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로군의 출중한 지하공작자 진정산
재봉대 후근을 맡은 남전사ㅡ염감독이 이를 진정산 대장에게 알린 덕분에 진정산은 재봉대와 상병원들이 즉시 탕리천을 지나 북만성위 류수처가 자리잡은 모아산 밀영으로 전이하도록 하였다.

2020-03-09 08:46:02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76


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 밀영지 안내비.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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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936년 겨울이 지나고 1937년 봄이 다가오자 3군밀영의 식량 문제가 자못 큰 난제로 대두하였다. 적들의 련속되는 토벌과 엄밀한 봉쇄정책으로 항일련군과 지방군중들과의련락이 끊어진 바람에 얼마 안되는 식량은 인차 거덜이 났다. 감자가 식량해결로 되였지만 감자마저도 떨어지니 고사리, 산배추, 버섯 등 산나물을 얻어들여야 했다. 그나마 산나물이나 산열매도 이어대기가 쉽지 않았고 소금과 기름은 구경하기도 어려워서 물에 산나물을 데쳐서 그대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활은 그토록 어렵고 간고하여도 항일련군 전사들은 머리 숙이지 않았다. 휴식할 때면 진정산은 앞장에 서서 재봉대의 녀전사들과 함께 항일가요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혁명적 락관주의와 필승의 신념으로 넘치였다. 그 속에서 한번 또 한번 굶주림과 모진 피로를 이겨갔다.

진정산을 대장으로 하는 3군 재봉대 녀전사들은 이 같은 항일전사들이였지만 모든 조선족녀전사들은 중문글을 모르고 한족녀전사들은 일자무식의 문맹이였다. 그때 재봉대실에서 70~80리 떨어진 곳에 3군의 류수처가 자리잡았고 4~5명의 동지가 활동하고 있었다. 재봉대에서 상급부문과 련락을 가질 때면 모두 그곳 류수처를 거치게 되여있었다. 1937년 음력설이 금방 지나자 류수처의 한 동지가 상급의 편지 한통을 가지고 재봉대로 왔지만 누구 하나 중문으로 된 편지글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중문을 모르기는 진정산도 례외가 아니였다. 조선족녀전사들은 서로 돌아가며 보아도 저마다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한족녀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별수 없이 편지를 가지고 온 동지와 물으니 그도 일자무식이였다. 답답한 순간이 흐르다가 진정산이 편지를 곰곰히 뜯어보니 편지 속에는 여러 이름들이 씌여있었다. 조선동지들은 중문을 몰라도 자기 이름자는 알고 있었다. 진정산은 방법이 있다면서 편지 속에 이름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류수처에 다녀오자고 제의하였다.

중문글 모르는 대가는 편지에 언급된 녀전사들을 70~80리 밖 3군류수처로 다녀오게 하였다. 류수처에 가서야 그들은 몇몇 녀전사를 남기는외 나머지 녀전사들을 여러 부대로 전근시키는 상급 지도부문의 지시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편지에 이름이 밝혀진 김백문은 철력의 후방으로 가서 그곳에 재봉대 하나를 새로 일떠세워야 하였다. 그번 편지사실을 두고 김백문은 자기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이 일은 나를 심심히 교육하였다. 나로 하여금 천방백계로 전투의 여가를 타 학습하면서 문맹의 모자를 벗어버리려는 결심을 내리게 하였다.”

학습의 중요성을 알리는 이야기와 결심이라 하겠다. 그러던 김백문, 우계진 등은 조직의 지시로 떠났는데 3군 재봉대밀영은 특무의 밀고로 적들에게 드러나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여갔다. 마침 재봉대 후근을 맡은 남전사ㅡ염감독(阎把头)이 이를 진정산 대장에게 알린 덕분에 진정산은 재봉대와 상병원들이 즉시 탕리천(糖梨川)을 지나 북만성위 류수처가 자리잡은 모아산(帽儿山省委留守处)밀영으로 전이하도록 하였다.

모아산밀영은 탕원현 이서 의란과 이춘 사이(汤原县以西,依兰与伊春交界处) 심산 속에 자리잡았다. 그날 밤 한무리 일제놈들이 3군 재봉대의 원 밀영을 습격하고 불을 질렀지만 재봉대는 거의 무사하였다. 작은 감독(小把头)으로 불리우는 남전사가 동지들을 엄호하면서 적들을 다른 곳으로 따돌리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 밀영지 안내비.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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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봄에 진정산은 3군 소년련 지도원으로 파견되였다. 3군 소년련은 1936년 봄 이후 조직된 한갈래 항일무장으로서 거의 모두가 10대의 항일소년들로 무어졌다. 진정산은 3군 군부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소년련을 이끌어 3군의 여러 부대들과 함께 허다한 전투들에 참가하여 용맹을 떨치였다.

1938년 일제놈들의 동기대토벌이 시작되자 항일련군 제3군과 6군, 9군, 11군은 12월말에 적들의 겹겹한 봉쇄선을 헤치면서 라북의 오동하 강반(萝北梧桐河畔)으로부터 해륜현 팔도하자(海伦县八道林子), 백마석(白马石) 등지로 전이하였다. 중공북만림시성위에서는 소흥안령 서부산구를 중심으로 항일근거지를 창설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중공북만림시성위 책임자 장수전(张寿钱, 즉 李兆麟)은 1939년 2월초에 항일련군 6군 참모장 풍치강(冯治纲)과 토의를 거쳐 눌하(讷河)를 중심으로 하는 북만성위 특별지부를 조직하기로 하고 중공하강특위(下江特委) 조직부장 방빙옥(方冰玉, 본명 姜桂和) 등 세 사람을 먼저 눌하현으로 파견하였다. 이해 6월에 북만림시성위에서는 또 6군 2사 정치부 주임 윤자규(尹子奎)와 6군 12퇀 부퇀장 경전군(耿殿军), 련지도원 왕은영(王恩荣) 등을 파견하면서 먼저 하산한 방빙옥 등과 더불어 중공눌하현위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드디여 1939년 8월, 윤자규를 서기로 하고 방빙옥을 현위 선전부장으로, 구씨(欧氏)를 조직부장으로 하는 중공눌하현위가 비밀리에 조직되였다. 윤자규는 방빙옥이 이미 꾸린 등과촌 임가분방툰(登科村任家粉坊屯) 잡화점을 경영하면서 현위 비밀거점으로 리용하였다. 눌하현위는 중공북만림시성위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눌하와 덕도, 극산, 눈강, 포서 (讷河、德都、克山、嫩江、布西) 등지의 항일투쟁을 지도하여갔다.

그해 1939년 11월 1일, 진정산은 북만성위 집행위원 고우민(高禹民)이 눌하현위에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눌하에 가 윤자규를 찾았다. 고우민의 편지는 눌하현위의 어떤 동지들 가운데 존재하는 활동에서 소극정서(活动消极)와 좌경관문주의(左倾关门主义) 두가지 경향을 지적하면서 눌하현위에서 당의 집체령도를 강화하면서 군중들에 의거하여 신속히 항일고조를 일으킬 것을 요구하였다.

고우민은 편지에서 또 오유를 범한 진정산을 눌하현위에 파견하니 투쟁 가운데서 오유를 시정하면서 당적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진정산이 무슨 오유를 범하고 당적취소 처분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눌하로 간 진정산은 현위 서기 윤자규와 가짜부부(후에 당조직의 비준으로 정식부부로 된다)로 분장하면서 임가분방툰의 잡화점을 비밀거점으로 현위 교통원으로 활동한다. 임가분방은 오늘의 눌하현 이극천향 부국촌 3툰(二克浅乡富国村三屯)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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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눌하현위 관련 자료에 따르면 진정산은 윤자규 등 현위의 동지들을 도와 아래와 같은 8개 면에서 크나큰 역할을 놀았다.

첫째는 삼마가(三马架), 왜도대(倭都台), 남양강(南阳岗), 란성해툰(栾成海屯), 천자19호(天字十九号), 눌남진(讷南镇), 마가요(马家窝) 등지에 항일구국회를 발전시키고 부녀구국회와 아동단 조직을 건립하였다. 항일구국회 회원은 최초의 10여명으로부터 100여명으로 발전하였다.

둘째는 눌하인민항일선봉대를 조직하였다. 눌하인민항일선봉대는 원래의 청년구국군을 개편하여 3개 지대, 50여명으로 늘어났으며 항일련군 부대를 협조하여 관련 전투에 뛰여들었다.

셋째는 비밀간첩제거대(除奸团)를 조직하여 한간과 특무를 소멸하면서 이자들에 의한 당조직 파괴 활동을 미연에 막아냈다. 한해 사이에 이들이 처결한 한간과 특무는 11명에 이른다.

넷째는 비밀인쇄소를 운영해 항일삐라를 인쇄, 살포하였다. ‘북만동포들에게 드리는 글’과 ‘중국인민해방의 길’ 등이 그러하다.

다섯째는 소림(小林), 주명록(周明禄), 류순(刘纯) 등 8명을 당조직에 받아들이고 극산현(克山县)에 극북사업위원회(克北工作委员会)를 조직하였다.

여섯째는 눌하현성과 라하, 구정, 극산, 태안진(오늘의 依安현성), 포서, 조하(拉哈、九井、克山、泰安镇、布西、洮南) 등지에 비밀련락점 15곳을 두었다.

일곱째는 항일련군부대와 배합하여 무장투쟁을 벌리였다. 1940년 9월 25일, 항일련군 3지대, 9지대와 함께 극산현성을 공략한 것이 그러하다.

여덟째는 항일구국 회원과 부녀회원들을 조직하여 항일련군부대들에 식량을 조달하고 군복과 신을 만들며 보초와 련락을 맡아나섰다.

진정산과 동지들의 헌신적 노력은 거대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1940년초에 진정산은 중공눌하현위의 결의로 현위 부녀부장으로 임명되였다. 이런 성과와 현위 부녀부장으로의 출현은 진정산이 눌하에 간 다음 인차 당적을 회복하였음을 알려준다.

1940년 9월, 항일련군부대는 눌하현성 공격을 앞두고 진정산과 윤자규가 관련 정찰에 나서도록 하였다. 9월 18일, 진정산 부부는 부대에서 파견한 동지에게 현성의 적군정황을 알리면서 손수 그린 진공로선도(进攻路线图)를 넘겨주었다. 따라서 부대가 두갈래로 나뉘여 한갈래는 북대영 위만군 퇀부(北大营满军团部)를 진공하고 한갈래는 현성을 공격하도록 건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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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밤에 진정산 부부는 눌하인민항일선봉대를 이끌어 항일련군 6군 12퇀과 배합하여 눌하현성 진공전투에 나섰다. 아군은 눌하 동문의 북쪽으로 현성을 들이쳤다. 현성의 위경찰서와 경찰훈련소(警察训练所) 경찰들은 전부가 무기를 바치며 투항하였다. 진정산은 또 부대와 더불어 현성감옥을 공격하여 경무과장과 간수들을 제압하고 300여명의 이른바 ‘범인’들을 구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 ‘범인’들은 진정산의 내심한 선전교육을 거쳐 대다수가 항일련군 제6군의 전사로 되였다.

진정산 부부와 동지들의 발자취는 눌하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주변의 주요지역들인 포서(布西), 감남(甘南), 의안(依安), 극산, 눈강, 눌하 가까이 내몽구 파언기(巴彦旗) 등지에까지 널리 미치며 항일구국 고조가 크게 일었다.

그러나 눌하와 주변지역들에서의 지방투쟁은 걸음마다 목숨을 내거는 험악한 순간순간들이였다. 1940년 10월, 항일련군부대가 포서진을 공격할 때 항일련군과 지방당조직간 련락원을 맡아보았던 제3로군 9지대 비서 상련생(尚连生)이 적들의 마수에 걸려 반변하면서 북안헌병대에 눌하현위의 활동을 불어대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지여갔다.

위치치하르헌병대와 북안헌병대, 눌하경찰대에서 눌하현위 인원들과 항일군중들에 대해 신속한 검거에 나섰다. 11월 11일, 중공눌하현위 청년사업부 부장 고수림(高水林)이 극산현 북흥진 조귀툰(北兴镇赵贵屯)에서 체포되여 반변하니 눌하현위의 주요 책임자들과 현위기관, 련락점들이 드러났다.

11월 28일, 중공북만성위와 항일련군 제3로군의 지하공작자 진정산과 윤자규는 북안(北安) 일본헌병대에 의해 불행히 체포되였다. 12월 8일에는 현위 선전부장 방빙옥이 체포되여 또 반변하고 말았다. 눌하현위와 지하당원들, 항일구국회, 항일부녀회 회원 등 180명이 륙속 드러났다. 현위 서기이며 진정산의 남편인 윤자규는 위치치하르고등법원(伪齐齐哈尔高等法院)에 의해 사형에 언도되고 진정산 등 49명은 각기 적들의 판결언도를 받았다.

  그 후 진정산은 어떻게 되였을가? 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 관련 자료들과 중공눌하현위 자료는 판결언도 외 더 말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3군 재봉대 녀전사였던 김옥선은 1984년 8월 소봉란의 취재를 받을 때 재봉대 제1임 대장 진정산은 적들에게 체포되여 감옥에서 희생되였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재봉대 제2임 대장 장의숙도 적들에게 체포되여 장렬히 희생되였다면서 선후하여 두 대장을 잃은 재봉대 녀전사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추도가>를 불렀다고 회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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