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하강특위 서기 황성식

2020-02-08 09:48:38

9

강국신 퇀장의 말에 따르면 그들 일행 8명은 먼저 요하현 경내의 원 주둔지 십팔상지(18垧地)를 찾았지만 부대의 행적은 오리무중이였다. 그들은 다시 7군의 장병들로부터 7군의 요람으로 불리우는 요하 폭마정자(暴马顶子)밀영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한무리 절대적으로 우세한 적들과 맞띄웠다. 오옥광은 동지들을 이끌어 적들과 생사판가리 전투를 벌리였지만 오옥광, 김철 등 6명은 중과부적으로 적들과의 격전에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였다. 강국신 퇀장과 그의 경위원만이 가까스로 혈로를 헤치고 나왔을  뿐이다.

청산로도묘의 이야기는 모두 그날의 항일련군 녀전사 리민의 회고록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중공하강특위 서기 황성식은 다시 비분의 두 주먹을 불끈 쥐였다.

황성식은 알고 있었다. 항일련군의 사급 장령 오옥광의 안해이고 항일련군 6군 재봉대 주임인 리계란은 1938년 3월 15일 한차례 전투에서 불행히 체포되여 옥중에서 적들과 싸우는 몸이였다, 오옥광이 얼마나 사랑하는 안해를 만나고 싶었고 구출하고도 싶었을가, 그 얼마나 부부 만남의 시각을 그리였을가. 그러던 오옥광이 그리도 총총히 떠나갔으니 그때 오옥광은 만 29살, 가혹한 전투환경에서 오옥광은 시체도 남기지 못하였다.

보흥현 경내 산속 청산로도묘는 더는 지체할 곳이 못되였다. 적들이 수시로 들이닥칠 수 있는 형편에서 황성식 등은 청산로도묘를 떠나기로 하였다. 그렇게 허허 산속에서 풍찬로숙하면서 이틀간을 지탱하니 먹을 것도 없고 움직일 힘도 없었다. 그때 진소빈 사장에게 말 한필이 있었다. 사람들도 쌀 한알 구경하지 못하며 허기진 배를 달래는 현실에서 말도 례외가 아니였다.

항일련군 녀전사 리민의 생전회고를 보기로 하자.

앙상하게 여윈 말은 걷기도 어려워 중기관총 하나도 바로 멜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어찌할 수 없는 진퇴량난의 시각이였다. 백복후 퇀장은 애지중지하는 말이라고 해도 잡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진소빈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리민은 그때 산속의 항일련군 장병들은 100여명이였다고 말한다. 어디에서 생겨난 100여명인지는 오리무중이다. 아마도 청산로도묘 주변 산속에 있던 진소빈 대리사장의 6군 1사 한갈래 부대인 것 같다.

말을 잡아 100여명에게 돌리니 가련할 손 사람당 작은 한쪼각. 말의 내장과 살점이 많은 부분은 부상병들에게 돌리였다. 말고기를 다 분배하니 몇몇 녀전사들과 사무장, 군수관 등은 차례지는 몫조차 없다. 후에 묘사무장이 녀전사들에게 사람당 닭알 만큼 크기의 고기점을 넘겨주면서 이 고기는 뼈가 없는 고기요, 좋은 부분이라고 한다.

이젠 말의 네 발굽밖에 남지 않았다. 조군수관과 묘사무장, 등사무장, 경위원 넷이 하나씩 받아안았다. 그들은 말발굽을 불에 굽다가도 끓는 물에 넣기도 하면서 너무도 아까워 허기증을 이기지 못할 때면 군도로 조금씩 베여 맛을 보았다. 다른 장병들도 돌 세개를 받쳐놓고 세수대야에 눈을 퍼넣고 끓이다가는 채 익기도 전에 건지여 저저마다의 소금주머니에 넣어 아끼고 또 아끼며 허기를 달래였다.


10

산속 로숙의 밤이 흘러갔다. 이튿날 이른아침, 6군 1사 재봉대 대장 박영선과 리민이 산속의 얼지 않은 시내물에서 세수를 하려는데 희미한 저쪽 멀리서 몇개의 검은 점이 어른거린다. 그들 둘이 급히 돌아가 백퇀장에게 알리고 백퇀장이 소속부대를 점검하라고 하니 총패장(丛排长)과 리반장, 한명의 전사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 셋은 심산밀림 속 설한풍과 허기를 달래다 못해 가만히 달아나는 길이였다. 항일련군 전사들은 너나없이 분개를 느끼면서 가서 붙들어 오자고 떠들었다. 허나 깊은 눈에 눈보라 속에 그들 셋을 돌려세운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때 황성식 서기가 말을 던지였다.

“갈 테면 가라지요. 그들은 가을의 락엽이니 떨어짐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높은 산 우의 청송이니 하늘이 무너져도 받들 수가 있지요!”

의미심장한 황성식 서기의 말, 그 말을 듣는 항일련군 장병들 얼굴마다에는 굳은 결의가 흘러넘치였다.

1939년 음력설이 며칠 남지 않았다. 부대는 서로의 만남을 기약하면서 두갈래로 갈라졌다.

한갈래는 황성식 일행. 그들 속에는 강국신 퇀장, 주운봉 주임, 묘사무장, 키다리 부상병 리패장, 불질을 잘한다고 황포(黄炮)라고 불리우는 부상병 황룡길, 역시 리포(李炮)로 불리우는 키 작은 리패장, 항일련군 전사들인 온동무, 류동무, 류쓰예(刘四爷) 그리고 녀전사들인 박영선, 류명옥, 류숙청, 후날의 리민 등이 섞이였다. 다른 한갈래는 전투력을 가진 진소빈 사장과 백복후 퇀장이 거느린 주력부대, 그네들은 동남쪽 완달산을 바라고 떠났다.

황성식 일행 10여명은 눈보라 치는 산속에서 하나 또 하나의 산을 넘으며 하루낮 하루밤의 간난신고 끝에 탕원현 경내 항일련군 제6군 1사의 재봉대밀영에 이르렀다. 그간 재봉대밀영은 적들의 파괴를 당하였다지만 귀틀집 벽들이 그대로 남아있은 덕분에 수리하고 들 수가 있었다. 때는 1939년 음력설을 이틀 앞둔 시점이였다.

제6군 제1사 재봉대밀영에서 부대의 나어린 항일련군 녀전사 리민(1924년생)은 6군 부대의 제1사 후근처 처장으로 활동하던 아버지 리석원(李石远)이 이해 1938년 8월 식량운반 도중 적들을 만나 조부관 등과 함께 불행히 희생되였다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되였다. 이 뜻하지 않은 소식은 리민과 동지들을 격분에 떨게 하였다.

그때 황성식이 일어서며 말을 떼였다.

“동지들, 내가 쏘련에서 치료를 받을 때 그곳의 신문들에서 우리의 모택동 주석과 주총사령이 소속 홍군대오를 열하 쪽으로 보낸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홍군대오는 열하를 거쳐 심양으로 진격하며 중국에서 일제놈들을 몰아낼 것입니다. 항전승리의 그날은 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음력 12월 30일입니다. 비통을 힘으로 바꾸고저 나는 <봉화 끝나는 날 고향에 돌아가리>란 노래를 지었습니다. 지금 이 노래를 배워드리겠습니다.”


11

황성식은 리듬감 있게 박자를 치면서 한구절 한구절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 노래가사는 이러하다.


대설산아 천리에 미치고 용사들아 로숙하누나

눈 속에 풍찬하면서 우등불로 몸을 덥히니

서로 뭉치며 송구영신하누나

에헤 에헤요 송구영신하누나


서정인들이여 전전하누나 싸움터로 돌격하누나

야초로 기아 이기고 나무껍질로 추위 막아도

구국일념으로 달갑구나

에헤 에헤요 구국일념으로 달갑구나


용사들아 높은 산에 올라 고향을 바라보자

고향 바라보니 연기로 덮였구나

송화강 물 마시고 흑룡강 마시누나

에헤 에헤요 남아의 마음속 복수로 넘치누나


용사들아 구름 타자 싸움터를 들부시자

싸움터를 들부시며 기개 높으니

중화 광복의 붉은기 휘날리누나

에헤 에헤요 언제 봉화 멈추면 언제 환고향하리


가사는 눈 속에서 풍찬로숙하면서 1939년 새해를 맞는 항일련군 전사들을 장면화하고 있다. 모진 기아와 강추위 속에서도 구국일념으로 불타면서 고향을 그리는 그네들, 광복이 되는 날 고향에 돌아가리라는 그들이 돋보이기만 한다. 항일련군 그네들은 이같이 일제침략자들과 싸우는 강철의 대오였다. 노래는 가사부터 가슴을 울리여 서로 앞다투어 배우면서 광복의 그날을 그리여보았다.

그때를 두고 리민은 아래와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때의 항전가곡은 정신적 식량이여서 매번 새로운 노래가 있을 때면 동지들은 앞다투어 배웠다. 노래소리는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배우면서 ‘아버지, 보증코 전우들과 더불어 중화를 광복하며 붉은기가 휘날리게 하겠습니다. 봉화가 끝나 고향에 돌아가는 그날이면 딸은 당신의 영령에 제를 올리겠습니다.’라고 했다.”

한수 또 한수 항전노래의 전투적 고무와 힘이였다. 황성식은 이같이 한수 또 한수의 노래를 지어 보급하면서 전우들을 항일의 싸움터에로 불렀다.

또 한번은 이들 대오가 한 탄광로동자 집거구에서 항일구국 선전을 벌릴 때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탄광로동자들 얼굴에 두려움의 기색이 떠오를 때 황성식은 “무서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대부대가 지금 일본군 토벌대를 쓰러눕히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다같이 <전 동북로농병학은 련합하라>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다. 그리곤 손수 두손으로 박자를 쳐가며 노래지휘에 몰두하였다. 탄광로동자들은 노래정서 속에 빠져들면서 바깥의 총소리를 잊어버렸다.

이들 대오 속에 리민이 있었다. 리민의 회고에 따르면 노래가 끝나자 황성식은 “광부 여러분, 우리는 모두 중국사람입니다. 자그마한 일본이 우리를 억압하면서 사람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망국노로 돼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눈을 펀히 뜨고 우리 강산이 자그마한 일본한테 짓밟히는 것을 보고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황성식의 피끓는 말에 광부들은 안된다고 소리쳤다. 그 시원한 대답에 황성식은 우리 모두가 뭉치여 일본침략자를 중국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였다. 이어 우리 동지들이 또 <9.18사변> 등 항일가요를 힘차게 부르자 광부들은 “종래로 이런 노래를 듣지 못했고 이런 군대를 보지 못하였다.”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한편으로 항일련군에 참가하여 원쑤와 싸우러 가겠다며 너도나도 나섰다. 때는 1939년 정월 16일의 일이였다.


12

1938년 1월, 조상지가 쏘련측의 초청으로 쏘련행에 올랐다가 상상외로 쏘련측에서 북만성위 대표를 초청한 사실을 부인하면서 심사를 빌미로 조상지를 1년 남짓히 가두어놓은 사건이 빚어졌다. 그사이 북만의 항일련군부대에서는 이른바 조상지를 정조준하는 당내 반경향투쟁을 벌리였다.

1938년 4월 하순 중공북만림시성위는 제7차 상무위원회 회의를 가지고 ‘6.3지시편지’는 위대하고 정확하며 주하탕원련석회의는 ‘반당’, ‘좌경관문주의’ 로선을 집행하였다고 인정하였다. 그 실질은 ‘반레닌주의, 반당, 반조직, 반중앙’으로서 조상지를 ‘좌’경 관문주의로선의 주요 책임자로 몰아갔다.

중공북만림시성위는 이해 1938년 6월에 통하에서 중공북만림시성위 제8차 상무위원회 회의를 가지고 이른바 ‘좌’경 관문주의로선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조직적 처리를 실시하였다. 조상지는 항일련군 제3군 군장 등 일련의 직무를 해임당하고 3군 정치부 주임 허형식은 ‘좌’경 관문주의로선의 적극적인 옹호자로서 역시 직무에서 해임되였다.

이같이 북만 당내 반경향투쟁은 조상지가 없는 사이 강경하게 번져지면서 항일련군 제3군과 제6군을 중심으로 하는 북만 당, 정, 군의 허다한 동지들이 ‘잔혹한 투쟁, 무자비한 타격’을 받으면서 조상지를 지지하는 적지 않은 동지들이 대대적으로 처리되여갔다. 동북항일련군 제3군 군장이고 중공북만림시성위 집행주석인 조상지는 하루밤 사이 반당분자로 몰리니 북만 당내는 거대한 혼란이 빚어지면서 허다한 동지들이 종잡을 바를 몰랐다.

이때 회의에 참가한 중공하강특위 서기 황성식은 두려움 없이 북만림시성위에 편지를 썼다. 그는 편지에서 조상지 동지는 비록 결함이 있고 오유가 있지만 한 몽둥이로 때려눕히는 엄격한 처분은 취할 바가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도 허다한 결함이 있다면서 조상지가 없는 사이 벌리는 일은 기회주의로선이라고 찍어 말하였다. 결과 황성식도 조상지 켠으로 몰려 직무를 해임당하였다.

그 후의 황성식에 대해 필자는 잘 모른다. 안다면 어디에선가 일본토벌대를 만나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는 것 뿐이다. 희생될 때의 자료도 보이지 않으나 시간은 1939년 6월로 알려진다. 황성식의 안해 김벽영은 장옥춘, 김봉숙, 심영신 등 3명의 녀전사와 함께 1938년 11월 23일 보청현 장가요(张家窑)전투에서 불행히 체포된 후 적들과 굴강하게 싸웠고 나중에 적들에 의해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어떤 자료는 북만의 남차감옥(南岔监狱)에 투옥되였다가 옥중에서 빛나는 생을 마감지었다고 하기도 한다. 당년 항일련군 녀전사 리계란의 딸이고 항일련군 연구가인 류영은 지난해 10월초 위해 석도에서 필자와 만나 김벽영, 장옥춘, 김봉숙, 심영신 등의 최후는 베일에 가려져 알 수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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