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녕 로흑산 특별지부 서기 리경천
신분이 폭로된 리경천은 더는 산에서 내려올 수 없었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산속 항일련군과 산아래 비밀당원들과의 련락을 가지고저 련락지점을 로야묘(老爷庙)로 정하였다.

2019-12-16 09:00:16

동녕요새유적진렬관 구내 동북항일련군 영웅원과 리경천 조각상.

11

1936년 4월 5일 우수한 반일회원 김영일이 로흑산 만보만에서 동녕헌병대에 체포되였다. 반일회원 30여명도 역시 붙잡히였다. 적들은 6월 30일 반일회간부중 ‘죄를 승인하지 않고 마음을 돌리지 않으려는’(坚持作恶,不肯悔改) 김영일, 김응렬, 김영련(金永练), 주진택(朱镇泽), 김만일(金万日) 등 5명을 사형에 처한다고 선포하면서 사형장에 내세웠다.

훈춘현 출신 리경천에 앞선 로흑산 당조직과 반일회의 굴함없는 투쟁모습이다. 1936년 가을 중공로흑산특별지부가 다시 조직되면서 리경천이 특별지부 서기를 맡아 나섰다. 그때의  상급당조직은 그해 4월에 조직된 중공도남특위(道南特委)로서 산하 녕안, 왕청, 훈춘, 연길 현위와 동녕, 액목구위를 지도하고 있었다. 로흑산특별지부는 사실상 동녕현내 항일활동을 지도하는 동녕현위 역할을 하고 있었다.

중공도남특위에서는 지하활동의 편리로 리경천을 적들의 내부에 들여보내였다. 그때 일제놈들은 당지에서 체포한 부분 항일군중들을 삼차구헌병대에 압송하여 모진 심문을 들이댔다. 그중 13명이 죽을지언정 굴하려 하지 않자 적들은 이들을 수분하 하수마(下水磨)에 끌어다가 잔혹하게 살해하고는 이미 파놓은 얼음구멍에 밀어넣었다.

이같은 준엄한 현실에서 리경천은 동녕현 경찰서 로흑산분주소 조선인 경찰 김경위보를 얼려넘기고 로흑산지구에 ‘충성회’(忠誓会)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충성회 부회장으로 나선 리경천의 타산은 이른바 충성회라는 이 터전을 리용하여 적들을 속여 투옥된 우리 동지들을 구출하고 보호하려는 데 있었다. 충성회의 일이란 산에서 싸우고 있는 항일련군 부대에 ‘투항권고’를 하는것이였다. 그 시절은 동만(연변)과 북만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소속 왕청3퇀과 훈춘4퇀 그리고 5군부대는 1936년 봄에 항일련군 제2군과 항일련군 제5군으로 개편되여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리경천은 ‘충성회’ 명의로 약가방을 메고 의사로 가장하여 로흑산, 태평구, 만보만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하여 항일련군에 전하여 적들의 ‘토벌’계획을 여러번 파탄시키였다. 1937년 2월 25일에는 반일회원들과 더불어 대전자에서 로흑산으로 온 유격대장 전철산(全哲山)을 도와 위정안군(伪靖安军)과 서로흑산 경찰 도합 300여명을 삼십삼창골(三十三枪沟)에 유인하여 들여다가 달아난 30여명외 전부를 소멸하는 전과를 올리였다.

리경천 렬사의 손자손녀들, 동녕요새유적진렬관 찾아서.(오른쪽으로부터 장손 리근철, 장녀 리은화, 넷째 손녀 리선녀, 막내 손자 리근강.)

12

1940년 1월에 항일련군 제5군 정위 계청(季青)과 제1로군 제3방면군의 안길, 최현부대가 로흑산 근처의 편저자(片底子)에 와서 밀영을 세웠다. 이해 여름의 어느날 로흑산마을의 두 사람이 산에 가서 꿀을 채집하다가 항일련군 세 사람을 만났다. 항일련군은 마을사람 둘과 리경천을 묻고 이들 둘은 마을에 돌아와 그 일을 터뜨렸다. 이런 말이 당지 경찰에게까지 전해지니 경찰은 리경천의 집을 찾아 산속의 항일련군과 련락이 있는가고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리경천은 그런 일이 없다고 잘라 말했지만 경찰이 이미 자기를 의심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이해 1940년 10월에 5군 정위 계청이 소한총하골(小寒葱河沟)에서 중공도남특위(道南特委)를 회복하고 특위서기로 나섰다. 계청은 이도구 등지에 결성한 반일회를 통하여 식량과 기타 물자들을 공급받았지만 적들의 ‘집단부락’ 등 가혹한 조치로 계청 등의 활동은 갈수록 어렵게 되였다. 리경천은 적들이 산속에서 활동하는 항일련군들로 골머리를 앓는 이 심리를 리용하기로 하고 헌병대 로흑산분견대를 찾았다. 그는 자기가 산에 들어가서 항일련군의 투항을 받아오겠다고 장담하고 나섰다. 헌병대의 동의를 얻어낸 리경천은 이미 준비한 미시가루, 신발, 약용아편 등을 가지고 항일련군의 밀영지 편저자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달이 지났다. 리경천은 산에서 헌병대장 야마모도에게 지금 산속 사람들이 투항하려는데 신발이 없어서 산길을 걷기가 힘들어한다는 것,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데 약담배가 좀 있어야 하겠다는 것, 병이 나으면 산에서 내려 간다는 것, 큰고기를 낚자면 낚시줄을 길게 늘여야 하고 큼직한 미끼를 던져야 할 것 같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보내였다.

헌병대장은 흐뭇해났다. 승급의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약담배 700봉지에 신발 30컬레, 소금, 식량 등을 마련하여 인부 세 사람에게 지워 리경천을 찾아 산으로 보냈다. 리경천은 약속된 지점에서 물품을 받아가지고 밀영지로 갔다.

또 한달이 지났다. 리경천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두번째 편지를 보냈다.

“지금 투항하려는 자가 40~50명이나 된다. 한달 후이면 더 많은 자들이 투항귀순할 것이니 다시 신발을 보내주길 바란다. 대장나으리께서 인내성있게 기다려달라…”

이번에는 적들에게 세번째 편지가 전해졌다. 경찰대 특무계 경위보 리순태(李顺太)는 자기의 상급과 “리경천은 좋은 물건짝이 아닙니다.”라고 물고들었다. 뒤늦게야 헌병대장은 리경천한테 속히웠음을 깨닫고 꿀같은 환상에서 깨여났다. 헌병대장은 급기야 특무들을 풀어 리경천의 집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리경천 렬사 후대들 동녕요새유적진렬관 기념.

13

산 아래 소식은 지하련락망을 통하여 산속 항일련군 밀영지에 전해졌다. 신분이 폭로된 리경천은 더는 산에서 내려올 수 없었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산속 항일련군과 산아래 비밀당원들과의 련락을 가지고저 련락지점을 로야묘(老爷庙)로 정하였다. 그리곤 로야묘 입구에 붉은 천 한가닥을 달아 놓았다. 절의 붉은 천은 적들의 주의를 끌지 않을 것이니 붉은 천쪼각을 그대로 드리우면 산속에 식량이 떨어졌다는 뜻이고, 접은 붉은 천쪼각이면 새로운 과업이 있으니 신속히 산에 들어와서 과업을 맡으라는 뜻이였다.

때를 같이하여 헌병대장은 한번 산에 들어간 리경천이 돌아오지 않는 데다가 적지 않은 물품까지 떼우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자는 헌병대 이름으로 리경천을 잡으면 3000원을 준다는 포고를 내붙인 뒤 특무 넷을 내세워 주야로 리경천의 집을 지켜서도록 하였다. 그러고도 모자라 로흑산의 서남구자(西南沟子)와  태평천(太平川) 대교 부근에 두개 조의 밀정거점을 두었다.

로흑산 태평구자의 밀정은 리순범(李顺范)과 김범식(金范植), 김재석(金在石) 셋이였다. 리순범은 로흑산 경찰대 경위보 리순태의 동생이고 김재석은 원래 반일회 회원이였다. 김재석 이자는 리경천의 수하에서 몇년간 활동한 사람으로서 리경천이 산으로 올라간 사이 붙잡혀 변절하고 말았다. 태평천 대교쪽 밀정도 김형구(金享九)와 주봉수(朱风洙) 등 셋이였다. 이자들은 대교 가까이 감시망을 설치하고 오가는 행인들을 감시하였으나 40여일이 지나도록 리경천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하였다.

리경천이 산속에 들어간 사이 그의 집 형편은 말이 아니였다. 리경천의 안해는 다섯 자식을 돌보느라 먹거리가 떨어지는 것은 늘 부딪치는 일이고, 겨울이라도 땔나무가 떨어져 불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다. 따뜻한 의복견지와 겨울 솜신이 없은 데서 큰 딸애는 산에 땔나무 가지러 갔다가 발가락이 얼어들어 발가락 하나를 잃어야 하였다. 며칠 전 11월 23일의 먼거리 전화통화에서 리은화씨는 고모한테 그런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리경천은 상급의 지시에 따라 로흑산마을에서 련락원으로 활동하는 심길만(沈吉万)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쪽지를 보냈다.

“지금 관동군과 헌병대가 ‘대연습’이요, ‘만주국전시총동원’이요 뭐요 하면서 ‘전시통치법’을 실시하고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례없는 난관에 부딪치고 있다. 우리는 상급의 지시에 따라 쏘련으로 이동하게 되니 앞으로의 사업은 남아있는 동지들이 맡아하기를 바란다…”

동녕요새유적진렬관 구내 동북항일련군 영웅원과 리경천 조각상.

14

때는 1941년 8월이고 이달 8월 7일은 항일련군 동지들과의 쏘련행으로 되였다.  쏘련행을 앞둔 리경천은 떠날 물품도 챙길 겸 자기 동지들한테 비밀암호와 접선방법도 알릴 겸 집안식구들과도 고별인사 나눌 산속 밀영지 지도동지의 비준하에 겸사겸사 산에서 내려왔다. 밤 아홉시 남짓하여 로흑산 서남구자 강가에 이르니 리순태 경위보가 박아놓은 세 밀정한테 발각되였다. 서로간 함화 끝에 리경천은 자기 수하에서 반일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김재석의 목소리를 알아 들었다.

“김재석이 아니오?”

“김재석이 옳소. 리형이구려.”

김재석은 리경천과 인사수작을 나누다가  리경천의 요구로 리순범을 마을에 보내여 그의 형 리순태경위보를 데려 오도록 하였다. ‘권고투항’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리경천은 그럴 듯한 자태를 보여 주어야 했다. 또 적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하여 이자들 뜻대로 마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리순태는 별스레 열성을 부리면서 동생 리순범더러 마을상점에 가서 고량주 두병을 사오도록 했다. 리경천은 집에 이르자 멜가방에서 말린 노루고기 쪼각을 내놓으면서 안해더러 채를 만들게 하고는 리순태와 둘이서 술을 마셨다. 리경천으로 말하면 어쩔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다. 이윽고 두병의 술이 결단났다. 리순태는 일어서면서 너덜댄다.

“당신 무서워 할 필요가 없어, 시름 놓으라구. 밤에 잘 자구, 래일 나와 같이 경찰대에 가서 잘 말하면 된다니까.”

하지만 이는 리순태 놈의 듣기좋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리순태와 리경천이 둘이서 집안에서 술을 마실 때 세 밀정 놈은 집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며 한시도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리경천의 집을 나서던 리순태가 세 밀정과 “내가 잠간 다녀 올테니 엄밀히 감시해. 절때 빼워선 안돼.”하고 다짐받았다.

그로부터 10여분 후 리순태는 경찰 한놈과 특무 나부랭이 몇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마침 리경천이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리순태 놈은 권총을 리경천의 가슴에 들이댔다.

“꼼짝 말고 손들엇!”

리경천은 이렇게 적들에게 체포되고 이튿날 동녕헌병대로 끌려갔다가 목단강 액하감옥으로 압송되였다. 리경천은 액하감옥에서 적들과 불요불굴하게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으니 그때가 1941년 8월로 알려진다.


15

불요불굴의 항일혁명가이고 동녕현의 항일투쟁을 지도하던 동녕 최후의 특별지부 서기 리경천은 이렇게 갔다. 그의 넷째 동생도 항일전에서 싸우다가 희생되였다. 남편 리경천이 희생된 후  그의 안해는 로흑산 남촌(원 요툰 마을)에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면서 다섯 아이를 기르며 1945년 8월의 해방을 맞이하였다. 둘째 리명호는 해방전쟁에 뛰여들어 사평전투, 흑산저격전을 거치며 해남도 해방까지 나서면서 선후로 자동차련, 땅크부대에 소속되였다.

그러던중 리명호는 파편에 머리를 부상 입고 심양부대 병원에서 치료하다가 제대했다. 그 뒤에는 동녕현 운수공사, 농기공장 서기 겸 공장장, 현농기국에서 사업했다. 그러던 그는 그제날 같이 항일아동단원으로 활동하던 주옥순과 결혼하고 슬하에 아들딸 여섯을 두었고 1999년에 8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들 아들딸 여섯중 막내가 지금 연길시인대 부주임으로 사업하는 리근강(1961년생)이고 리근강을 통해 그의 할아버지 리경천 렬사 가족관계를 접하게 되였다.

1983년 3월 25일에 중화인민공화국 민정부에서는 리경천렬사에게 ‘혁명렬사증명서’를 발급하였다. 1946년에 동녕현 로흑산진에서는 북산 산비탈에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에서 희생된 혁명렬사릉으로 확건하면서 기념비 비문에 항일전쟁 및 해방전쟁에서 리경천을 대표로 하는 혁명선배들이 이땅에서 생명을 바쳤다고 새겨 놓았다.

지금 동녕요새유적진렬관과 훈춘대황구당사전람관에 리경천렬사의 유상이 모셔지고, 동녕요새(东宁要塞)의 동녕항일련군영웅원에 리경천 렬사 조각상이 세워져있다. 2010년 8월 30일, 동녕의 조선족로인협회에서는 사회 각계 300여명의 참가 속에 당지에서 리경천항일렬사 순국 69돐 추모회를 성대히 가지였다. 그날 《요새풍운》 저자 한광재가 리경천 렬사의 영웅적 사적을 소개하고 《요새풍운》 책을 리경천 렬사의 친손자 리근강에게 선물했다.

  •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互联网新闻信息服务许可证编号:22120180019

吉ICP备09000490号 | 吉新出网备字005号 | Copyright © 2007-2017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