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하강특위 서기 황성식
귀엽고 여윈 체격이지만 남달리 약삭바른 남정책은 정기도는 두눈을 반짝이며 가타부타없이 물고기국을 잘도 마시였다. 황성식 등은 그러는 여덟살배기 남정책의 모습이 눈물겹기만 했다.

2020-01-19 08:57:47

황성식 관련 해방 전 가목사시 남강거리(南岗大街) 모습.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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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중공하강특위기관은 화천현 다무쿠(达木库), 오늘의 가목사시 교구 다래진 북성자(大来镇北城子) 부근에 설치되면서 하강특위 서기로 부임한 황성식은 특위기관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황성식은 특위기관을 떠나 가목사시위 사업지도에 나섰다가 적들에게 발견되여 총상을 입게 되였다.

황성식은 중공가목사시위 제1임 서기 동선교(董仙桥)의 집에 머물렀으나 상처가 비교적 중하여 지체할 수가 없었다. 적들의 주시가 심한 데서 빨리 가목사를 벗어나야 하였다. 중공당원인 동선교의 부인 리숙운은 황성식을 녀자로 분장시키고는 마차편으로 가목사를 벗어나게 하였다. 그길로 황성식은 항일련군 6군 1사 정치부 주임 서광해의 활동구역인 칠성라자(七星砬子)밀영ㅡ6군 1사 밀영으로  호송되였다.

서광해는 조선족동지였다. 6군 1사 정치부 주임이고 중공하강특위 위원인 서광해는 그때 항일련군 6군 1사의 밀영인 칠성라자밀영에 머물고 있었다. 칠성라자밀영은 오늘의 흑룡강성 쌍압산시 집현현 칠성삼림공원내에 위치하고 있다.

칠성라자밀영은 또 6군 1사 재봉대밀영이기도 하여 6군 1사 재봉대 녀전사인 황성식의 안해 김벽영도 이 밀영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황성식은 칠성라자의 6군 1사 밀영에서 안해 김벽영과 동지들의 극진한 치료를 받았지만 심산 속이여서 효과적인 치료방도를 댈 수가 없었다. 서광해는 황성식의 안전을 위해 다시 항일련군 제7군의 최석천에게 보내였다.

그 시절의 김지강ㅡ최석천(최용건)은 7군 당위 서기 겸 대리군장으로서 쏘련과 가까운 요하현의 폭마정자(暴马顶子)와 18쌍지(十八垧地)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때는 1937년 겨울이였다. 최석천은 전문 호송부대를 내여 황성식을 국경너머 쏘련땅에 가 치료를 받도록 하였다. 황성식의 안해인 김벽영은 남편의 치료과정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알려지는 자료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가목사시작가협회 회원이고 교원출신이고 항일련군 녀전사 연구가인 교화(乔桦)와의 2015년 5월 1일 통화에 따르면 김벽영과 황성식 사이의 딸이 지금 흑룡강성 의란현일대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니 김벽영의 결혼생활과 이왕지사가 적지 않게 알려지리라고 믿어마지않는다.

항일련군 녀전사 리민과 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 연구에 따르면 김벽영과 리민은 1938년 9월 28일 6군 1사로 전근한 것으로 알려진다. 실상 탕원현 오동하촌(梧桐河村) 출신인 리민(李敏,1924ㅡ)이 항일련군 6군부대에 참가한 것은 1936년 겨울의 일이고 그 후 인츰 배성춘을 재봉대 대장으로 하는 6군 재봉대 녀전사로 활동하게 되였다.

리민 관련 글들이거나 개별적인 회고문, 리민 회고록을 헤아리면 리민과 비슷한 또래 김벽영은 가장 미더운 친구로서 그와 더불어 1938년 9월 이전에 벌써 6군 재봉대 녀전사로 활동했음이 드러난다. 김벽영이 3군 재봉대에서 6군 1사로 넘어온 1사밀영은 오늘의 보청현 과회산(宝清县锅盔山)에 자리잡은 데서 과회요밀영이라고 한다.

황성식이 치료받았던, 6군 1사 재봉대밀영이 자리한 오늘의 쌍압산시 경내 칠성라자.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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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겨울 황성식은 쏘련땅에 가 치료를 받다가 항일련군 제7군부대로 돌아오게 되였다. 너무나 짧은 시간은 아니라고 하는데 쏘련땅에서 얼마나 머무르고 어디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귀국한 후 찾은 항일련군부대가 7군이니, 7군부대에서는 강국신 퇀장 등 소부대를 파견하여 황성식을 오늘의 부금시(富锦市) 경내에 자리잡은 완달산 ‘청산로도묘(青山老道庙)’에 호송하게 하였다. 그 목적은 황성식을 북만의 하강지구로 다시 돌려보내여 계속 하강특위 서기직무에 나서도록 하기 위함이였다.

청산로도묘는 완달산의 한 산허리에 세워진 자그마한 절인데 황성식은 이 절에서 6군 1사 대리사장 진소빈(陈绍宾) 등 일행과 함께 한동안 지내게 되였다. 그럴 때 6군 4사 정치부 주임 오옥광과 그의 소부대가 한밤중에 청산로도묘에 나타나 황성식은 잠간이나마 오옥광과 같이 어울리게 될 기회를 가지였다. 오옥광은 누구일가? 이를 알자면 오옥광을 대략적으로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오옥광(吴玉光, 1909ㅡ1938)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庆尚北道义城郡安平面) 출신이고 9살 때 길림성 화전현 대영구(桦甸县大荣沟)로, 1930년 겨울에 일가족과 함께 다시 라북현으로 옮겼다. 1933년말에는 탕원항일유격대에 참가하니 1934년 가을 오옥광 소속 탕원항일유격대(탕원민중반일유격대)는 탕원민중반일유격총대로 개편되였다.

1935년 12월 중순경에 오옥광 소속 탕원민중반일유격총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6군으로 개편되였다. 오옥광은 6군 산하 제4퇀 정치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936년 9월에 6군이 동북항일련군 제6군으로 재편성되면서 오옥광은 제4사 정치부 주임으로 승격하였다.

1938년 이후 동북의 항일련군투쟁은 가장 험악한 시기에 들어섰다. 일제놈들이 ‘집단부락’ 정책을 강행하면서 항일련군부대와 지방군중들간의 련계를 차단한 데서 항일련군부대장병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탄알이 고갈되여갔다. 극도의 기아충격 속에서 얼어 죽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전투 희생자들보다 더 많은편이였다.

이처럼 험악한 환경에서 투쟁을 견지하던 오옥광은 1938년 12월의 어느날 밤,  사나운 북풍이 대지를 강타하는 악천후 속에서 한패의 소부대를 거느리고 오늘의 부금시(富锦市) 경내에 자리잡은 완달산 ‘청산로도묘’(青山老道庙)에 이르렀다. 청산로도묘는 우와 같이 10여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그마한 절이다. 먼저 도착한 일부 항일련군의 장병들이 류숙하고 있어서 오옥광과 그의 소부대는 바깥에서 우등불을 피우고 숙영하여야 하였다.

날이 밝으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이곳 청산로도묘 절당의 구들 우에는 중공하강특위 서기 황성식과 사장이라는 진소빈(陈绍宾, 후에 반변)을 비롯하여 7군의 녀전사 김철(金哲)과 그의 여덟살배기 아들 남정책(南征策), 7군 강국신(姜国臣) 퇀장과 그의 안해 류숙청(刘淑清), 7군 녀전사 류명옥(柳明玉), 부상병 리패장과 간호원 그리고 50여세에 나는 류씨(刘四爷) 등 7~8명이 모여있었고 바닥에는 가로세로 10여명이 비좁게 자리하고 있었다.

항일련군 6군 1사 정치부 주임 서광해.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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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로도묘는 산중턱에 일어섰고 산아래에 실개천을 방불케 하는 작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겨울이여서 강물은 꽁꽁 얼어붙었다지만 강가에는 돌로 쌓은 부뚜막 하나가 보이였다. 날이 밝아오자 청산로도묘에서 류숙하던 전사 몇몇은 황성식의 지시로 강가로 내려갔다가 부뚜막 쓰레기더미에서 당지 사람들이 지난 가을 먹다 버린 고기대가리와 고기꼬리들을 주어왔다.

부대는 식량이 진작 동강난 터라 6군 1사의 묘사무장은 별수 없이 전사들이 가져온 먹거리를 가마에 넣고 끓이였다. 로도묘 안은 비리고 더러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묘사무장이 냄새를 없앤다며 소금을 집어넣었지만 그상이 장상이였다. 그래도 물고기국이라고 한 사람에게 한사발씩 돌리였다. 어떤 전사는 자기에게 차례진 물고기국을 먹고 와락 토하기까지 하였다.

불쌍한 것은 1사 녀전사 김철(金哲)의 8살배기 아들 남정책(南征策)이다. 어린 남정책은 어른들 속에 끼이여 비린내가 풍기는 물고기국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귀엽고 여윈 체격이지만 남달리 약삭바른 남정책은 정기도는 두 눈을 반짝이며 가타부타 없이 잘도 마시였다. 황성식 등은 그러는 남정책의 모습이 눈물겹기만 했다.

한창 신나게 뛰놀며 소꿉놀이를 즐길 나이, 엄혹한 산속생활은 8살배기 어린애도 피해갈 수 없었으니 어머니를 따라 산에 오른 남정책은 언녕 이 같은 부대생활에 적응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남정책과 그의 어머니 김철에 대하여 알려지는 자료가 보이지 않으나 여러 자료들을 모아보면 김철 녀전사는 탕원현사람으로 초점이 모아진다.

유일하게 알려지는 자료라면 김철의 남편이 남씨이고 지금의 7군 대리군장 최석천(崔石泉)과 함께 일찍 탕원현의 복흥툰에 세웠던 송동모범학교(松东模范学校)의 교원으로서 후일 항일련군 7군에서 활동하다가 희생되였다는 것이 전부이니 김철 녀전사로 말할진대 십중팔구는 탕원현사람으로 헤아려진다. 황성식은 김철 녀전사가 누구인가를 잘 알고 있으련만 그들이 모두 희생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여서 그 이상 더 알 수가 없다.

탕원현 송동모범학교는 최석천의 이 지구 활동과 관계된다. 운남강무당 졸업생이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인 최석천은 1927년 12월 광주봉기 후 당조직의 파견으로 동북으로 진출하여 선참 요하지구에서 활동하다가 1928년 초여름 교원신분으로 탕원현 오동하 복흥툰(汤原县梧桐河福兴屯)에 나타났다. 송동모범학교의 설립은 이 시절의 산물이다.

김철의 남편 남씨는 그때 그 시절에 최석천과 함께 송동모범학교를 꾸리였다고 하니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다. 송동모범학교는 당지 사람들에게 반제반봉건교육, 사회주의사상을 선전하는 혁명의 요람이였으니 배치운(裴治云), 김성강(金成刚, 녀) 등 많고 많은 북만의 쟁쟁한 조선인혁명가들이 이 학교 출신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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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조선인혁명가들 거개가 송동모범학교에서 1930년 이후 꾸린 두기 군정간부양성반 140여명 동지들 가운데 속했으니 남씨는 그들 가운데서도 주요한 인물로 알려진다. 그런 남편을 둔 김철도 그 시절부터 벌써 남편과 함께 혁명의 장도에 오른 녀성혁명가였다.

1931년 9.18사변 이후 탕원현 송동모범학교에서 꾸린 군정간부양성반 학원들을 토대로 특무대가 나오게 되고 그 후 이 특무대가 최석천을 대장으로 하는 요하농공의용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항일의 고조 속에서 요하농공의용군은 다시 선후하여 요하민중반일유격대대,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4퇀,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2사, 동북항일련군 제7군으로의 발전 과정을 보인다.

김철의 남편 남씨는 최석천을 주장으로 하는 특무대로부터 항일련군 제7군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가담하게 됐고 김철도 남편을 따라 지방의 한 녀성혁명가로부터 항일련군의 녀전사로 뛰게 되였다. 그들의 어린 아들도 자연히 따르게 되였다.

김철 녀전사와 같은 이런 현상은 북만에서 활동한 항일련근의 녀전사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였다. 어느 때, 어떤 전투인지는 몰라도 남편 남씨가 희생된 후에는 김철 녀전사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북만의 산과 들을 넘나들어야 했다.

그러다가 오늘의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바로 1938년 12월 엄한 속 그 시절 보흥현 경내 산속 청산로도묘의 이들 모자의 모습이다. 황성식은 잠시나마 청산로도묘에서 그네들과 같이 지내면서 어린 남정책을 보면서 몇번이고 주먹을 부르쥐였으리라!

화제는 다시 그날 아침 물고기국으로 돌아간다.

말이 식사지만 이른바 물고기국을 마신 후 6군 1사 사장 진소빈과 1사 3퇀 퇀장 백복후(白福厚), 6군 4사 정치부 주임 오옥광,  원 6군 3사 정치부 주임 주운봉(周云峰, 후에 반변) 등은 하강특위서기 황성식(下江特委书记黄成植, 조선족) 등의 사회하에 회의를 가지였다.

회의에서 오옥광이 먼저 바로 얼마전 11월 23일 6군 1사 정치부 주임 서광해와 원 6군 재봉대 대장 배성춘이 한차례 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된 경과를 말하였다. 회의는 이어 지금 부대의 이후 행동문제를 토의하였는데 나중에 오옥광이 그의 군정강습소 시절의 선생인 7군 군장 최석천(최용건)을  찾아 련합행동문제를 토의한 다음 돌아와서 다시 부대의 행동방향을 결정짓기로 하였다.

다음날 오옥광의 일행은 황성식 등의 배웅을 받으며 청산로도묘를 떠났다. 7군의 강국신(姜国臣) 퇀장과 경위원이 길을 안내하고 오옥광과 장퇀장이 각기 경위원을 동행하고 나섰다. 이들 일행 8명 대오 속에는 7군 부대로 돌아가야 할 7군 녀전사 김철과 그의 아들애가 섞이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을씨년스러운 오후, 적절히 말하면 서북풍이 모질게 몰아치는 매서운 날씨인데 며칠 전 오옥광을 따라 떠난 강국신 퇀장이 경위원을 데리고 청산로도묘에 들어섰다. 사람들의 눈길은 모두 강퇀장에게 쏠렸지만 강퇀장은 한식경이 지나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뒤늦게 입을 연 강퇀장은 오옥광 4사 정치부주임과 장퇀장, 두 경위원, 김철과 그의 어린 아들애 남정책 6명 모두가 전부 희생되였다는 비분에 찬 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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