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녕 로흑산 특별지부 서기 리경천
리경천은 동녕현 로흑산에서 동만특위와 소속부대의 지시를 받고 로흑산주둔 위만군 정안군부대의 실태를 수집하면서 소속부대와 긴밀한 련락을 가지였다.

2019-12-09 09:26:55

동녕요새유적진렬관 구내에 세워진 리경천 렬사 조각상. (리근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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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녀는 중국혁명사에 빛나는 영웅집체이고 항일련군 제5군과 제4군의 녀전사로 무어진 항일련군 부녀퇀의 한갈래로 유명하다. 이들 팔녀는 1938년 10월에 오늘의 흑룡강성 목단강시 림구현 경내 우스훈하에서 일제놈들과 싸우다가 우스훈하에 뛰여들어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는데 이들 8명중 제4군 재봉대 대장 안순복과 제5군 소속 리봉선이 조선족으로 알려진다.

그럼 안순복과 리봉선중 누가 리경천의 친척일가. 1936년 2월경에 북만으로 전이한 녕안땅에서 훈춘4퇀과 왕청3퇀의 조선족 녀전사들로 항일련군 제5군 부녀퇀이 조직될 때 림구현 출신인 리봉선은 아직 부녀퇀 녀전사가 아니였으니 아닐 테고, 시선은 십중팔구 제4군 재봉대 대장인 안순복에게 집중된다. 리은화씨와 리근강씨는 취재에서 거듭 헤아려본 결과 안순복이 옳았다. 안순복은 흑룡강성 목릉현 신안툰 태생이라지만 알고 보면 리경천의 사촌동생 리봉수의 안해로 되는 안순화의 사촌녀동생으로 헤아려진다.

항일렬사 리경천과 훈춘 출신 그들 리씨 가족, 리경천과 리봉수 처가 가족은 보통 가족이 아니였다. 이제 팔녀 투강중 일원인 안순복의 진실한 발자취가 서서히 밝혀지지만 이들 가족은 항일련군의 튼튼한 후방기지ㅡ중공로흑산특별지부 서기 리경천과 항일련군 제2군 제5사 재봉대 대장 안순화(항일렬사), 항일련군 제4군 재봉대 대장 겸 팔녀 투강 일원 안순복(항일렬사)을 배출한 영웅가족으로 중국혁명사에, 조선족항일사에서 길이 빛나고 있다.

리경천 렬사의 손자 리근강이 어머니 주옥순을 모시고 동녕요새유적진렬관 리경천 렬사 사진을 배경으로. (리근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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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7월에 새 지대인 왕청현 화소포에서 훈춘현내 원래의 황구(荒区), 연구(烟区), 두황자(杜荒子) 3개 구위는 한개 구위로 축소, 합병되면서 구위 산하에 두황자, 금창, 화소포, 동남차 등 4개 기층당지부를 두었다. 1934년 겨울, 훈춘현 당단조직은 엄중한 파괴를 당했지만 현위와 리경천 소속 훈춘4퇀은 의연히 금창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금창시절  훈춘4퇀 후방병원은 리봉수와 리경천 사촌형제가 맡아보았다. 리봉수 안해 안순화는 훈춘4퇀 재봉대 대장으로 나섰다. 그러던 이해 1934년 겨울과 이듬해 1935년 봄 사이 훈춘4퇀은 금창과 화소포 일대를 떠나 주요 활동 지대를 왕청현 라자구로 옮기였다. 이에 앞선 1934년 겨울 당조직과 부대에서는 부대와 같이 움직일 수 없는 유격구의 부대 가족들을 동녕현 로흑산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중공동만특위와 훈춘현위에서는 이 무거운 과업을 리경천에게 맡기였다. 동녕 로흑산에 이른 뒤 리경천은 조직의 포치 대로 여러 부대 가족들을 로흑산지역의 만보만(万宝湾), 서로흑산(西老黑山), 태평천(太平川)과 요툰(腰屯, 오늘의 南村) 등지에 자리잡도록 하였다. 리경천은 가족과 함께 요툰에 정착하였다. 그런 리경천은 남들과 달리 특수과업을 지니였다. 그 특수과업이란 비밀리에 로흑산당지부와 손잡고 군중적인 반일활동을 벌리는 한편 우리 항일부대와 긴밀한 련계를 가지면서 튼튼한 부대 후원기지를 건설하는 것이였다.

이미 밝혀지다싶이 리경천 등이 동녕현 로흑산지역으로 전이한 것은 1934년 겨울이다. 리경천의 로흑산지역 혁명활동과 로흑산 당조직 내막을 알자면 30년대 초반으로 돌아가야 한다.

《동녕현지(东宁县志)》에서 밝혀진 ‘해방 전 당의 조직활동’에 따르면 동녕현을 망라한 중공북만지방위원회가 설립된 것은 1926년 2월이고, 동녕 지방당지부를 중공특별지부로 개편한 것은 1930년 8월과 9월 사이 일이다. 이해 10월에 그 시절 중공만주총행동위원회에서는 동녕특별지부를 만주성위 소속하의 중공북만특별위원회가 지도하는 동녕현위로 승급시키였다. 얼마 후 조선사람들을 주체로 조직된 동녕현위는 다시 동녕특별지부로 개편되였다. 1931년 9.18사변 후에는 중공녕안중심현위가 조직되면서 동녕특별지부는 녕안중심현위의 지도를 받게 되였다.

1932년 9월, 중공수녕중심현위(绥宁中心县委, 원 녕안중심현위)에서는 조선족 전봉래(全风来)를 동녕에 파견하여 동녕의 지방 당조직을 정돈하게 되면서 그해 10월 8일에 중공동녕특별지부를 중공동녕구위로 개편하기에 이른다. 동녕구위 산하에 단산자(团山子), 령후(岭后), 로흑산, 고안촌(高安村), 불야구(佛爷沟, 오늘의 승리), 한총하(寒葱河), 소수분(小绥芬, 오늘의 绥阳镇)  등 7개 당지부가 조직되였다.

리경천 렬사의 손자 리근강 부부 동녕요새유적진렬관에서. (리근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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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월 10일, 일본침략군이 동녕현성 삼차구(三岔口)를 점령한 후 구위에서는 한자청(韩子清)을 수녕중심현위에 파견하여 사업을 회보하게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서 한자청과 동행한 공청단 간부 김영주(金永柱)는 일본군과 맞띄워 불행히 피살되였다. 동녕구위는 고안촌에서 령후 북골(岭后北沟)로 전이한 뒤 그해 7월에 전철산(全哲山)을 대전자(大甸子)에 파견하여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여 삼도왜자(三道崴子), 흑영(黑营), 삼과화수(三棵桦树), 만보만, 이도구 등지에서 활동하도록 하였다. 1933년 10월에 중공수녕중심현위는 철소되고 동녕구위는 중공길동국(吉东局)의 지도를 받게  되였지만 그해말에 이르러 동녕구위 산하 대부분 기층당조직들은 일제놈들의 가혹한 탄압으로 파괴되고 만다. 그러나 중공로흑산지부는 계속 활동을 견지함을 보인다.

1935년 봄에 이르러 중공길동특위가 조직될 때 동녕현 경내에는 로흑산 한개 당지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해 9월에 동녕구위는 로흑산일대로 전이하면서 중공로흑산지부를 로흑산특별지부로 재조직하였다. 마침 그해 1935년 5월 단오 직전 연변의 조선족 아들딸들을 주체로 조직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3퇀과 제4퇀 주력부대가 북만진출을 앞두고 이름난 로흑산전투를 기획하고 있었다. 로흑산전투는 로흑산에서 활동하는 리경천과도 이어지고 있었으니 그 전후관계를 헤아려보기로 한다.

1934년 겨울 리경천과 부대 가족이 동녕현 로흑산으로 들어간 후 왕청현에는 사도하자참변이란 비참한 사건이 터지였다. 왕청 라자구에서 서남간으로 약 20리 되는 곳에 자리한 이곳 편벽한 산간마을에는 28세대의 조선족, 한족 인가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 거개가 왕청, 석현, 훈춘 등지에서 이주하여간 혁명군중들이였다. 사도하자 주변에는 왕청3퇀 부대밀영지와 밀영경계소까지 여러곳에 설치되여있었다.

그때 라자구시내에는 위만군 맹영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동녕현 로흑산(왕청현과 훈춘현 접경지대에 위치)에 주둔하고 있는 위만군의 ‘정안군’부대가 와서 정월대보름 준비를 서둘고 있었다. 정안군부대는 소대장급 이상이 전부가 일본놈들이고 1934년말에 로흑산에 밀려든 놈들이였다. 이자들 100여명은 사도하자에는 온통 유격구에서 온 공산당이 살고 있다는 주구 서일남의 밀고를 받고 1935년 음력 1월 15일, 즉 정월대보름날 이른아침 사도하자를 불의습격하여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약 150명 마을사람중 49명이 무참히 학살당하였다.

사도하자참변은 온 연변을 진동하였다. 중공동만특위와 왕청3퇀, 훈춘4퇀은 선후하여 라자구 주변의 태평구에 이른 후 사도하자참변의 무자비한 복수전을 결의하면서 로흑산전투와 태평구전투를 기획하고 나섰다. 이어 동만특위와 아군은 태평구에서 부대와 군중이 참가한 장중한 추도식을 가지고 사도하자참변의 희생자들을 추모하였다. 이때 리경천은 동녕현 로흑산에서 동만특위와 소속부대의 지시를 받고 로흑산주둔 위만군 정안군부대의 실태를 수집하면서 소속부대와 긴밀한 련락을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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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5월 단오 직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독립사 제3퇀과 제4퇀 그리고 시세영 등 항일구국군의 장병들 도합 300여명 대오는 왕청현 태평구를 떠나 로흑산으로의 진군길에 올랐다. 아군은 리경천 등의 긴밀한 배합하에 유인전술로 로흑산의 적들을 소굴에서 끌어내는 전술을 강구하면서 로흑산 만보만 근처의 산골짜기 수림 속에 은밀히 매복하였다.

드디여 100여명의 위만군 정안군 놈들ㅡ사도하자참변의 살인마들이 아군의 유인술에 빠지여 아군의 매복권내에 들어섰다. 일본군 지휘관놈이 불안스레 사방을 두리번거릴 때 지휘부의 신호총성이 울리고 약 2시간 만에 로흑산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이날 아군은 위만군 정안군부대 100여명중 대부분을 전멸시키고 21명을 포로하였다. 아군은 승리의 기세 높이 박격포 1문과 증기와 경기 각기 1정, 보총 70여자루, 모젤권총 10여자루, 군마 4~5필을 비롯한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유유히 왕청현 태평구로 개선하였다.

로흑산의 산골짜기ㅡ이 골짜기는 실로 아군에게는 승리의 전적지였고 적들에게는 멸망의 골짜기였다. 로흑산전투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수차 전투가운데서 가장 통쾌하고 가장 적을 많이 죽인 한차례 전투이고 사도하자참변을 두고 벌어진 한차례 통쾌한 복수전이였으니 이 복수전에서 리경천은 적들 관련 정보를  제공하면서 마멸할 수 없는 나름의 기여를 하였다.

이어 아군은 태평구에서 단오를 쇠며 북만원정준비를 다그치고 있을 때 라자구주둔 위만군 맹영부대가 갑자기 쳐들어왔다. 알고 보니 일본놈들은 혁명군이 로흑산전투에서 박격포, 중기 등을 빼앗았지만 사용할 줄 모를 것이라 오산하고 도로 빼앗아오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1935년 6월 20일, 아군은 이렇게 태평구 뒤산에 올랐고 아군의 박격포 두발이 적진을 들부셨다.  혼비백산한 맹영부대는 싸우기도 전에  황망히 도망치고 말았다.

로흑산, 태평구 전투는 리경천 소속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3퇀과 4퇀이 고정된 항일유격근거지를 떠나 광활한 지대로 진출한 후 처음으로 취득한 통쾌한 전투였다. 왕청퇀과 훈춘퇀은 라자구의 태평구에서 단오를 쇠며 정비를 끝낸 다음 6월 하순에 동만과 북만의 경계를 이루는 로야령을 넘으며 제2차 북만원정길에 올랐다. 아군은 드디여 깊고 가파른 로야령을 정복하고 7월에 잡아들어 녕안현 신동툰 부근에서 주보중이 이끄는 제5군 부대와 승리적으로 회사하였다. 지하교통원을 통해 로흑산에서 로흑산전투에 이은 태평구전투 승리 소식과 5군부대와의 회사소식을 입수한 리경천은 희열로 넘치였다. 자기 존재의 무게를 깊이깊이 깨달았다.


10

그 시절 중공로흑산지부 서기는 황근(黄根)이였다. 황근은 중공길동국의 파견을 받고 일본놈들이 설치한 ‘조선인민회’에 들어가서 문서노릇을 하였다. 그는 직무의 편리를 리용하여 우리 지하혁명자들에게 ‘국경지대 통행증’을 내여주기도 하고 일제놈들의 ‘토벌’계획을 지하당조직과 항일부대에 전하기도 하였다. 한데서 일본군과 위만군은 여러차례의 ‘토벌’에서 헛물을 켜고 말았다. 적들은 비밀이 샌 것을 알고 저들의 앞잡이들을 내세웠다. 마침내 변절자의 고발로 황근을 비롯한 항일청년 20명이 체포 투옥되였다.

황근은 헌병대에서 끔찍한 악형을 당하였다. 적들은 황근을 세멘트바닥에 꿇어앉히고 매질을 하다가 코에 고추물을 부어넣기도 하고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손톱눈을 쑤시기도 했다. 까무러치면 찬물을 끼얹었다. 황근은 그래도 굴하지 않고 싸우다가 1935년 가을에 옥중에서 희생되였다. 나머지 항일청년 19명중 15명도 학살의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1935년 9월 18일, 로흑산당지부 주요책임자인 김영일(金荣日)과 지하당원 김영렬(金英烈), 리경천 등은 중공동만특위의 지시에 따라 김영일네 집에서 ‘로흑산중고반일련합회’ (老黑山中、高(丽)反日联合会)를 결성하고 서로흑산, 태평구, 번루두(奔楼头), 동편저자(东片底子), 이도구 등지에서 회원을 받아들이였다. 그 후 당지부를 다시 조직하였다. 그때의 당지부 서기는 김영화(金英华)로서 지방 농민들 속에서 반일회원 20여명을 받아들이였다.

동녕현 일본헌병대는 1936년 봄부터 로흑산지역에서 련속 세차례 ‘대검거’를 감행하면서 앞잡이 최문오(崔文吾)를 앞세우고 항일군중 탄압에 피눈이 되였다. 이해 1936년 2월에 김영화는 변절자의 밀고로 동녕헌병대에 체포되였다. 지하당원 박필임(朴必任)의 집에서 새로 받아들인 20여명 반일회원 명단이 발각되여 그들도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김영화, 박필임은 동녕헌병대 감옥에서 굴함없이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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