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로군의 출중한 지하공작자 진정산
천은 거의가 흰강목이여서 진정산은 산속에서 황경나무와 참나무 등 껍질을 벗겨다가 속껍질과 강목천을 함께 삶으며 누런 물이 들도록 하였다. 다음 이런 천들을 내다가 말리우면1 제법 군복이나 다름 없었다.

2020-03-02 09:16:46

그림처럼 아름다운 오늘의 눌하시의 멋진 풍경.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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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련군 제3군과 6군, 9군, 11군으로 무어진 제3로군의 력사를 헤아리면 3군 재봉대 10여명 녀전사들 거개가 조선족으로 알려진다. 3군부대의 제1임 재봉대 대장이고 출중한 지하공작자인 공산당원 진정산(陈静山)도 에누리없는 조선족이다. 진정산을 두고 그의 고향이며 가족관계, 래력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3군 재봉대 대장으로 활동하면서부터는 진정산의 모습이 나름 대로 서서히 밝혀져 고무적이다.

진정산 관련 자료에 따르면 1936년-1937년 그 시절 항일련군 3군 정치부 선전과 과장으로 활동한 우보합(于保合, 1914一1985)은 1936년의 진정산은 나이가 30여세이고 키가 1.60메터에 달하는 조선족녀성이며 일솜씨가 뛰여나고 재봉기를 익숙하게 다루었다고 회고하였다. 우보합은 길림성 이통현(伊通县) 출신이고 만족으로서 1937년 7월에 6군 재봉대의 리재덕(李在德)과 결혼한 사람으로서 3군내 재봉대 녀전사들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진정산 회고자료를 남긴 또 한분은 흑룡강성 룡강부(龙江府, 오늘의 齐齐哈尔市)출신이고 당년 선후로 공청단대련시위 서기, 공청단주하중심현위(珠河中心县委) 선전부장과 서기, 중공북만림시성위 청년부장으로 활동한 주신양(朱新阳, 1912-2003)이다. 진정산 관련 자료를 보면 주신양은 진정산의 다른 이름은 녀진(女陈) 또는 진정지(陈静芝)라고도 불리였지만 본명은 진씨가 아닌 장정지(张静芝)라고 말하고 있다.

주신양은 진정산이 또 녀진이라고 널리 불리운 것은 남편이 진씨였기 때문이라면서 항일련군 2군에서 넘어온 녀전사라고 밝히였다. 두정넷(豆丁网,2013.1.21)에 오른 <학성(鹤城) 100년부녀운동사기념 100명건국(巾帼)공훈, 건국모범후선인 명단>에 의하면 진정산의 다른 이름 하나는 리숙진(李淑珍)으로 나타난다. 아직까지 진정산의 남편 진씨를 알리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우보합과 주신양의 회고로부터 우리는 진정산의 출생이 1901년-1906년 사이이고 본명이 장정지이며 연변의 항일련군 제2군에서 3군으로 넘은 조선족녀전사임을 헤아려볼 수가 있다. 진정산이 3군 재봉대 대장으로 부임한 것은 1936년 5월경의 일이니 재봉대는 통하현 청하 소고동골의 심산밀림 속에 자리잡았다.

청하 소고동은 오늘의 할빈시 통하현 청하진 소고동촌(通河县清河镇小古洞村)을 가리킨다. 그 시절 3군 재봉대 녀전사인 김옥선(金玉善)은 1984년 8월 자기를 찾은 소봉란(苏凤兰) 등과 자기는 1918년생 평안북도 출신이고 통하현 이도하자(二道河子) 사람으로서 1936년 8월에 항일련군 3군에 가입하였다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재봉대는 소고동골의 심산밀림 속에 자리잡았다. 매우 음페적이여서 웬간한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재봉대실은 높은 산기슭에 판 귀틀집으로서 옹근 나무로 벽을 만들었다. 귀틀집 대부분은 땅에 묻히고 일부분만이 땅우에 드러났다. 지붕은 나무껍질과 나무가지로 덮이여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아예 보아내지 못한다. 가까이 다가가서도 쉽게 발견하지 못하니 아주 비밀스런 곳이였다.

(통하문사자료 제5집. 내부발행. 1990년 4월 인쇄, 제117~118페지)


이 방문기에서 김옥선은 3군 재봉대의 위치와 밀영구조를 보는 듯이 밝히여 보다 깊이 리해하도록 이끌어준다.

오늘의 이춘시 서림구 구내 항일련군 제3군 재봉 밀영지 안내비.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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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년간 인터넷을 덮은 3군 재봉대 관련 자료에 따르면 재봉대 시초의 녀전사는 진정산, 김백문(金伯文), 왕정평(王正平), 우연수(于燕秀), 우계진(于桂珍), 우수진(于秀珍), 강신옥(姜新玉) 등 7명으로 나타나 이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데 김옥선의 회고는 다르다. 김옥선은 재봉대의 최초 7명은 진정산, 장의숙(张义淑), 곽숙진(郭淑珍), 리종부(李钟孚), 김호련(金浩莲)과 자기,후근일을 맡아보는 고씨(顾氏)라는 분 등 7명이라고 회고한다.

3군 재봉대 관련 자료를 보면 1936년 9월에 통하현에서 홍명숙, 김벽영, 장경숙, 김옥선, 장희숙, 박경숙(洪明淑、金碧荣、张景淑、金玉善、张熙淑、朴景) 등 녀전사들이 새로 재봉대로 오면서 3군 재봉대 녀전사들은 15명으로 늘어나며 이들 15명중 11명이 조선족녀전사들이라고 지적하여 무척 주의를 끈다. 이들 모두들에게서 큰언니로 불리우는 진정산은 녀전사들 모두를 친자매로, 한가족으로 사랑하며 받들어나섰다.

재봉대에는 시초 일본제 낡은 재봉기 한대밖에 없었고 재봉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도 진정산 한사람 뿐이였다. 하여 진정산은 낮과 밤이 따로 없이 재봉기술을 가르치는 한편 재봉대를 몇개 소조로 나누어 번갈아 작업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재봉대 녀전사 김백문(원명 김정순)의 회고에 따르면 후근을 맡아보는 남전사는 둘인데 그들은 워낙 3군 군부에서 수십리 떨어진 심산 속 산막에서 살던 지방사람들이였다.

나이가 듬직한 사람은 염씨(闫氏)이고 그보다 나이가 어린 남자는 30여세의 나그네였다. 그들은 인연이 미치지 못하는 심산밀림 속에 뙈기밭을 일구어 옥수수나 호박, 감자 따위를 심거나 수렵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3군 재봉대가 그들 심산 속에 나타난 후 통나무를 찍어 간편한 귀틀집을 하나 지으니 이 귀틀집이 재봉대실로 되였다.

사람들은 염씨를 염감독이라 부르고 그보다 어린 사람을 작은 감독이라고 불렀다. 진정산의 제의로 재봉대 후근을 맡아나선 염씨네 두 남자가 재봉대를 둘러싼 심산 속 여기저기에 덫을 놓거나 굴을 파는 등 방법으로 노루나 곰, 산돼지 등을 잡아서는 재봉대를 망라한 3군 밀영의 육류나 기름 등 문제들을 해결하군 하였다.

그 시절 3군 재봉대 녀전사 류숙진(刘淑珍)의 회고에 따르면 그 후 재봉기는 시초의 한대로부터 세대로 늘어났다. 한대는 손으로 돌리는 재봉기이고 두대는 발로 디디며 돌리는 재봉기였다. 재봉대의 녀전사들은 서로 분공하여 재단하기도 하고 군복과 군모를 만들기도 하고 탄띠를 만들거나 낡은 군복을 깁기도 하면서 서로 손을 맞추며 돌아갔다.

재봉대 녀전사들의 재봉작업은 모두가 수공작업이고 솜이나 천 등은 산림경찰대대거나 왜놈들 후근물자를 로획한 전리품들이였다. 천은 거의가 흰강목이여서 진정산은 산속에서 황경나무와 참나무 등 껍질을 벗겨다가 속껍질과 강목천을 함께 삶으며 누런 물이 들도록 하였다. 다음 이런 천들을 내다가 말리우면 제법 군복이나 다름 없었다. 진정산과 재봉대 녀전사들의 헌신적인 열성으로 3군 부대의 군복문제는 비교적 순조롭게 풀리여갔다. 재봉대는 또 후방병원으로 되여 부대내의 상병원들도 돌보아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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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산 연구에서 밝히고 넘어야 할 문제는 3군 재봉대의 지점 문제이다. 본문에서 김옥선의 회고에 밝히였지만 진정산이 재봉대 대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3군 재봉대는 통하현 청하진 소고동골의 심산밀림으로 알려진다. 재봉대 녀전사였던 김옥선의 회고도 그러하고 항일련군 제3군의 전신이였던 동북반일련합군 연구자료들에서도 그러하다. 동북반일련합군 시절 이들은 부대밀영을 통하현의 대고동과 소고동 심산 속에 설치하였는데 소고동밀영은 1935년 11월에 조상지와 리연록이 소속부대를 이끌고 소고동골로 오면서 세워지고 대고동밀영은1936년 정월초에 세워졌다.

대고동밀영과 소고동밀영 두 밀영가운데서 소고동밀영이 비교적 컸기때문에 반일련합군의 재봉대와 무기수리소 등 후근기관들이 모두 소고동밀영에 자리잡았다. 재봉대의 제1임 대장 진정산은 당연히 소고동밀영의 재봉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재봉대 제2임 대장 장의숙의 모든 연구자료들도 3군 재봉대의 지점은 통하현 소고동골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을 덮고 있는 진정산 관련 글이나 3군 재봉대 관련 글들은 통하현 청하진의 대고동과 소고동은 전혀 언급도 없이 재봉대는 1936년 8월, 소서림하(小西林河) 상류의 심산밀림 속 로도묘골, 랑랑궁(老道庙沟娘娘宫) 일대에서 정식으로 조직된 것으로 대서특서한다. 로도묘골과 랑랑궁은 오늘의 이춘시 서림구에서 18킬로메터 되는 홍성촌 동남산 북쪽비탈(西林区18公里红星村东南山北坡山脚处)에 위치하고 있으며 탕리천(糖梨川) 항일련군 3군 재봉대라고도 불리운다.

탕리천(汤梨川) 3군 재봉대밀영은 항일련군 제3군의 주요한 밀영의 하나로 알려진다. 1936년 여름 항일련군 3군에서는 겨울군복을 해결하기 위하여 오늘의 이춘시 서림구(西林区)에서 18킬로메터 떨어진 모아산에 탕리천밀영을 새로 일떠세우게 되였다. 5군에서 넘어온 조선족녀전사 김백문(金伯文)이 3군 재봉대당지부 서기로 활약한 것은 탕리천밀영시절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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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0월, 중공강소성위 서기 양광화(杨光华)가 중공상해중앙집행국(中共上海中央执行局)의 파견으로 할빈에 가서 중공만주성위 서기로 부임한 후 중공상해중앙집행국 기관은 파괴를 당하고 중공만주성위와 중공중앙과의 련계가 끊어졌다. 1935년 4월, 중공만주성위 서기 양광화와 성위 선전부장 담국복(谭国福)이 중공주재 국제공산당(共产国际) 대표 왕명(王明)과 강생(康生)에 의해 쏘련에 소환되여 심사를 받았다.

양광화 등은 동북을 떠나기 전 4월 5일 동북 각지 당조직들에 독립자주적으로 사업할 데 관한 통지를 내리면서 성위 상무위원이고 공청단만주성위 서기인 장문렬(张文烈,小骆이라고도 불리였다)이 중공만주성위 대표로 남도록 하였다. 중국인 장문렬의 안해는 조선족혁명가 김순경 녀사이고, 녀사의 오빠 김문철은 30년 중반 중공만주성위가 철소되던 시절 한때 중공할빈시위 서기를 맡은 조선족 혁명가였다.

1936년 1월초에 국제공산당주재 중공대표단은 한수괴(韩守魁,즉 金赤民) 등을 동북에 파견하여 중공만주성위를 철소할 데 관한 지시, 4대 유격구를 중심으로 길동, 동만, 남만, 북만(吉东、东满、南满、北满) 4개 성위와 할빈특별위원회를 조직할 데 관한 지시를 전달하였다. 6월에 장문렬은 성위대표의 명의로 동북 각지 당조직에 중공만주성위를 정식으로 철소할 데 관한 통지를 내였다.

3군 재봉대 대장 진정산은 처음 동북의 항일투쟁 전반을 지도하는 중공만주성위의 이런 급속한 변화와 사태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3군 군장 조상지(赵尚志)가 3군사령부의 명의로 이해 여름 주하(珠河)중심현위에 긴급통지를 보내고 9월에 주하중심현위와 3군사령부가 공동으로 탕원(汤原)중심현위와 항일련군 6군에 련석회의를 제의하며 전문회의를 열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였다.

주하, 탕원 중심현위와 3-6군 당위 성원들이 참가한 ‘주하, 탕원 련석회의(珠汤联席会议)’는 1936년 9월 18일, 소흥안령의 심산 속에 위치한 탕리천(모아산)의 3군 재봉대밀영에서 열리였다. 련석회의에서는 중공만주성위가 철소되고 길동, 동만, 남만, 북만 4개 성위를 설립할 데 관한 상급당위의 지시와 당면한 정치, 군사 정세, 조직에 대한 중대한 문제들이 토의되면서 중공북만림시성위를 정식으로 조직하였다. 조상지, 풍중운, 장수전, 장란생(赵尚志、冯仲云、张寿钱、张兰生) 등 15명이 림시성위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였는데 그중 북만 항일련군의 장령들인 조선사람 김책(金策)과 리복림(李福林), 허형식(许亨植) 등이 집행위원회 위원이였다.

  주하, 탕원 련석회의는 북만항일투쟁의 전도와 운명에 관계되는 한차례 중요한 회의로서 모래알처럼 흩어질번 했던 북만항일련군 부대들에 다시 자기들의 지도기관-북만림시성위가 있게 되였다. 련석회의기간 진정산은 재봉대 녀전사들을 이끌어 회의참가자들의 주숙과 식사 등 후근일들을 전반적으로 맡아나서며 최선을 다하였다. 북만항일무장투쟁을 지도하는 북만 당조직기구가 다시 조직된 것이 자기 일처럼 기쁘기 한량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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