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비숙청 전설의 영웅 양자영

2020-02-10 12:46:56

新华社照片,北京,2019年4月19日    杨子荣:甘洒热血写春秋这是杨子荣像。    (配本社同题文字稿)新华社发

한권의 소설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알게 되였고 하나의 경극으로 그의 명성을 온 누리에 떨치게 되였다. 참군으로부터 희생되기까지 양자영은 짧디짧은 520일 동안 하나의 찬란한 류성과도 같은 영웅적 서사시를 엮었다.

양자영의 이름은 양종귀이고 자는 자영이며 1917년 3월 3일 산동 연태 모평현 우갑하촌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13살 때 부모를 따라 산해관을 넘어 안동(오늘의 단동)일대에 자리잡았다. 아버지가 타향에서 병으로 사망한 후 양자영은 홀몸으로 사처로 다니며 생계를 유지했으며 선후하여 압록강에서 사공으로 일하였고 안산, 료양 일대에서 광부로 일하였기에 동북의 ‘삼교구류’, 풍속, 동업조직, 은어 등에 대해 어느 정도 료해가 있었기에 이와 같은 생활경력은 그가 후에 토비숙청 투쟁에서의 정찰행동에 아주 큰 도움이 되였다.1943년 봄, 일본 십장의 압박에 반항하여 그는 할 수 없이 산동의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1945년 9월, 양자영은 팔로군에 가입하여 교동군구 해군지대 제5중대 취사반에서 취사원으로 있었다. 그해 10월에 부대를 따라 동북으로 가 목단강군구 제2퇀 제7련에 편입되였다.그는 1946년 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3월 그는 제7련 제1반 반장을 맡았다. 그 후 얼마 안되여 목단강군구는 토비숙청 행동을 전개하였다.이번 행동에서 양자영은 홀몸으로 토비들이 도사리고 있는 행수저촌에 들어가  토비두목과 교묘하게 공방전을 벌리여 총 한방도 쏘지 않고 토비 400여명을 항복시켰고 기관총 10자루, 화포 3문, 척탄동 8구, 장총, 권총 300여자루와 대량의 탄약을 로획하였다. 전투에서의 뛰여난 표현으로 그는 영예롭게 특득공을 세웠고 퇀부로부터 전투영웅으로 평의되였다.얼마 안되여 퇀부에 전근하여 정찰반 반장직을 맡았으며 후에는 정찰패 패장으로 승진되였다.

1947년 1월 하순 퇀부는 토비두목 ‘독수리’가 해림현 경내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단서를 장악했다. ‘독수리’의 본명은 장악산으로서 15살에 산속에 들어가 토비가 되였고 18살에 토비두목으로 되였으며 교활하고도 궤계가 많았고 로련하고 계획이 용의주도하였다. 동북민주련군이 목단강지역에 진주한 후 이 토비들에 대하여 여러차례 포위토벌을 진행하여 대부분의 인마를 소멸하였기에 ‘독수리’신변에는 20, 30명의 측근들만 남았다. 양자영은 용감하게 자진하여 5명의 전사를 거느리고 토비 오삼호의 잔여부대로 변장하여 정찰에 나섰다. 그들은 쟈피거우 부근의 밀림에 도착한 후 ‘독수리’의 밀정과 교묘하게 접촉하여 은어로 련락한 후 토비들의 신임을 얻어  토비소굴에 잠입했다. 2월 7일, ‘독수리’와 그의 련락부장 류조성, 비서관 리의당 등 25명의 토비를 전부 생포하여 토비토벌 전투에서 적은 병사로 많은 토비를 전승한 모범적인 사례를 창조하였다.

2월 23일, 정환장, 정삼포 등  토비두목 추격소탕 전투에서 양자영은 맨 앞장에서 돌격했다. 양자영의 총기 격발기가 혹한에 얼어붙어 당기지 못한 원인으로 토비의 총탄이 양자영의 흉부를 명중하여 영용하게 희생되였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30살이였다.

양자영의 영웅사적을 표창하기 위해 동북군구 사령부는 양자영에게 ‘특급정찰영웅’ 영예칭호를 수여하였고 그의 생전 소속패를 ‘양자영패’로 명명하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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