하여 리경천은 <피로 물든 로흑산> 글외 더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년간에 이르러 흑룡강성 동녕현과 지금껏 리경천의 출생지로 알려진 연변의 훈춘시 대황구항일유격근거지 당사전람관 등에서 리경천렬사 생평이 보다 알려져 위안을 줄 뿐이다. 하지만 리경천렬사의 고향은 훈춘현 대황구가 아니였다. 지난 9월 15일과 9월 22일 오후 연길시에서 리경천렬사의 친손자와 친손녀를 방문하면서 가족내막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리경천 렬사 손자의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올해 8월 13일, 위해시 석도구내 동저도(东楮岛)에 가족유람을 갔을 때였다. 느닷없이 멀리 연변의 한 지인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는데, 훈춘적 항일렬사 리경천을 아는가고 묻는다. 동녕현 로흑산 출신의 리경천렬사가 아닌가고 대답을 올리니 옳다고 기뻐하면서 지금 렬사의 손자되는 분과 자리를 같이하고 있단다. 리경천 렬사 유가족 소식은 이렇게 알게 되고 9월의 연변행에서 만남의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그날은 9월 15일 저녁. 연길시의 한 음식점에서 지인 리영씨와 리경천 렬사 손자 리근강씨를 만났다. 리근강씨(李根刚,1961년 생)는 당시 연길시 인대 부주임으로 사업하고 있었다. 리근강씨한테서 할아버지 리경천 렬사 관련 이야기와 가족관계를 들으면서 렬사증 복사본과 관련 자료 복사본을 넘겨 받았다. 9월 22일 오후에는 리근강씨의 안내로 연길시에 계시는 리근강씨 친누님 리은화씨를 찾아 뵈였다. 리은화씨는 1944년 생이고 남동생 리근강씨보다 17세 이상이여서 할아버지 리경천 렬사와 가족관계에 대해 아는 것이 비교적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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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경천 렬사의 큰 손녀 리은화씨를 취재한데 따르면 할아버지 리경천은 당년 훈춘현 대황구 태생이 아니라 함경남도 단천군 운송리 태생으로, 전주 리씨 익조패로 알려진다. 관련 자료를 뒤지면 1914년 그 시절 일본침략자들 철제아래 조선에서는 행정구역 페합시 원래의 두일면(斗日面)을 분리하여 단천군에 신설하면서 전두일면의 증산리 일부로 전문 운송리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리은화씨가 이야기하는 할아버지 고향 단천군 운송리는 실제 력사사실로서 틀리지 않는다.

할아버지 리경천은 1896년 생으로서 함경남도 단천군 운송리에서 태여나 잔뼈를 굳히다가 결혼하였고, 슬하에 선후 7남매를 두었다. 그중 자식 둘이 요절하면서 5남매가 남게 되였다. 이들 5남매를 보면 5남매중 맏이로 되는 큰딸은 지난 70년대에 동녕에서 사망하였다. 5남매의 둘째가 리은화씨와 리근강씨의 친아버지인 리명호이고, 셋째가 아들인데 남을 주었다면 넷째는 항일렬사였다. 넷째 동생의 아들 리국선은 리경천이 데려다 키우고 제수는 재가할 수밖에 없었다. 리경천의 다섯째 동생 리춘록은 료녕 본계에 살고있었다고 한다.

리경천 렬사 둘째 아들 리명호와 며느리 주옥순 부부.(리근강 제공)


리은화씨의 아버지 리명호는 1919년생 단천 출생이고, 어머니      주옥순도 1924년생 단천 출생으로서 두분은 5살 차이를 두고있다. 1930년 즈음 리경천은 사촌들인 리봉수(1901년 생)와 봉수의 안해 안순화(1909년 생) 그리고 여러 고향마을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이주를 강단한다. 그렇게 정든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서니 그 시절 훈춘현 동포대이다. 동포대는 오늘의 훈춘시 구역에서 동남으로 훈춘하를 사이두고 4ㅡ5킬로메터 떨어진 마천자향의 한개 촌이다.

훈춘현 동포대는 악패지주 한희삼의 관할구역으로서 리경천과 리봉수 등 사촌들은 한희삼의 소작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30년 5.30폭동이후 원래의 조선공산당 당원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면서 연변 각지에는 중국공산당 비밀 당지부가 우후죽순 조직되였다. 동포대에도 중공지부가 생겨나면서 리경천과 리봉수, 안순화 등은 모두 선후로 동포대지부 중공당원으로 혁명가의 생애를 시작한다. 리경천의 입당시간은 대체로 1930년 가을과 겨울 사이로 잡아 본다.

1931년 가을과 1932년 봄 연변 각지에서는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추수, 춘황투쟁이 맹렬히 일어났다. 리경천과 리봉수 등 그들 사촌들은 중공당원으로 농민협회와 부녀회, 반일회 회원으로 그 시절 추수춘황의 진두에서 싸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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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6월 이후 연변 각지에는 화룡현 개산툰구와 평강구를 중심으로 당이 지도하는 유격대조직들이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9.18사변후에는 모두 항일유격대 등으로 불리운다. 훈춘현에도 1932년 1월에 훈춘현의 첫 항일무장대오ㅡ별동대가 고고성을 터치였다. 1932년 9월에는 훈춘현 대황구와 연통라자 등지에서 활동하던 여러 항일무장들이 중공훈춘현위 군사부가 지도하는 령남유격대(岭南游击队, 즉 연구-烟区-유격대)와 령북 유격대로 개편되면서 대황구를 근거지로 하던 별동대는 령북유격대(岭北游击队,즉 황구-荒区-유격대)의 기본력량으로 눈부신 활동을 벌린다.

1932년 5월에 리경천의 사촌 리봉수 부부가 당조직의 파견으로 연통라자에 가서 연통라자항일유격근거지 창설에 나섰다. 리경천은 당조직의 파견으로 훈춘현성에서 북으로 90리 쯤 되는 심산벽곡ㅡ대황구에 가족동반으로 파견되여 1932년 1월에 조직된 훈춘현 별동대 대원으로, 그해 9월이후의 령북유격대 대원으로 활동함을 보인다. 뿐아니라 리경천의 안해는 부녀회원으로, 아들 리명호는 아동단원으로 뛰여 다닌다.

1932년 그 시절 후일 리명호의 안해로 된 주옥순은 겨우 우리 나이로 9살이였다. 그들 주씨일가도 조선 단천에서 살다가 리경천 등 전주 리씨네와 더불어 두만강을 건너 훈춘현 동포대에 들어섰고, 1932년 초이후 리경천 부부 등과 함께 대황구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섰다. 리경천 가족이 항일가족이라면 이들 주씨네 가족도 항일가족이였다.

1932년 가을이후 훈춘현 대황구항일유격근거지가 이루어지면서 이해 12월 21일에 대황구 쏘베트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였다. 이날 대황구 항일군민 수백명이 모여 구쏘베트정부를 세울 때 리경천과 그의 가족, 주신옥의 가족들도 수립대회의 구성원으로 나섰다. 잇따라 반군사조직인 근거지 적위대와 소선대 등 단체가 조직되고, 항일유격대의 후방기관으로 되는 병기공장과 재봉대실, 후방병원 등이 일어섰다.

리경천은 지방에서부터 사촌인 리봉수와 더불어 민간의사로 활약하다가 대황구근거지 유격대 후방병원 전문의사로 나섰다. 리경천이 어디에서 어떻게 의술을 배웠는지는 알려지는 자료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주옥순 가족의 항일활동 자료도 보이지 않아 밝히지 못함이 유감이다.

1933년 초에 일본침략자들은 중공동만특위 소재지인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를 중심으로 동만, 즉 연변의 여러 항일유격근거지들에 대해 제1차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훈춘현도 마찬가지였다. 1933년 초, 일제놈들은 대량의 병력을 풀어 훈춘현 연통라자와 대항구근거지에 덮쳐들었다. 리경천 소속 대황구 령북유격대는 령남유격대와의 긴밀한 배합하에 1월부터 5월까지 기간에 적들과 20여차의 전투를 벌려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안기면서 반 ‘토벌’투쟁에서 승리를 따냈다. 리경천은 반 ‘토벌’전에서 부상당한 대원들을 구급하고 치료하기에 최선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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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춘현 대황구항일유격근거지에 대한 일제놈들의 제1차 대토벌을 물리치면서 훈춘현 령북유격대와 령남유격대는 훈춘현항일유격총대로 개편되면서 산하에 180여명 병력을 가진 2개 대대를 두었다. 신생한 훈춘현항일유격총대는 중공훈춘현위와 현위군사부의 지도하에서 대황구와 연통라자 항일유격근거지, 왕청현 라자구, 동녕현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적후유격전을 활발히 벌리였다.

1933년 겨울부터 이듬해 초까지 일제놈들은 보병, 기병, 포병, 항공대 등 5,000~6,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동만(연변) 항일유격근거지들에 대한 제2차 대‘토벌’에 광분하였지만 역시 수치스런 실패를 면치 못하였다.  그럼에도 적들의 제1차와 제2차 대‘토벌’을 겪으면서 근거지들은 심한 유린을 받았다. 모든 근거지의 가옥들과 밭의 곡식이 재더미로 되였다. 한편으로 적들은 ‘집단부락’정책을 전면적으로 가속화하여 항일유격대와 인민군중과의 련계를 끊어버리면서 모든 공급선을 차단하려고 날뛰였다.

1934년 봄, 중공동만특위에서 가진 연길현 능지영회의 결의에 의해 연변 4개현의 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독립사로 개편되면서 훈춘현항일유격대는 제2군독립사 소속 제4퇀으로 부름을 달리하였다. 따라서 험악한 현실에 직면하여 중공동만특위에서는 원래의 근거지들을 주동적으로 포기하고 근거지 혁명군중들을 새지대에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왕청현 소왕청근거지의군중들은 비조직군중이 왕청방면으로 이동해가고 조직군중들은 십리평과 당수하자 그리고 다홍왜를 거쳐 현안의라자구일대로 이동하였다. 리경천 소속 훈춘4퇀과 현안의 대황구근거지의 혁명군중들은 깊은 산속에 자리한 금창(金仓,오늘의 왕청현 복흥진)과 화소포(火烧铺,왕청현 복흥진 경내)로 전이하였다. 그속에는 주옥순의 주씨 가족도 들어있었다.

훈춘현 연통라자항일유격근거지에서 활동하다가 1933년 겨울 마적달남골(南沟)유격구로 전이하였던 리경천의 사촌 리봉수 부부도 훈춘현 항일군민100여명과 함께 두황자(杜荒子)를 거쳐 잇따라 금창에 들어섰다. 리경천의 사촌동생인 리봉수는 연통라자항일유격근거지에서 유격대 후방병원의 전문의사로 활동하고 안해 안순화는 유격대 재봉대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봉수의 동생들인 리명수, 리덕수, 리만수 등도 모두 큰형 리봉수를 따라 선후로 피어린 항일전에 궐기하여 나섰다.

1988년에 락성된, 목단강시 강빈공원의 팔녀투강기념군상.(2017년 8월 1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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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움은 리경천의 손자손녀들인 리은화씨와 리근강씨가 말하는 그후 항일련군 시절의 팔녀투강(八女投江) 이야기다. 지난 9월 15일과 9월 22일의 연길 취재에서 리은화씨와 리근강씨는 어려서부터 부모님들께서 들은 이야기라면서 항일련군 부녀퇀의 팔녀투강중에 그들 친척이 있음을 터놓았다. 조선족력사연구가로 활동하면서도 처음 듣는 신선한 발견이다.

11월 23일 오후 연길시 리은화씨와 통화를 가지였다. 통화중 팔녀투강과 친척이야기가 나오니 흥분된 리은화씨는 30여년전 어머니 주옥순과 같이 목단강 해림의 녀동생 리선일(李善一,1947년 생, 남매에서 둘째)집으로 놀러 갔을 때 이야기를 처음으로 터놓았다. 목단강시 목단강반의 강빈공원(江滨公园)에 항일련군의 ‘팔녀투강’기념군상(1988년 락성)이 금방 세워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그리로 기어이 가보자고 하셨다. 그렇게 리은화씨와 리선일씨는 60대 중반의 어머니 주옥순을 모시고 팔녀투강기념군상을 찾았고, 어머니는 팔녀투강의 아무개는 항일가족인 우리 친척이라며 눈물을 훔치였다고 한다.

그후 리명호와 주옥순 부부의 셋째 딸 리선화(李善花,1951년 생)와 그의 남편도 팔녀투강 기념군상을 찾으며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리경천렬사의 둘째 아들 리명호와 주옥순 부부는 자식으로 큰딸 리은화(李银花, 1944년 생)와 둘째딸 리선일(李善一, 1947년 생), 셋째딸 리선화, 넷째딸 리선녀(李善女, 1954년 생), 아들 리철영(李根铁, 1956년 생),아들 리근강(李根刚, 1961년 생) 등 여섯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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