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길송 초기 항일활동과 그의 부인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67

2019-12-23 09:30:33

항일련군 장령 박길송 렬사 고향마을 도문시 석현진 영창촌. (2019년 5월 3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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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두(百度)나 기타 사이트에서 항일련군 장령 박길송을 검색하면 박길송의 활동지로 알려지는 흑룡강성 철력(铁力), 경성(庆城) 등지 전문가들 연구자료들이 많이 떠오른다. 박길송은 항일련군 제3군 3사 조직과장, 서북지휘부 독립2사 정치부 주임, 3군 경위퇀 정치부 주임, 3로군 6지대 정치위원, 3로군 12지대 지대장으로 떠올라 숭엄한 기분 속에 빠뜨려진다. 그럼에도 박길송의 고향과 가족관계, 지난 30년대 초반과 중반 왕청현 경내에서의 박길송의 항일활동을 잘 모르는 데서 두루뭉실 지나가 큰 유감으로 되고 있다.

항일의 피어린 나날 박길송의 왕청에서의 초기 항일활동에 대해서는 조선족 항일연구가로서 잘 알고 있는편이지만 박길송의 진실한 고향이며 진실한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정말 알 수가 없을가. 지난 30여년간 이에 대한 관심은 조금도 사라지지가 않았다. 그러던 지난해 12월 이후 그제날 왕청현 제5구를 이룬 석현의 오중화 렬사와 그의 오씨 형제들 전기가 련재되면서 올 1월 21일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로부터 훈춘에 오중화 렬사, 박길송 렬사와 관련되는 친척이 있다는 정보가 전해졌다.

귀가 번쩍 뜨이였다. 오중화를 알고 있는 오중화 렬사의 친척이라면 필경 년세가 있는 분이렸다. 년세가 있다면 시간을 다그쳐야 하는 일. 마침 당년 연길감옥 파옥지도자이며 항일련군 전사인 김명주 투사의 딸 김진옥씨로부터 오중화 관련 친척분의 전화번호를 알려왔다. 이 전화번호 대로 련락하니 훈춘의 분은 오중화 렬사의 친척이 아닌, 같은 성씨의 오중호씨고, 훈춘시물가국 부국장으로 사업하는 오중호씨의 어머니면 항일련군 장령 박길송의 친 녀동생이라고 한다.

박길송 렬사와 가족관계를 취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지난 1월 25일 필자는 지체할세라 연변행에 올랐다. 연변TV 기자출신 김광현씨가 고맙게도 자가용으로 훈춘시까지 동행해주었다. 1월 27일 오전 훈춘시에 이르니 오중호씨가 마중나왔고 오중호씨 안내로 그의 어머니 저택에 이르러 박순금 할머니를 취재 방문하였다. 박순금 할머니는 과연 박길송 렬사의 친녀동생으로서 1934년도생, 즉 올해 만 85세였다.

“박길송 렬사가 1917년생이면 할머니와는 17세 터울을 이룹니다. 그러면 그 사이도 그렇고 형제남매가 여럿이겠네요.”

“우리 형제남매는 모두 아홉입니다. 녀자 여섯에 오빠 셋이지요. 큰언니 박분옥, 큰오빠 박금송, 둘째 언니 박분녀입니다. 그 다음이 박길송 오빠인데 길송 오빠는 아들로는 둘째, 우리 항렬에서는 넷째로 됩니다. 그 아래로 셋째 언니 박옥순, 셋째 오빠 박국송, 넷째 언니 박순옥, 다섯째 언니 박순녀이구 제일 마지막이 나 박순금입네다.”

그제날 영창동 영창. 가운데 언덕을 넘으면 가야하이다. (2019년 5월 3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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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금 할머니와의 스스럼없는 취재 시작과 더불어 흘러나온 박길송 렬사 형제남매 아홉의 내리배렬. 그렇게 취재ㅡ우리 이야기는 한시간 푼히 이어지면서 박순금 할머니가 알고있는 옛날 가족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가족이야기는 아홉 형제남매에 이어 박순금 할머니 출생으로 이어진다.

“나는 1934년 정월 11일에 왕청현 라자구로 들어가는 길 ‘문티’ 밑에서 태여났지요!”

박순금 할머니가 떠올리는 할머니 출생지. 출생지는 남들과 달리 바깥 길목의 문티 밑. ‘문티’라 하면 연변조선족의 사투리로서 인공적으로 베여 땅에 눕혀진 둥그런 목재를 가리킨다. 라자구로 들어가는 길일진대 항일연구가들인 우리는 왕청현 소왕청 항일유격근거지를 탈출한 혁명군중 일행이 비밀리에 멀리 산속 라자구로 전이하던 시기임을 잘 알고 있다.

이제 뒤에서도 펼쳐보이지만 왕청현 경내 소왕청 항일유격근거지는 1932년 가을 이후 창설되고, 일제침략자들은 1933년초 이후 중공동만특위 소재지인 소왕청 항일유격근거지를 중심으로 동만 각 항일유격근거지들에 대해 제1차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1933년 겨울부터 이듬해초까지 일제놈들은 보병, 기병, 포병, 항공대 등 5000~6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소왕청근거지를 망라한 연변 여러 항일유격근거지들에 대해 제2차 대‘토벌’를 벌리였다.

연변의 항일유격대들은 일제놈들의 제1차, 제2차의 대‘토벌’을 분쇄하는 피어린 투쟁 가운데서 새로운 장성을 가져왔지만 우리 항일근거지들은 심한 유린을 받았다. 모든 근거지의 가옥들과 밭의 곡식이 재더미로 되였다. 1933년 12월 련속 40일간의 일제대‘토벌’에서 소왕청근거지의 1500여명 군중들중 대부분이 흩어지고 죽고 40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들 소왕청근거지 400여명 군중들 가운데서 비혁명군중들은 왕청일대로 옮겨가고 나머지 200여명 혁명군중들은 하마탕, 다홍왜, 요영구를 거치면서 라자구 등지로 전이하였다. 박길송의 가족들도 소왕청으로부터 라자구로의 전이길에 나섰으니, 1934년 정월 11일 라자구로 들어가는 도중 박순금 할머니가 길어구에서 태여남은 이런 연유였다.

박길송 렬사의 녀동생 박순금 할머니. (2019년 5월 3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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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금 할머니 출생으로부터 보면 박길송 렬사의 어머니는 일제놈들이 연변 여러 항일근거지들에 대한 제2차 대‘토벌’에 광분할 때 임신 막달이였다. 출산시간은 그 엄혹한 환경과는 별개로 기한내에 각일각 다가왔다. 아픔이 극도에 달하더니 한겨울 엄동설한에 별수 없이 피난길에서 출산할 수밖에. 산모는 눈보라 휘몰아치는 이 한겨울에 자기 몸도 그러한데 갓난애가 울면 라자구 전이길 혁명군중 일행이 변을 당하는 게 더 무서웠다. 끝내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남편 박덕심과 조용히 말을 건네였다.

“여보, 아무래두 안되겠어유. 갓난애를 버립시다!”

“그렇긴 하오만…”

남편 박덕심은 긴 한숨을 톺다가 갓난애를 측은히 들여다보더니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나섰다.

“그래도 생명인데 어떻게 버리겠소?!”

말이 끝나기 바쁘게 박덕심은 산모의 대답도 기다릴 사이 없이 포대기에 꼭 싸인 어린것을 받아안았다. 아마도 어른들 위기 속의 조바심을 알기라도 하듯 갓난애는 울지도 않고 눈을 빠끔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박덕심은 “아가야, 너도 한 생명이야. 아빠는 널 버릴 수가 없어…” 하고 혼자말로 되뇌이면서 어린 생명을 품에 꼬옥 끌어안았다. 갓난애가 울면 그들 일행이 때도 시도 없이 달려들 적토벌대에 다 죽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그길로 박덕심은 가족을 이끌고 남이 다 가는 방향과 별개로 남다른 골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 결연한 걸음은 박길송 일가를 라자구에 떨어지게 하였다. 그 결연한 걸음은 마침내 갓난애를 살려냈으니 이 갓난애가 후날의 박순금으로 자라나고 2019년 1월, 80대 중반의 할머니로 필자 앞에 나타나 여태 세상이 모르던 오빠이고 항일련군 장령인 박길송의 가족관계를 담담히 터놓았다. 아버지 박덕심께서 먼 후날로 이어질 이 사명ㅡ가족관계 알림을 완수하라고, 언젠가는 우리 가족사를 기록하는 귀인이 나타난다고 고이 살려준 것이 아니였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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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였다. 소중한 인연이였다. 박순금 할머니 이야기와 다년간 필자의 박길송 연구에 따르면 박길송 렬사의 아버지는 우와 같이 박덕심(朴德深)이고 어머니는 전씨(田氏)로서 부모님들은 두만강 남안의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에서 삶을 영위하였다. 석현일대의 이름난 항일혁명가인 오중화 렬사네와 한 고향으로서 익숙한 관계였다.

그러다가 정든 고향을 떠나 두만강 이북으로의 이사가 일대 추세를 이룬다. 살길을 찾아 떠나는 남부녀대의 눈물겨운 이사길, 박덕심 일가는 오중화네 오씨네와 더불어 이사보짐을 이고 지고 허위단심으로 두만강 북안길에 오르게 되니 오중화 오씨는 왕청현 석현 하목단(下牡丹)으로 옮겨앉고, 박덕심네는 오늘의 도문시 석현진에서 서북으로 약 20리 떨어진 영창동으로 옮겨앉았다. 때는 1906년경으로 알려진다.

《도문시지명지》(图们市地名志,1985년 출판)를 보면 도문시 석현진 영창동은 청나라 광서(光绪) 25년인 1899년에 개척된 고장으로서 조선이주민들이 점차 모여들면서 제법 마을이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자기들 살아가는 마을이 영원히 번영창성하라는 뜻에서 영창동(永昌洞)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로부터 언제부터인가 마을 이름에서 영창동의 동자가 없어지면서 영창으로 불리여졌다.

영창동에 삶의 뿌리를 내린 온성 박씨ㅡ박덕심과 그의 안해 전씨는 우에서 스치고 지난 것처럼 슬하에 도합 아홉 자식을 두었다. 박순금 할머니의 오빠 박길송은 1917년 8월 4일에 왕청 가야하에서 멀지 않은 영창동에서 태여났다. 9남매중 내리 넷째이고 남자로는 둘째, 호는 주원(周元). 부모님들이 강심을 먹으며 허리를 졸라맨 데서 박길송은 그럭저럭 왕청현 공립5소를 다니다가 현립제3소학교 고등과에 전학할 수 있었다.

올해 2019년 5월 3일,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 당서기 라철룡씨의 안내하에 연길시 리경호씨와 함께 라철룡씨 자가용으로 석현에서 서남으로 20리가량 떨어진 그제날 영창동으로 가보니 찾아갈 때는 산골에 산골로 이어가지만 영창촌은 꽤나 되는 벌방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영창촌은 서남으로 서북으로, 동남으로 골이 트이여 삼개촌으로 불리울 만도 한데 북으로 언덕너머 멀지 않은 곳에 가야하가 흐르고 있었다. 가야하 배사공의 유래를 알 것 같았다.

9남매중 넷째 박길송이 14살을 잡으며 현립제3소학교 고등과를 다니게 되자 소작농사만으로는 학비를 이어댈 수가 없었다. 박덕심은 별수 없이 마을 가까이 가야하에서 배사공 노릇도 하면서 아들애 학업을 받들어 나섰지만 아들애 길송이는 학자금 부족으로 고등과 전학 3개월 만에 중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향마을로 돌아온 길송은 아버지를 도와 가야하나루터 배사공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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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송이 한창 소학공부로 학창시절을 보낼 때는 지난 세기 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으로 잡혀진다. 20년대 후반의 영창동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구역국에서 조직한 반일회와 농민협회, 부녀회, 공청단, 아동단 등 반일혁명단체가 흥기하면서 2중, 3중으로 가난에 허덕이던 빈고농민들이 계급적으로 각성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 전 연변을 들썽한 대중적 5.30폭동 이후 중국공산당 조직이 연변 각지에서 륙속 조직되였다. 1930년 8월 13일에 화룡현 평강구 약수동에서 중공연화중심현위가 설립되더니 그해 10월에는 중공왕청현위와 중공훈춘현위도 설립을 고하였다. 이에 따라 1931년 1월에 박길송이 태여난 마을ㅡ석현의 영창동에서 한영모를 서기로 하는 중공석현구위ㅡ제5구위가 정식으로 조직되였다.

잇달아 영창동에는 중국공산당 영창동지부가 조직되고 당지부가 지도하는 반일회, 농민협회, 공청단, 부녀회, 소선대, 아동단 등 혁명단체가 륙속 생겨나 활동을 시작하였다. 마침 박길송은 현립제3소학교 고등과를 중퇴하고 고향마을로 돌아왔고 고향마을에서 제일먼저 아동단에 가입하면서 아동단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항일아동단의 주요과업은 마을보초와 바깥보초, 먼거리 통신 등이였다. 먼거리 통신과업이 떨어지면 박길송은 언제나 자기가 나섰다. 박길송은 당조직에서 위임하는 통신ㅡ쪽지를 교묘하게 감추고는 비밀당지부가 조직된 5구위 산하 장동(樟洞), 봉목동(棒木洞), 봉오동(凤梧洞), 남봉오동(흥진), 면전동(棉田洞), 룡암동(龙岩洞), 영창동(永昌洞) 등지로 다니였다. 어떤 때는 모자간으로 꾸미고 부녀회원과 같이 먼거리 통신에 나서기도 하였다.

1931년 가을 연변 각지를 불태운 추수투쟁의 열화는 석현지역에서도 세차게 타올랐다.

이해 10월경의 어느 날, 주변 신흥평의 수십명 혁명군중들이 영창동 남성(南城)으로 몰려왔다. 영창동 남성에는 영창동 장골, 용골, 진목동, 봉오동, 흥진, 삼도구, 하목단, 용암동 등지에서 모여든 수백명 농민형제들로 차고 넘치였다. 박길송 소속 영창동의 항일아동단원들도 수백명 추수투쟁 물결 속에 합류하였다. 그들은 영창동 남성에서 성대한 대회를 가지고 지방당국에 드리는 청원서를 선독하면서 소작료에 대한 감조감식을 강렬히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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