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전선사업가 차요선

2020-01-20 08:51:03

사천성 성도시 대읍현 열래진에는 차요선의 높이 솟은 장엄한 조각상이 세워져있다. 차요선 렬사의 헌신적으로 혁명한 휘황한 로정과 후대들에게 남겨준 ‘겸허’, ‘검소’, ‘로동’의 유훈은 그의 고향에서 널리 전해지고 있다.

1894년에 대읍현에서 태여난 차요선은 소년시기에 한 상가에서 견습공으로 일하다가 1912년 사천군벌부대에 가입하였다. 1926년 12월 사천군벌 류상의 부대가 국민혁명군 제21군으로 개편되여 많은 공산당원들이 류상의 부대에서 사업했으며 이때로부터 차요선은 공산주의를 접촉하기 시작했다. 1927년 3월 류상과 장개석은 공산주의자들과 혁명군중을 잔혹하게 살해한 ‘3.31참안’을 빚어냈다. 이에 분노한 차요선은 결연히 사천군벌부대를 떠났다.

차요선 렬사

1929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차요선은 천서특위 군사위원회 위원직을 맡았고 자기가 경영하고 있는 ‘노력찬’ 술집을 통일전선 사업을 엄호하는 데 리용하였다. 1930년 차요선은 ‘광한폭동’에 참가하였으며 그 후 장기적으로 성도에서 지하사업에 종사하였다.

9.18사변이 폭발한 후 차요선은 항일구국운동에 적극 뛰여들어 륙속 성도의 ‘국어연구사’ 등 사회단체 가운데 대량의 지식인들을 단합시켰다.1936년 10월, 차요선은 성도의 40여개 사회단체와 련합하여 성도 각계 구국련합회를 설립하고 성도 춘희로에서 300여명이 참가한 설립대회를 소집하였다.

항전기간에 차요선은 선후하여《대성주간》, 《개진》 등 여러가지 신문, 잡지를 창간하였는데 그중 《대성주간》은 사천항일구국 간행물 가운데서 독자가 가장 많고 영향력이 가장 큰 진보적인 간행물의 하나로 되였다. 1939년 4월, 차요선은 중국-쏘련 문화협회 성도분회를 발의하고 설립하여 진보 력량을 광범위하게 단결시켰다.

차요선은 줄곧 중공천강특위 서기 라세문과 단선련락를 유지하면서 그가 사천 지방세력의 상층 인물 가운데서 사업을 전개하도록 협조해주었으며 통일전선의 ‘전선장’으로 불리웠다. 1940년 3월, 국민당은 성도에서 ‘쌀소동사건’을 일으키고 그 죄를 공산당에게 전가시켰으며 차요선과 라세문은 동시에 체포되여 귀주 식봉감옥에 수감되였다.

감옥에서 차요선은 국민당의 높은 관직과 후한 봉록에 유혹되지 않고 혹독한 고문도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옥중에서 전우들과 함께 적들과 투쟁했다. 1941년 3월, 차요선과 라세문은 한자동, 허요헌 등과 함께 옥중에서 비밀리에 당지부를 건립하고 옥중에서 적들과의 투쟁을 위해 조직적 보장을 마련했다.

1946년 국민당은 전면적 내전을 발동하였고 그해 7월에 차요선 등은 중경 사재동감옥에 압송되였다. 8월 18일 차요선, 라세문 두 사람은 비밀리에 살해되였다.

“인민을 위한 무한한 사업에 투신하여 세계가 대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나는 선혈을 대지에 바쳐 신주의 영원한 태평을 바꾸기를 원한다.”이는 차요선이 입당시에 쓴 한수의 시이다. 그는 생명으로 자신의 선언을 실현했다. 새 중국 창건 후 인민정부는 라세문과 차요선을 위해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고 주은래 총리가 직접 그들의 묘비에 비문을 써주었다.

옥중에서 차요선은 후대들에게 ‘근면’,‘검소’,‘로동’을 립신의 근본으로 삼고 부족점을 보충하며 ‘교만’,‘사치’,‘안일’을 평생의 훈계로 삼으며 건전한 국민으로 되여야 한다는 유훈을 남겼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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