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편단심 당과 나라를 위하여 싸운 관향응

2020-01-18 10:12:34

관향응은 본명이 관치상이고 자가 화정이며 만족이다. 1902년, 료녕성 금현 대관가툰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24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했고 그해 상해에 가 공산주의자가 창설한 상해대학에서 공부했으며 후에는 호소에 응하여 공산주의를 위해 분투하겠다는 뜻을 품고 이름을 관향응이라고 고쳤다.

관향응 렬사

청년시절 일본의 식민통치하에서 생활한 관향응은 망국노의 치욕을 뼈저리게 느꼈다. 정부의 부패, 민족의 굴욕은 그의 가슴 속에 심각한 상처를 남겼다. 1924년말, 쏘련에 공부하러 가기 전에 숙부에게 쓴 편지에서 관향응은 나라에 보답하고 혁명사업에 헌신하려는 자신의 웅대한 포부를 토로했다. 1925년 1월,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5.30운동이 폭발한 후 관향응은 명령을 받고 귀국하여 상해, 산동, 하남 등지에서 사업하면서 당지의 공산당과 사회주의청년단 조직을 회복하는 데 뛰여난 기여를 했다. 1932년 1월에 상악서혁명근거지에 가 중공중앙 상악서분국 위원, 상악서군사위원회 주석, 홍3군 정치위원을 맡았다. 1934년, 풍향계회의에서 관향응은 당시의 ‘좌’경 착오를 엄숙하게 비판하였다. 회의에서는 홍3군의 당조직과 정치기관을 회복하고 숙청을 중지하며 금동근거지를 건립하는 등 정확한 결의를 통과했다. 풍향계회의는 궁지에 처한 홍3군을 ‘좌’경 착오의 위험에서 구출하였고 하룡으로 하여금 중앙에서 파견한 정치위원을 진정으로 료해하게 하였다. 하룡과 관향응 두 사람은 서로 료해하며 장단점을 보완하고 상부상조하면서 우리 당, 우리 군의 력사에서, 고급간부들 사이에서 서로 진심으로 대하고 일치단결하며 장기적으로 합작하는 훌륭한 본보기를 창조했다.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관향응은 팔로군 120사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와 하룡 등 동지들은 120사의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동으로 황하를 건너 산서로 진입했다. 1937년 10월, 120사는 관향응과 하룡의 지휘하에 안문관에서 일본 자동차운수대를 매복습격하여 일본군의 두갈래 교통보급통로를 분쇄함으로써 적들의 진공을 지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일으켰다.

장기적인 군인생활, 간고한 전투생활과 긴장하고 복잡한 사업으로 피로가 쌓여 병환에 시달렸지만 관향응은 시련을 이겨내고 간고한 전쟁환경 속에서 필사적으로 사업했으며 중화민족의 해방사업을 위해 끊임없이 분투했다. 1946년 7월 21일, 관향응은 페결핵으로 연안에서 서거하였는데 그때 나이는 44살밖에 안되였다. 모택동은 추도사에서 “일편단심 당과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희생되였다.”고 썼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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