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길송 초기 항일활동과 그의 부인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68

2019-12-30 09:15:01

박길송 렬사 고향마을 도문시 석현진 영창촌 혁명렬사기념비. 2019년 5월 3일 현지촬영.

6

대회 후 수백명 농민형제들은 대렬을 지어 호호탕탕히 배초구의 현정부로 향하였다. 대렬 속에 끼인 박길송 등 영창동 아동단원들은 시위대렬을 따라 “지주의 착취와 압박을 반대한다!”, “감조감식을 실시하자!” 등 구호를 끊임없이 높이 불렀다. 투쟁대오가 배초구의 현정부에 이르니 무려 1000여명에 달하였다.

현정부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구호소리는 갈수록 높아갔다. 그날 급해난 현장과 왕청현 정부는 어마어마한 1000여명 군중들의 기세에 눌리워 빈고농민들이 내놓은 ‘4.6’제의 소작요구를 접수할 수밖에 없었다. 박길송은 이른바 현장어른도 성난 시위대렬 앞에서 쩔쩔 매며 머리를 수그린 것을 보고 통쾌한 나머지 시위군중들과 더불어 만세 만세를 높이높이 불렀다. 이어 영창동 지주 남병운의 곡식 낟가리를 헤치고 ‘4.6’제의 비례로 소작인들이 나누어가지니 박길송과 영창동 아동단원들은 성수가 났다.

이듬해 봄, 연변 각지에서 전해 가을 추수투쟁에 이은 대중적 춘황투쟁의 불길이 거세차게 타올랐다. 왕청현 혁명구역 제5구로 불리운 석현지구에서도 춘황투쟁이 성세를 이루자 박길송은 영창동 아동단원들을 이끌어 춘황투쟁에서 소년 용맹을 떨치였다. 추수춘황 투쟁을 거치면서 박길송은 소선대원으로, 공청단원으로 자라났다.

박길송과 더불어 박길송의 가족은 영창동 마을에서 유명짜한 혁명가족이였다. 아버지 박덕심은 가야하 배사공으로 일하면서 목숨을 내걸고 지방에서 현유격대로 보내는 원군물자를 배로, 소수레로 여러번 실어다주었고, 소금장사로 위장하면서 귀한 소금도 수차 현유격대로 보내였다. 어머니 전씨는 남편이 비밀활동에 나설 때면 망을 보거나 안위를 잘 챙겨주었고, 박길송은 아버지를 도와 원군물자 수송에 직접 나서기도 하였다.

현유격대는 왕청현유격대를 가리킨다. 왕청현유격대는 1932년 4월, 소왕청에서 조직된 뒤 이해 11월에 이르러 4개 중대를 가진 대대로 장성하였다. 피눈이 된 일제놈들은 1933년 벽두에 수비대와 위만군, 무장자위단, 경찰 등 700여명을 긁어모아 새로 창설된 소왕청근거지에 살기등등하게 달려들었다. 그러던 적들은 사수평(삼도구) 쪽에서 왕청유격대대 1중대와 2중대에 의해 적 3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주하고 말았다.

현위 군사부에서는 적들이 다시 엄청난 병력으로 대소왕청을 포위하고 근거지를 일거에 소탕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정보에 의하면 적들은 석현에서 한창 군사작전회의를 하고 있다고 한다. 현위군사부장 김명균은 친히 유격대 1개 중대를 거느리고 석현에 진출하였으나 한 결사대원의 실수로 현유격대는 적 지휘부를 까부시지도 못하고 하루종일 적들과 피어린 싸움을 벌리다가 철거하여야만 하였다.

현유격대는 산속을 타면서 서남으로 20리 밖 영창동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세한 적들과 맞다든 데서 김명균은 유격대와 함께 영창동 부근에서 적들과 여러 날이나 생사판가리 전투를 벌리지 않을수 없었다. 나중에 탄알이 다 떨어지고 수류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박길송과 그의 아버지는 혁명군중들과 함께 사선을 헤치면서 현유격대 진지에 음식물을 가져가 유격대원들이 원기를 회복하도록 하였다. 마침 급보를 받은 장룡산이 후원군을 인솔하여 짓쳐들어왔기에 김명균은 소속 중대를 지휘하여 적들의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 안내비와 소왕청(마촌)항일유격근거지 유적분포도. 2019년 5월 3일 현지촬영.

7

형제자매들도 신들메를 조이며 항일활동에 나섰다. 이미 출가한 박순금의 큰언니 박분옥네도 혁명가족이였다. 큰언니 남편은 반일회, 농민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원군물자를 실어나르다가 장마가 진 가야하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형제남매서 둘째요, 큰언니의 바로 아래인 박순금의 큰 오빠 박금송은 현유격대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적들과의 싸움에서 희생되였다. 박순금 할머니는 큰 오빠 희생이 1933년 겨울과 1934년초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를 떠나 라자구로 전이하기 전 일이라며 눈굽을 찍으셨다.

오중화를 중심으로 하는 석현일대에서의 오씨네 활동과 가야하 배사공을 중심으로 하는 영창동 박덕심 가족의 빈번한 활동은 적들의 두통거리로 되였다. 적들의 검은 마수가 뻗어오자 중공5구 구위에서는 왕청현위의 지시에 따라 석현의 오씨 일가와 오씨 친척들, 영창동의 박덕심 일가 등 신분이 드러난 지방혁명가들을 비밀리에 현내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로 전이시키였다. 영창동 박씨네와 박길송의 소왕청으로의 진출은 1933년 5월초의 일이다.

영창동 소속 석현이 혁명구역으로 왕청현 5구라면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는 왕청현 2구로 불리였다. 박길송은 소왕청근거지에서 2구 공청단구위 선전간사로 활동하면서 근거지 아동단 사업에도 살손을 댔다.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왕청현 아동국 국장은 후일 이름난 항일렬사로 떠오른 리순희(李顺姬, 1917ㅡ1934)이다. 리순희는 박길송과 동갑내기 단발머리 소녀였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리순희는 지방에서 지주집 부엌데기로 매를 맞고 울면서 설음 겨운 생활을 하다가 혁명의 길에 나서서 공청단원으로 자라난 굴강한 소녀였다. 웃을 때면 고운 얼굴에 고운 보조개가 패이는 재미나는 소녀였다.

그때 소왕청근거지에는 아동단원들과 부모 잃은 고아들이 적지 않았다. 다정하고 활달한 성미의 리순희와 남들께 믿음을 주는 시원시원한 성격의 박길송이 아동단원들 앞에 나타나면서 그들보다 어린 아이들을 친동생처럼 아껴주니 근거지의 아동단원과 고아들은 부모님이나 만난듯 활기를 띠였으며 명랑한 노래소리가 곳곳에 울려퍼졌다. 하루의 일과는 언제난 <삐오네르> 노래로부터 시작되였다.

목에다 건 것은 붉은넥타이

한손에 곤봉을 잡고서 탐정을 나간다

장하다 그의 이름 삐오네르 삐오네르

세상에 모도다 칭찬하다 삐오네르

2019년 1월 27일, 훈춘시에서 박길송 렬사 녀동생 박순금 할머니를 취재. 2019년 1월 27일 김광현씨 촬영.

8

명랑한 아침, 즐거운 아침.

아동단원들은 리순희와 박길송 등의 지도하에서 날마다 활기찬 아침체조를 하며 조기회의를 가지였다. 회의가 끝나면 조선어, 정치, 지리, 력사, 노래 등 과목을 각자의 수준에 맞게 배워 나갔다. 저녁이면 ‘혁명이란 무엇인가’,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레닌 선생의 어린시절’ 등 테마를 가지고 토론회를 가지였다. 신나는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 아동단실(아동단학교라고도 한다.) 생활의 면면이라 하겠다.

아동단 생활은 갈수록 활기를 띄였다. 리순희가 손수 지도하는 아동단실아동유희대는 근거지군민들 앞에서 자기들의 행복한 생활을 반영한 노래와 춤을 공연하면서 항일의 후비대로 건실하게 커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그런 아동단실 아동유희대에는 리순희, 박길송보다 세살 아래인 아동단원 김옥순과 1924년생인 나어린 소녀 김금녀가 있었으니 리순희는 물론 박길송은 자기보다도 어린 두 소녀에게 남다른 관심을 돌리였다.

김옥순과 김금녀 두 소녀는 워낙 연길현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 북동 아동단실(아동단학교) 아동단원들이였다.

김금녀는 1924년생이고, 연길현 의란구 춘흥촌 출신인데 천성이 영특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데다가 노래와 춤에 남다른 흥취가 있어 근거지 군민들은 노래 잘 부르는 금녀를 ‘종달새소녀’라고 친절히 불렀다. 1932년봄 의란구 남양동 등지에 달려든 일제토벌대 놈들에게 혁명가족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큰오빠 명국이를 잃은 비운의 소녀이기도 하였다.

박길송보다 세살 아래인 김옥순은 고향은 잘 알려지지 않지만 아홉살 어린 나이에 지주집 아이를 업어주고 그 나이에 벌써 자기보다 나이가 퍽 이상인 지주집 아들과 눈물의 혼사를 맺어야 했던 불운의 소녀였다. 1932년봄 이후 일제토벌에 졸지에 집과 역축 모두를 잃고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로 들어선 아동단원 소녀이기도 하였다.

1933년 봄에 일본침략자들은 2천여명의 병력을 긁어모아가지고 왕우구근거지를 대대적으로 진공하였다. 근거지 아동단원이고 아동단유희대 대원들인 김옥순과 김금녀는 친자매처럼 극진히 보내면서 아동유희대와 함께 하루에도 몇차례씩 유격대진지에 가서 선동연설을 하고 구호를 웨치고 혁명가요를 부르면서 유격대아저씨들을 선동,고무에 열을 올리였다.

그해 1933년봄의 일이다. 그날도 우리 연길현유격대가 근거지로 기여드는 한무리의 일제토벌대놈들을 본때있게 족치고 기로에 올랐다. 유격대원들이 군악 소리 높이 근거지북동학교마당에 들어서자 소선대 지도원 리화순(항일 렬사)의 지시를 받고 대기하고 있던 김옥순, 김금녀 소속 아동단원들은 “앞으로 갓!”, “좌우로 벌렷!”하는 구령소리에 따라 유격대 아저씨들을 빙 둘러쌌다.

아동단 유희대 지도원의 축사와 유격대 책임자의 답사에 이어 유희대어린이들의 <승리가>가 우렁차게 울렸다.

깨끗하다 우리 투사들 맹호같이 날뛰라

우리 투사들 대적할자 그 누군가

나가 싸워라 싸워라 힘껏 싸워라

영광의 승리는 우리 것이니 념려말라

기운을 뽐내면서 굳게 싸워라

펄펄 날리는 붉은기 우리 향해 춤추도다


9

아동단원들의 노래소리는 전체의 노래로 번져갔다. 흥겨운 춤판이 이어졌다. <삐오네르>, <의회주권가>, <총동원가>, <결사전가> 등 혁명가요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김옥순도, 김금녀도, 아동단 지도원 리화순도 춤판에서 활약했다. 그들의 우아하고도 물찬 제비 같은 춤동작은 환영모임을 고조에로 이끌었다. 여기저기에서 응원소리가 끊임없었다. 근거지군민들이 한맘으로 싸운 데서 적들은 10여일 만에 끝내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에서 패주하고 말았다.

적들은 실패를 달가와하지 않았다. 이해 1933년 겨울 적들은 또 왕우구근거지에 달려들었다. ‘토벌대’ 놈들은 첫시작부터 근거지를 불바다로 만들며 근거지 인민들을 야만적으로 학살하였다. 연길현유격대는 적들과 피어린 전투를 벌리였다. 이를 전후하여 옥순이와 금녀 등은 조직의 파견으로 근거지 아동단 지도원을 따라 다홍왜근거지를 거쳐 소왕청근거지 마촌으로 들어갔다.

왕청현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에도 가렬한 싸움이 그칠 새 없었다. 옥순이와 금녀는 근거지 아동유희대와 함께 혈전을 벌리고 있는 뾰족산과 마반산에 올랐다. 옥순이와 금녀 등은 진지뒤에서 삭정이를 주어다 불을 피우고 눈에 젖은 유격대아저씨들의 신을 말리고 더운물을 끓이였다. 적탄이 비발치는 진지에 들어가 혁명가요를 목청껏 부르기도 하였다.


나어린 몸 남겨두고

아버지는 철창에로

눈보라치는 벌판에서

어머니도 영리별

철모르는 어린 유녀

찾아갈 곳 어데일가


이 배고파 우는 눈물

누가 누가 씻으려나

그날마다 그때마다

엄마 아빠 그리워

이리저리 찾으면서

엄마 아빠 부르누나


눈보라치는 산발을 누비며 울려퍼지는 <어린이 노래>, 1930년 가을 화룡현 중공평강구위 부녀위원 홍혜순이 자기 어린 딸을 그리며 지은 <어린이 노래>ㅡ김옥순, 김금녀 등이 부른 <어린이 노래> 비장한 노래소리에 감동된 유격대원들은 입술을 깨물려 두주먹을 불끈 쥐였다. 결사적으로 싸우는 유격대원 앞에서 적들은 무리로 쓰러졌다.

김옥순, 김금녀 등 근거지 아동유희대 아동단원들도 싸우는 전사였다. 그러는 이들 소녀들이 박길송에게 더없이 기특한 소녀로 안겨들었다. 어느덧 소녀 김옥순은 자기보다 세살 이상인 박길송을 두고 야릇한 감정이 생겨남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박길송의 마음속에도 야릇한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미구하여 이들 소년 소녀의 야릇한 감정은 사랑으로 승화하면서 근거지 항일군민들의 미담으로 전해졌다.

10대 초반과 중반 사이 소년 소녀들이 사랑에 빠졌다 하여 웃지들 마시라. 지난 세기 20년대도 그러하고 30년대에도 남녀 15살 좌우면 의례 결혼하던 시절이였다.

  •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互联网新闻信息服务许可证编号:22120180019

吉ICP备09000490号 | 吉新出网备字005号 | Copyright © 2007-2017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