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일에 충직한 장만평

2020-03-20 11:07:50

张漫萍:忠贞国事大丈夫

하남성 정주시 형양시 렬사릉원에는 ‘장만평 렬사의 묘’라는 커다란 글자가 새겨진 묘비가 우뚝 솟아있다. 렬사의 고향인 형양시 외에도 안휘성 방부시 고진현에 장만평 렬사의 기념비가 있다. 영웅는 희생된 지 오래지만 그의 정신은 영원히 남아있다.

장만평은 1910년에 태여났으며 하남 형양사람이다. 1926년 여름부터 1932년 봄까지 하남성립제4사범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그 기간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고 졸업 후 북평에 가 항일구국운동에 참가했다. 1932년 7월,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여 초람자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 장만평은 박일파, 양헌진 등 동지들이 령도하는 비밀당지부의 지도하에 적들과 단호하게 싸웠다. 적들은 장만평을 위협, 회유하고 모진 고문을 들이댔으며 이른바 ‘자백서’를 쓰고 자수하여 변절하도록 핍박하면서 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 장만평은 감옥에서 죽을지언정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머리가 잘라지고 피를 흘리는 한이 있어도 변절하지 않고 투항하지 않겠다.”고 당조직에 다짐했다. 그는 “항일은 무죄다. 나는 항일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반동당국을 날카롭게 질책했다. 감옥에서의 준엄한 시련을 거쳐 1932년 겨울, 장만평은 당지부의 비준을 거쳐 감옥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감옥당지부의 성원으로 되였다.

1936년 9월, 장만평은 당조직의 구출을 거쳐 감옥에서 나왔고 후에 하남에 파견되여 사업했으며 선후하여 중공하남성위 비서장, 중공개봉시위 서기 겸 조직부장, 중공서화중심현위 서기, 중공정(주)밀(현)형(양)사업위원회 서기 겸 형양현위 서기, 중공정형밀 지방위원회 위원을 력임했다. 장만평은 개봉, 형양, 서화 등지에서 당조직을 회복, 발전시키고 당의 항일주장을 선전하였으며 또 각 계층의 군중을 발동하고 항일통일전선을 구성하여 항일구국 운동을 전개하고 서화항일근거지를 개척하였다.

1938년말, 장만평은 예환소 변경구역에 있는 신사군 4사단 팽설풍 부대에서 사업하게 되였고 선후하여 제2총대 영장, 4사단 사령부 작전과 참모를 력임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장만평은 안휘 회북으로 전근되였고 선후하여 중공사(현)오(동)령(벽)봉(양)현위 선전부장, 중공방부공작위원회 부서기 겸 도시공작 과장을 맡았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그는 계속 중공방부공작위원회 서기를 맡고 병든 몸으로 안휘 회북, 강소 홍택호 일대를 전전하면서 지하당의 투쟁을 령도했다.

  1947년 7월, 장만평은 안휘 고진현 오하집일대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불행하게 체포되였다. 적들은 그를 대들보에 달아매고 온갖 심문을 들이댔지만 장만평은 굴복하지 않았고 당당하게 적과 맞서 싸웠으며 “공산당원을 다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혁명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고 적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그날 저녁, 잔혹한 적들은 장만평을 목을 졸라 살해한 후 마대에 넣어 회하에 던졌다. 장만평이 장렬하게 희생될 때 나이는 겨우 37살이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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