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랑촌당지부 서기 리명배 이야기
리명배는 어랑촌바닥에서 동지들 포위돌파를 이끌며 보초를 서며 돌아치다가 미처 빠질 수가 없어서 서쪽산 감자굴에 숨었는데 적들 수색에 걸리였다.

2020-02-24 09:06:30

어랑촌 북산기슭에서 보는 오늘의 어랑촌과 어랑벌의 한 모습. 이 고장은 일찍 리명배 등 항일혁명가들이 싸우던 성스런 고장이다. (2019년 9월 18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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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시 서성진소재지에서 10여킬로메터가량 떨어진 어랑촌은 100년 전만 해도 수풀이 우거진 한적한 고장이였다. 그 후 조선의 어랑과 무산 등지에서 조선이주민들이 한세대, 두세대 밀려들면서부터 봉밀하를 사이두고 어랑촌과 무산촌 두 마을이 생겨났다. 이 두 마을을 토대로 여러 골골마다 누에골이요, 왈리거우요하는 마을들이 새로 일어섰다. 20세기초 이후부터 어랑촌과 무산촌 두 마을만 해도 100여세대에 수백명의 인구를 가진 제법 큰 동네로 변하였다. 1912년 어느 날 어랑촌의 한 리씨네 집에는 “응아ㅡ” 하는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터져올랐으니 이 갓난애가 후날 자라서 중공어랑촌지부 서기로 활동한 리명배(李明配, 1912ㅡ1933)다.

20년대초 어랑촌에는 어랑촌과 무산촌의 반일유지인사들에 의해 사립동일학교가 세워졌다. 명배는 사립동일학교에서 소학공부를 하면서 반일사상이 싹터올랐다. 잇달아 야학도 설치되면서 이 고장 사람들은 계급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20년대 후반에는 낯모를 사람들이 어랑촌과 그 일대로 드나들더니 동만구역국 엠엘파가 어랑촌과 그 일대에 뿌리를 내리면서 농민협회, 반제동맹, 호제회, 소선대 등 혁명단체들이 우후죽순 조직되였다.

1930년 상반기까지만도 어랑촌이란 이 산구에서 엠엘파의 활동은 선전사업이 주요과업이였다. 선전사업의 주되는 장소는 야학실, 그때 리명배는 금방 10대 중반의 다부진 소년임에도 야학실에서 토론회를 가질 때마다 고르지 못한 이 사회를 뒤엎자면 뭉쳐 일떠나는 길밖에 없다면서 열띤 호소를 했다. 리명배가 이같이 열띤 호소를 할 수 있은 것은 김세와 같은 외지 혁명가들이 야학실에 자주 나타나면서 지주, 자본가를 때려엎고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자면 로동자와 농민이 단결하여 일어나야 한다는 내용으로 선동강연의 영향이였다.

명배는 소학교 졸업을 전후하여 소선대에 가입하였는데 소선대의 기본과업은 삐라살포와 보초근무, 적정탐지와 원거리 통신련락 등이였다.

1930년 5월 하순의 어느 날, 외지혁명자 안정규와 어랑촌의 김세, 장승환 등 몇몇 골간들과 리명배 등 한패의 동지들이 어랑촌 사립동일학교에 가 고리대 등 문서소각투쟁을 벌리였다. 학교 운동장에 어랑촌의 남녀로소가 모이고 어랑갑장 차도철이 소각회의를 사회하였다. 그가 고리대문서, 곡식리자, 소윤두 등 각종 차용증, 문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옥죄는 문서이기 때문에 태워버려야 한다고 선전하자 당지 부호 김세봉 등은 고스란히 고리대문서 등을 내놓았다. 한무더기 문서에 불을 지른 뒤 안정규가 말했다.

“이런 문서를 태우는 목적은 다같이 잘살기 위해서이다. 한 사람이 세를 받아 잘 먹고 잘살아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소각해버린다.”

그의 말이 끝나자 군중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1933년 음력 1월 18일, 어랑촌 13용사 전투시 적들의 기관총 발사지 하나인 어랑촌 남산 전경. (2019년 9월 18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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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랑촌 소각투쟁은 이해 5월 연변 각지를 강타한 ‘붉은 5월’ 투쟁의 한페지였다. 이 투쟁은 엠엘파 동만도에서 발기하고 중공동만특별지부에서 지지한 것인데 조공당원이 중공당에 가입하는 한차례 투쟁시련이였다. 과연 소각투쟁에 이은 5.30폭동까지 거치면서,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원칙에 의해 조선공산당 당원들이 중국공산당으로 넘으면서 산간지대에 위치한 어랑촌과 무산촌에도 중공평강구위 소속 어랑촌당지부가 조직되였다. 이때의 리명배는 공청단원이였다. 이해말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면서 중공어랑촌지부 서기로 눈부신 활동에 나섰다.

1931년 가을 연변의 이르는 곳마다에는 당이 지도하는 대중적 추수투쟁이 맹렬히 일어났다. 어랑촌도 례외가 아니였다. 리명배는 동지들과 더불어 어랑촌과 그 일대 군중들을 추수투쟁에로 이끌었다. 추수투쟁의 주체는 소작료 인하로서 이 고장에서의 3.7제, 4.6제 분배원칙은 순조로이 풀려갔다. 이듬해 봄에는 련속적인 군중적 춘황투쟁이 이어섰다. 리명배 등은 또 춘황투쟁을 성과적으로 지도하면서 당지 농민들이 보리고개를 무사히 넘기도록 도와주었다. 한편 어랑촌적위대를 재건하여 대장을 겸하면서 추수투쟁, 춘황투쟁의 성과를 지켜 싸웠다.

어랑촌을 중심으로 한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가 창설된 것은 1932년 겨울의 일이다. 이 고장의 군중들은 조선서 살길을 찾아 모여든 이주민들이여서 계급적 구성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일찌기 계몽교육, 혁명단체의 영향을 받아 계급적으로 각성하였었다. 그리고 마을 앞으로 봉밀하가 흐르기에 농사 짓기가 좋고 지리적 조건도 좋아 근거지 창설에 알맞춤이다.

그해 11월, 중공평강구위 서기 김병수(렬사)와 평강구유격대에서 선참으로 근거지 개척에 나섰다. 리명배는 구위 서기 김병수를 도와 근거지 수립 조건을 하나하나 갖추어가면서 어랑촌으로 들어온 혁명자들 배치를 주요한 과업으로 내밀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약수동근거지에서 활동하던 중공화룡현위와 평강구위 및 근거지의 여러 혁명단체들과 혁명적 군중들은 일제놈들의 세차례 토벌을 당한 후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로 전이하였다. 이어 화룡현의 달라자구, 개산툰구, 삼도구의 유격대 장총대들이 어랑촌에 모여들었다.


귀하고도 장하도다 우리 소년들

새 사회의 주인공 될 우리들이다

후렴:

우리들은 뜨거운 피 식히지 말고

어서 바삐 현사회와 싸워봅시다


썩어가는 제국주의 다 무엇이냐

현시대의 모든 권리 지배하누나

후렴:


바위라도 한번 치면 부서지리라

왜놈들을 남김없이 때려부시자

후렴:


어랑촌 소선대 중대장 차정숙을 비롯한 소선대원들이 부르는 명랑한 노래소리는 근거지 상공에 메아리쳤다.

어랑촌 북쪽 천리봉 더기에서 보는 유서깊은 어랑촌 서북쪽 산야. (2019년 9월 18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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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2월의 어느 날, 2개 소대를 망라한 화룡현유격대가 어랑촌에서 조직되였다. 화룡현유격대의 건립은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의 정식 탄생을 의미한다. 리명배와 어랑촌 지방동지들의 얼굴마다에는 종일 희열이 넘치여났다. 근거지 군민들도 종일 기쁨과 환락으로 넘치였다.

1933년 2월 10일(음력 1월 16일) 삼도구에 출전하였던 현유격대 김세 중대장 일행 15명이 단번에 10여자루의 여러가지 총을 빼앗아가지고 개선하니 근거지는 더욱 끓어번지였다. 이튿날 2월 11일 중공화룡현위에서는 ‘어랑촌병민경축대회’를 성대히 열고 현유격대의 삼도구 출전 승리를 경축하였으며 돼지까지 잡으며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다.

뒤이어 오락만회가 성황리에 펼쳐졌다. 노래를 무척 즐기는 김세도, 어랑촌 마을의 구심점인 리명배도 흥겨운 춤을 추며 우리 군민들과 함께 돌아갔다. 현위 서기 최상동도, 현위 군사부장 방상범도 빙글빙글. 그네들이 유격대실(김세봉네 집)과 당구위 간부실에서 해당 회의까지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는 자정이 넘었다. 리명배는 약간명 동지들과 함께 어랑촌을 순라하면서 적위대원들의 보초마다에 주의를 주었다.

새날이 밝으니 2월 12일이다. 음력으로는 1월 18일, 이날 이른새벽에 현유격대 제2소대 대원들은 여느때처럼 일찌기 근거지 아래 동쪽의 왕지평으로 바깥보초를 나갔다. 그들이 길가에 어지러이 난 일제 토벌대 놈들의 숱한 발자국을 발견하고 급급히 련방 총성을 울렸을 때는 일제토벌대가 어랑촌근거지에 대한 포위권을 조인 뒤였다. 어랑촌 뒤산에서 보초를 서던 공청단원이고 적위대원인 김봉수도 렵총 세발을 발사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때 현유격대 1소대 유격대실 8간집 문전보초는 채동식이였다. 그가 유격대실에 가서 급보를 알리고 나오니 유격대원 천국선이 몇분 만에 달려와 보초를 교대했다. 이어 “놈들이 왔다!”는 천국선의 웨침소리가 이른새벽의 정적을 깨뜨리며 단잠에 든 어랑촌을 발칵 들깨웠다. 1소대 12명 대원이 현위 군사부장 방상범과 유격대 중대장 김세의 지도하에서 세갈래로 나뉘여 적들을 반격하며 싸울 때 리명배는 소속 당원동지들과 적위대원들과 함께 현위와 구위 그리고 근거지 혁명군중들, 로약자들의 전이를 도와나섰다.

이날의 반격전이 바로 후세에 이름난 어랑촌 13용사 전투, 이날 동원된 적들은 삼도구, 투도구, 이도구, 룡정 등지로부터 집결된 일본침략군 련합토벌대로서 총병력은 근 400명으로 헤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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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유격대 1소대 용사들이 적들과 피어린 혈전을 벌린 사이에 근거지내 당정간부와 군중들은 백사불구하고 적들의 포위가 설핏한 서북쪽으로 포위를 헤치고 나갔다. 이 포위돌파에서 현위 서기 최상동과 적위대원 류억만, 소선대원 차정숙 등이 적탄에 쓰러졌다. 이날 혈전은 근 6시간이나 지속되면서 김세 등 9명 유격대 전사가 장렬히 희생되고 방상범과 4명 유격대 전사는 나중에 포위를 헤치고 북쪽산에 올랐다.

중공삼도구구위 제1임 서기였던 안학선, 어랑촌 당지부 서기이고 적위대 대장인 리명배 등 5명이 불행히 토벌대 놈들에게 체포되였다. 포위돌파와 동지들 엄호과정에서 생겨난 비극이였다. 1982년 11월 11일에 필자가 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구산 1대에 가서 항일투사 황옥순(黄玉顺)을 취재하였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날 붙잡힌 5명중 분명한 것은 2명이다. 한명은 안바지라고 불리우는 안학선(安学善)이고 다른 하나는 리명배이다. 안바지는 포위돌파중 산굽이를 뛰다가 체포되고 리명배는 어랑촌바닥에서 동지들 포위돌파를 이끌며 보초를 서며 돌아치다가 미처 빠질 수가 없어서 서쪽산 감자굴에 숨었는데 적들 수색에 걸리였다. 리명배외 기타 남자 둘인데 한명은 잘 모르겠고 녀자 둘은 개구(开区)에서 왔다. 그들 둘은 어랑촌에 온 이튿날 봉변을 당하였다. 이들 5명은 손바닥에 쇠줄을 꿰인 채 일제 이도구경찰분서에 끌려갔다. 이들 5명은 3일간이나 적들의 갖은 악형을 다 받다가 이도구 구산(邱山) 웃 공동묘지골에 끌려가 살해되였다.

그 후 어랑촌 13용사 전후관계를 연구하면서 여러모로 확인해보니 황옥순의 말이 맞았다. 다만 5명중 잘 모르겠다는 남자가 사실은 녀성으로서 화룡현 용화(勇化) 출신의 유격대원 천국선의 안해로 드러났다. 안학선은 원 삼도구위 제1임 서기이고 리명배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어랑촌당지부 서기이고 어랑촌 적위대 대장이였다. 개구에서 왔다가 끌려가 희생된 두 녀인은 모두 20여세의 녀성으로서 그중 하나의 별호는 ‘노랑저고리’로 알려졌다.

체포된 동지들과 리명배의 장렬한 최후였다. 리명배는 희생되기 전에 이미 결혼한 사람이였다. 안해가 누구인지는 알려지는 자료가 보이지 않으나 그에게는 어린 자식들이 있은 것 같다. 그중 장남은 리룡팔로 헤아려지면서 리명배의 가족생활을 상상하게 한다. 최문식, 김춘선의 주필로 된 《중국조선족혁명렬사략전》 7 (연변인민출판사, 2015년 12월 출판)의 리명배 렬사 부분 략전에 따르면 1960년 6월 12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에서는 리명배를 혁명렬사로 인정하고 그의 장남 리룡팔에게 ‘혁명희생민병민공가속광영기념증’을 발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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