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하강특위 서기 황성식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70

2020-01-13 09:05:33

1936년 9월 18일, 황성식이 주하탕원련석회의에 참가했던 모아산 북쪽비탈 3군 재봉대밀영. 3군 재봉대밀영은 오늘의 흑룡강성 이춘시 서림구 홍성촌(伊春市西林区红星村) 동남산 북쪽비탈에 위치하고 있다.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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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9월 18일, 소흥안령의 심산속에 위치한 모아산 북쪽비탈 3군 재봉대밀영(지금의 南岔林业局 浩良河상류 18킬로메터 되는 곳)에서 주하-탕원 중심현위와 3군, 6군 당위 성원들이 참가한 ‘주하탕원련석회의’(珠汤联席会议)가 열리였다. 련석회의에서는 중공만주성위가 철소되고 길동, 동만, 남만, 북만 4개 성위를 설립할 데 관한 상급당의 지시와 당면한 정치, 군사 정세, 조직에 대한 중대한 문제들이 토의되면서 중공북만림시성위를 정식으로 조직하였다.

조상지(赵尚志)가 회의 집행주석으로 되고 풍중운(冯仲云)이 성위 서기로 임명되였다. 련석회의 기간 3군 재봉대의 김벽영 등 녀전사들이 회의참가자들의 숙박과 식사 등 후근일들을 전반적으로 맡아나서며 최선을 다하였다.

주하탕원련석회의는 북만항일련군사에서 자못 중요한 회의로서 회의의 최대공적은 중앙홍군이 장정한 후 얼마 안되여 중공만주성위가 해체되여 동북당과 항일련군이 당중앙과 련계를 가질 수 없는 형편에서 중공북만림시성위를 산생시킨 것이라 하겠다. 주하탕원련석회의에는 통하현 사람이며 공청단북만성위 서기인 황성식(黄成植,1918ㅡ1939)도 참가하였다. 련석회의에서 중공북만림시성위가 조직되면서 황성식이 중공북만림시성위 청년부장으로 당선되였다. 의미있는 것은 련석회의에 참가한 황성식과 재봉대 녀전사 김벽영의 사랑의 인연이라 하겠다.

여러 자료들에서는 김벽영이 황성식의 련인으로, 후에는 안해로 등장하는데 둘 다 통하현 사람이여서 원래부터 알고 련인관계로 지냈는지 아니면 련석회의에서 련인관계를 가지고 후에 부부관계로 발전하였는지는 알려지지가 않는다. 혹자는 1936년에 15살밖에 안되는 김벽영(1922년생)이 너무 빨리 련인으로 발전하지 않았나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겠지만 1930년대 그 세월은 남녀 15살쯤이면 의례 결혼해야 하는 나이, 15살 정도를 넘기면 로처녀, 로총각으로 불리였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 녀전사 김옥선의 해방 후 관련 회고에 따르면 3군재봉대의 최초 7명은 진정산(陈静山), 장의숙(张义淑), 곽숙진(郭淑珍), 리종부(李钟孚), 김호련(金浩莲)과 자기,후근일을 맡아보는 고씨(顾氏)라는 분 등 7명으로 알려진다. 3군 재봉대 관련 자료를 보면 1936년 9월에 통하현에서 홍명숙, 김벽영, 장경숙, 김옥선, 장희숙, 박경숙(洪明淑、金碧荣、张景淑、金玉善、张熙淑、朴景淑) 등 녀전사들이 새로 재봉대로 오면서 3군 재봉대 녀전사들은 15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15명중 진경산 등 11명이 조선족 녀전사로 알려진다. 김벽영이 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에 참가한 진실한 력사기록이다. 그런 김벽영이 공청단북만성위 서기 황성식의 안해로 등장한다. 김벽영은 남편 황성식보다 4살 어리였다.

중공하강특위 서기 황성식 사진.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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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러운 것은 황성식에 대한 전문연구가 따르지 못하여 주하탕원련석회의에 참가하기 전 황성식에 대하여 통하현 사람이라는 것외 아는 것이 별반없는 현실이 아닐가. 그러면서도 현유 황성식 관련 연구자료들에 따르면 황성식과 김벽영은 같은 통하현 사람으로서 주하탕원련석회의에 앞서 이미 익숙히 알고있던 사이였음을 알 수가 있다. 또, 황성식의 주하탕원련석회의참가와 공청단북만성위 서기라는 신분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이미 통하출신으로서 여러 해의 혁명투쟁경력을 가진 혁명가였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937년 2월 2일, 항일련군 제6군은 탕원현 격절하(格节河)밀영에서 군정련석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중공북만림시성위 서기 풍중운과 하강특위, 6군의 군과 사, 퇀의 주요지도동지들이 참가하였는데 공청단북만성위서기이고 림시성위 청년부장인 황성식과 4사 정치부 주임 오옥광도 이날 회의에 참가하였다. 확대회의는 6군 대리군장 대홍빈(戴洪滨)을 정식 군장으로 결정하고 6군의 중대한 문제들은 군장과 정치부주임, 참모장으로 형성된 고급회의에서 집단으로 해결한다, 당의 령도를 강화하여야 한다 등 의제로 열리였다.

회의가 결속된 후 6군의 4개 사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활동구역으로 달려갔다. 오옥광은 군장 겸 4사 사장인 대홍빈과 함께 4사의 4개퇀을 이끌고 모아산을 중심으로 탕원 서부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모아산밀영에 자리잡은 북만림시성위 기관과 군재봉대를 망라한 6군의 후방기지를 보위하는 성스러운 과업을 수행하였다. 북만의 공청단사업을 지도하는 황성식은 주로 항일련군 제6군의 활동구역에서 활동하면서 자기 직무에 충실하였다.

어느덧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지나더니 무더운 여름이 돌아왔다. 이해 1937년 6월 28일에 중공북만림시성위 확대회의가 모아산ㅡ항일련군 제6군의 재봉대가 자리잡은 모아산 밀영에서 열리였다. 북만림시성위 서기 풍중운(冯仲云), 항일련군 제6군 정치부주임 겸 성위 상무위원 장수전(张寿钱), 성위 조직부장 장란생(张兰生), 항일련군 제3군 군장 겸 북만항일련군 총사령 조상지(赵尚志), 항일련군 제5군 군장 겸 길동성위 상무위원 주보중(周保中), 항일련군 제6군 군장 대홍빈(戴鸿宾) 등 항일련군과 지방의 지도일군들이 회의에 참가하였다.

조선족동지들인 항일련군 제3군 정치부 주임 허형식(许亨植)과 항일련군 6군 4사 정치부 주임 오옥광(吴玉光), 6군 2사 정치부 주임 장흥덕(张兴德), 북만 공청단성위 서기 황성식 등도 회의에 참가하였다. 동지들과 군대와 지방의 지도일군들이 회의에 참가하였다. 재봉대 대장 배성춘과 재봉대의 전체 녀전사들이 회의의 순리로운 진행을 위해 후근복무를 도맡으며 최선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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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는 도합 20여일 열리면서 회의 기간 두차례 련환회가 조직되였다. 그중 한차례 련환회가 회의 결속을 앞두고 가진 두쌍의 같지 않은 민족의 혼례식이였다. 한쌍은 우보합(만족)과 리재덕(조선족), 다른 한쌍은 오옥광(조선족)과 리계란(李桂兰, 만족)이였다.

혼례식에서 공청단북만성위 서기 황성식은 허형식, 오옥광, 장흥덕 등 조선동지들과 더불어 조선어로 <나가자 나가자, 싸우러 나가자…> 항일가요를 성수나게 부르며 춤추며 돌아갔다. 춤출 줄 모르는 장수전, 조상지, 주보중 등 동지들은 노래절주에 따라 신나게 박수를 치면서 흥을 돋구었다.

그러나 회의는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고 두차례 련환회로 활기띤 것만은 아니였다. 말 그대로 그번 회의는 동북항일련군사에서 한차례 중요한 회의로서 북만과 길동 지구의 허다한 중요인물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앉았다지만 의외로 회의에서는 심각한 쟁론이 벌어졌다. 조상지는 ‘주하탕원련석회의’ 결의를 견지하면서 왕명과 강생의 ‘6.3지시편지’에는 현실과 맞지 않는 관점이 존재하며 이미 동북의 항일무장투쟁이란 이 객관정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그런데 일부 동지들은 왕명, 강생은 당중앙대표로서 왕명, 강생을 반대하면 곧 당중앙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본 전기에서 론하는 ‘6.3지시편지’는 1935년 6월 3일, 왕명과 강생이 국제공산당 제7차 대회의 정신에 따라 중공길동특위의 책임자에게 보낸 편지로서 편지에는 동북에서 어떻게 유격전쟁을 벌릴 것인가 하는 등 일련의 지시가 씌여졌다. ‘6.3지시편지’는 관문주의를 타파하고 ‘무장반일을 원하는 모든 분자들을 흡수하여 유격대조직을 확대’하면서 전민족적인 통일전선 실행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편지는 또 ‘반만항일불병제’(反满抗日不并提)나 ‘불공개반대귀대툰’(不公开反对归大屯) 등 실제와 어울리지 않는 오유적 제기법도 안고 있었다. 이어 3개의 보충문건도 내려졌는바 ‘길특보충편지’(吉东特委给珠河中心县委及三军负责同志的信)와 ‘중대편지’(中代信, 中共驻东北代表给珠河中心县委及三军负责同志的信), ‘새정책로선편지’ 등이 그러하다.

조상지가 ‘6.3지시편지’ 등을 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였다. 근 1년 전인 1936년 9월 18일에 열린 ‘주하탕원련석회의’에서 조상지는 벌써 ‘6.3지시편지’는 대부분 정확하지만 ‘반항의 출로와 투쟁의 출로를 제출하지 않았’(没有提出反抗的出路和斗争的出路来)고 ‘길특보충편지’와 ‘중대편지’는 단순퇴각정책에 속한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이로하여 그번 회의에서 쟁론이 벌어졌었는데 이번 회의의 쟁론은 그번 회의쟁론의 계속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3군 정치부 주임 허형식(许亨植)은 기치선명하게 조상지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항일반만불병제’(抗日反满不并提)는 오유적이고 중앙로선과 같지 않으며 왕명과 강생은 당중앙을 대표하지 못한다고 자기 견해를 내놓았다. 회의에 참가한 황성식도 조상지를 받들어 나섰다. 조선족지인 오옥광(吴玉光) 등과 위장괴(魏长魁), 우보합(于保合), 서문빈(徐文彬) 등도 조상지의 의견을 지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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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조상지의 의견은 회의의 주도적 의견을 이루었다. 10여일간의 쟁론을 거쳐 회의는 결의안을 형성하면서 총체적으로 ‘6.3지시편지’를 긍정하면서 ‘주하탕원련석회의’ 결의도 정확하다고 인정하였다. 하면서도 이번 회의는 투쟁의 불씨도 남겨 놓았는바 이제 뒤에서 계속 펼쳐보이게 된다.

1937년 12월에 중공북만림시성위 청년부장 황성식은 중공하강특위 서기 중책을 짊어졌다. 중공하강특위(中共下江特委)는 송화강 하류지구 항일운동과 항일무장을 지도하는 당의 기관으로서 1936년 9월 18일 주하탕원련석회의 결의에 의해 중공탕원중심현위를 개편하여 조직되면서 중공북만림시성위의 지도를 받았다.

중공하강특위는 하동(哈东), 상강(上江) 특위와 더불어 북만림시성위 산하 하나의 특위로 떠오르면서 특위아래에 가목사시위(佳木斯市委)와 탕원, 화천, 의란, 부금, 수빈(汤原、桦川、依兰、富锦、绥滨) 등 5개 현위를 두었다. 조선족인 황성식이 이같은 하강특위의 서기로 부임하였다는 것은 간단히 볼 일이 아니다.

황성식은 중공하강특위서기로 부임한 후 산하 가목사시 항일운동을 지도하다가 적들에게 발견되여 총상을 입게 되였다. 그러면 그 시절 가목사시 당조직 현실은 어떠할가, 이를 알자면 1928년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1928년 봄에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인 김지강(崔石泉, 즉 최용건), 리인근(본명 李云健, 별명 张世振) 두 동지가 리인근의 조카인 리영근 등과 함께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을 받고 탕원현 오동하에 와서 혁명활동을 벌리였다. 김지강과 리인근은 가목사지구에 나타난 최초의 중공당원으로 알려진다.

1929년 11월, 김지강 등의 지도하에 탕원현 학립북 7호툰(鹤立北7号屯, 오늘의 新华车站) 전문회의가 열리면서 리춘만을 서기로 하고 배치운(裴治云), 김성강(金成刚), 채평 등을 위원으로 하는 중공탕원현위가 조직되였다. 1931년 봄에 이르러 중공탕원현위는 중공탕원중심현위로 발전하면서 중심현위 산하에 압단하(鸭蛋河), 오동하(梧桐河), 대소고동(大小古洞), 흑금하(黑金河), 격절하(格节河), 고성강(古城岗), 반절하(半截河) 등 7개구위와 가목사(佳木斯), 삼성(三姓) 2개 특별지부를 두었다.

가목사시 당조직의 출현이다. 이에 앞서 리은거(李恩举), 리숙범(李淑范), 동선교(董仙桥), 리숙운(李淑云, 동숙운의 부인) 넷으로 중공당소조를 조직하고 동선교가 당소조장을 맡으니 이 당소조가 가목사시안의 첫 중공당조직으로 된다. 그후 이 당소조는 당지부로, 특별지부로 발전하는 과정을 거쳤다.

1936년 3월, 중공요하중심현위는 북만림시성위의 지도를 받는 중공하강특위로 재조직된 후 중공가목사특별지부와 화천현립 가목사중학 구위를 합병하여 중공가목사시위를 조직하였다. 가목사시위서기는 동선교가 맡고, 시위 산하에 30여명의 중공당원들이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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