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당 관리에서 공산주의 전사로 성장한 장겸광

2020-02-13 10:49:17

청명절이 되면 혁명렬사 장겸광의 고향인 무한시 신주구의 간부와 군중들은 자발적으로 혁명렬사기념원을 찾아와 렬사기념비에 화환을 드리고 렬사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장겸광은 1908년 호북성 신주현 소가교 부근의 장북남촌에서 태여났다. 어릴 적에 부모를 따라 무한에 왔고 부친이 사망한 후 홀로 무한에 남아 힘들게 살면서 근근히 생계를 유지했다. 1919년 중학교에 들어간 그는 과외시간에는 잡일을 찾아했고 휴식날에는 운반공으로 일했다. 장겸광은 일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무창 중화대학 교육학부에 입학했다. 1934년 대야현정부 교육감독관을 맡았고 2년 후 응성현정부 교육감독관으로 부임되였다.

1937년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적후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고 항일근거지를 세우기 위해 중국공산당은 동필무, 도주 등을 응성현 당지에 파견하여 호북성 농촌합작사업 지도원 양성훈련반을 개설했다. 얼마 후 국민당은 장겸광을 파견해 양성훈련반 활동을 감시하게 하였다. 도주 등 공산주의자들의 수업을 방청하면서 장겸광의 사상에는 심각한 변화가 발생했고 중국공산당의 중국 항일전쟁과 중국혁명에 관한 정확한 주장을 접수하기 시작했으며 중국공산당조직에 적극적으로 접근했다. 도주 등 사람들의 방조하에 장겸광은 정치적으로 양성훈련반의 활동을 엄호하면서 또 청년들이 양성훈련반에 가서 학습하도록 조직, 동원하고 항일선전대를 조직, 건설했으며 농촌에 심입해 항일구국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1938년말, 장겸광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9년 봄, 장겸광은 응서현항일동원위원회 주임위원을 맡았다. 간고한 과정을 거쳐 응성현 제1구 항일민주정권이 설립되였고 장겸광이 구장을 맡았다. 1940년 봄, 중공응성현위가 설립되였고 장겸광이 현위 위원 겸 정권부 부장으로 당선되였다. 1940년 3월, 중공응성현위는 제1차 당원대표대회를 소집하였고 장겸광이 현위 서기로 당선되였고 후에는 현장을 겸임했다. 항일전쟁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장겸광은 응성지구의 항일투쟁을 령도하는 중임을 전적으로 짊어지고 악예변구를 건설, 공고히 하는 경제물자와 인원보충을 제공했으며 응성지구의 항일투쟁을 위해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44년 8월, 장겸광은 양북 전문요원으로 부임되였고 1945년 3월에는 악중 전문요원으로 부임되였으며 후에는 중공양북지방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1946년 6월, 국민당이 전면적인 내전을 발동하고 중원해방구를 포위공격하자 장겸광은 중공중앙의 포치에 따라 포위돌파를 실시했다. 그는 남아서 계속 투쟁을 견지하겠다고 주동적으로 요구하였으며 흥산지방위원회 서기 겸 제2군분구 정위를 맡고 악중 잔류부대를 거느리고 무당산지역을 전전하면서 몇배나 더 많은 국민당군대가 해방지역을 진공하지 못하도록 유력하게 저지시켰다. 1947년 2월 26일, 흥산현 평수하 일대에서 장겸광의 소속부대는 적들의 겹겹한 포위를 당했으며 치렬한 싸움에서 장겸광은 부상을 당하여 포로되였다. 적들은 백방으로 회유하고 위협하였지만 장겸광은 굴복하지 않고 영용하게 희생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39살이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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