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난 항일녀성혁명가 김순경
1933년에 장문렬은 상해 복단대학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한편 지하혁명공작에 나섰고 한 조선녀자와 열연에 빠지였다. 다음해 10월에 장문렬은 군통특무에 잡히여 투옥되였다.

2020-03-23 08:57:23

혁명가 김문철과 도개손 사진. (김문철의 아들 김연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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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초 상해에는 공청단중앙국이 활동하고 있었다. 1932년말에 공청단중앙 서기 호균학(胡均鹤)과 조직부장 오대해(吴大海), 비서장 진탁문(陈卓闻)이 체포됨에 따라 1933년초에 이르러 상해의 공청단중앙국은 대파괴를 면치 못하였다. 다행히 그날 선전부장 개풍(凯丰)이 공청단중앙 기관에 있지 않은 데서 적들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얼마 후 중공상해중앙국에서는 락타(骆驼)ㅡ서보탁(徐宝铎)을 파견하면서 공청단중앙을 다시 회복하도록 하였다. 공청단중앙국은 회복되면서 상해의 감사동로(甘斯东路, 오늘의 嘉善路)에 자리한 집 한채를 세맡고 비서처를 두었다. 따라서 중앙국 여러 부서를 충실히 하여야 했다.

1933년 4월-5월경에 북방에서 진백위(陈伯伟, 즉 小陈)가 전근되여와 공청단중앙국 조직사업에 나섰다. 대진(大陈)으로 불리운 그의 대학생 안해도 동행하였다. 중앙국의 내부교통원을 맡은 강소 상주(常州)사람 당익지(唐益之)가 그들 부부를 맞아들이고 화산로(华山路) 가까이 정안사(定安寺)의 한칸에 류숙지를 마련하여주었다. 이어 북방에서 또 쑈리가 와서 선전사업을 맡아나섰다. 그때를 두고 당익지는 후일 아래와 같이 회고하고 있다

대략 1933년 4월-5월 사이 북방에서 진백위가 와서 공청단중앙국 조직사업을 맡았다…이후 북방에서 또 쑈리(小李)가 와서 선전사업을 맡았다. 그때 주요 책임은 단간행물(团刊)ㅡ단의 건설(团的建设)이였다. 그는 북방사람이고 학생차림이다. 듣건대 부자집이였다. 그는 나보다 일찍 체포되였고 체포되여 심한 구타를 당하였다. 그의 미혼처 쑈진(小金, 조선족)도 학생이고 같이 전근되여왔다. 그들도 내가 접대하면서 류숙지를 배치하였다.

당익지의 이 회고문은 쑈리(小李와 쑈진(小金)네가 온 시간은 1933년 4월-5월 사이임을 잘 알려주고 있다. 본문에서 당익지의 회고문을 인용함은 회고문에 나오는 쑈리와 쑈진이 바로 장문렬과 그의 미혼처 김순경이기 때문이다.

1987년에 도개손의 도씨 남매들과 도개손의 동창, 친구, 지인들을 중심으로 무어진 《도개손기념문집》에도 장문렬과 김순경이 공청단중앙국으로 전근된 시간을 1933년 4~5월경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순경은 공청단중앙국 조직부서에 배치되고 장문렬은 공청단중앙국 선전부장으로 부임하였다.

장문렬(张文烈, 1911년-1936년)은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알려진다. 아버지 장수치(张树帜, 1881년-1946년)는 산서 곽현(崞县, 오늘의 原平) 출신이고 1906년에 산서측회학당(测绘学堂)에 다니다가 같은 해말에 손중산 선생이 조직한 동맹회에 참가한 사람이다. 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산서 태원에서 신해혁명에 궐기하면서 염석산을 도독으로 극력 추대하여나선다. 1912년에는 염석산에 의해 기병퇀 퇀장으로 임명되여 산서 대동(大同)을 지켜섰다.

어린 아들 김연상을 안고 찍은 1935년 김문철 부부 사진. (김연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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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8월에 장수치는 산서 북부 진수사(晋北镇守使)로 되여 대동을 지키다가 같은 해 11월에 북경정부에 의해 륙군소장으로 승급한다. 1928년 북벌전쟁 시절에는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 집법총감(第三集团军执法总监)으로 활동, 1929년에 륙군대학 특별반에 입학하여 1931년에 졸업한 후   진수군사정리위원회 중장 상무위원(晋绥军事整理委员会中将常务委员)을 맡았다. 1936년 1월에는 남경국민정부에 의해 륙군중장으로 탄탄일로를 걸으면서 국민정부 진제(赈济)위원회 장감(帐监) 주임 요직에 올랐다.

지난 세기 30년대 그 세월 장수치는 국민당의 륙군중장이지만 손중산 선생이 창의 주도한 민주혁명강령인 삼민주의(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를 신앙하는 철저한 항일혁명가였다. 자식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자기의 주의를 강요하지 않고 배려하는 남다른 인생관을 소유하고 있었다.

《산서문사자료》 1991년 제4기와 제5기 합정본에 오른 서사호(徐士瑚)의 글 <장수치사략(张树帜事略)>에 따르면 장수치는 선후로 안해 넷을 맞아들이였다. 네 안해와의 사이 아들딸만도 11명. 서사호는 그중 셋째와 다섯째, 일곱째 세 아들과 익숙하고 둘째 장문렬과는 익숙치 못하지만 앞의 세 아들들과의 이야기와 둘째 장문렬의 소학시절 동창 리육진(李毓珍) 교수의 편지에서 장문렬을 개략적으로 리해할 수가 있었다.

그로부터 보면 장문렬은 장수치의 둘째아들, 성격이 침착하고 총명하고 배우기를 즐기며 북평의 란지(兰池)학교 고급반 제3반 시절 리육진과 동창이였다. 란지학교를 졸업하고 시험자격으로 이름난 통현 로하중학교(通县潞河中学)에 입학한 뒤 중공지하당조직에 가입하였다. 그때 아버지 장수치는 북평에서 륙군대학에 다니였으나 둘째 장문렬의 혁명언행을 들으면서도 간섭하지 않았다. 아래 리육진의 소개를 그대로 인용하여본다.

“1933년에 장문렬은 상해 복단대학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한편 지하혁명공작에 나섰고 한 조선녀자와 열연에 빠지였다. 다음해 10월에 장문렬은 군통특무에 잡히여 투옥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장수치는 즉각 남경에 가서 공상희(孔祥熙), 왕용빈(王用宾), 설독필(薛笃弼) 등과 힘 자라는 대로의 도움을 바랐다. 그대로 상해로 달려가서 거금을 들이면서 청방두목 두월생(青帮大亨杜月笙)을 통해서 군통과 법원의 문을 두드려 가벼운 옥외보석 판결을 얻어냈다.”

“장수치는 장문렬을 데리고 태원의 집으로 가서 반년나마 머무르게 하면서 《삼민주의》, 《건국방략(建国方略)》, 《론어》, 《자치통감》 등 책들을 읽게 하였다. 1935년 가을 장문렬은 상해에 가서 조선 녀자친구를 데려다가 결혼하겠다고 하였다. 장수치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장문렬은 상해로 간 후 녀자친구를 데리고 천진에 왔다가 집에 편지 한통 띄우고는 항전이 시작되면서 련계가 끊어졌다.”

장문렬 관련 리육진의 소개글은 신빙성이 있는편이나 시간문제에서는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1934년 10월에 군통특무에게 잡히였다거나, 태원집에서 반년나마 머물렀다거나, 1935년 가을 상해에 갔다던가 등 모두 그러하다. 이를 지적하면서도 국민당 장군으로서의 장수치가 둘째아들의 인생 선택을 존중하는 부모된 마음가짐은 실로 우러러보인다.

2005년 3월 북경에서의 김연상. (김연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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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를 두고 장수치는 생전에 아들의 뜻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리육진과 이렇게 말하였다.

“그때 나는 정말이지 반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속으로는, 이것은 그애의 구실로서 돌아올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애가 내가 읽으라는 몇가지 책을 읽고 나서도 아주 랭담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때 그애가 자기가 선택한 길을 계속 가도록 하려고 마음 굳혔습니다. 아무리 막아봤자 소용 없으니까요.”

장수치는 이같이 국민당의 중장장군이면서도 일생동안 나라를 사랑하고 일본제국주의를 증오한 항일혁명가이며 둘째를 자기가 선택한 주의와 길을 따라, 항일혁명가로 성장하게 한 현명한 아버지였다.

장문렬 연구로부터 꼭 알고 지나야 할 바는 장문렬이 통현의 로하중학교를 다닌 시기가 1928년과 1929년 이태 사이로 보인다. 로하중학교 시절 장문렬이 다니는 학급에는 평양 진남포 출신인 조선인 김문철이란 동창이 있었다. 그들은 마음이 통하는 절친이였다. 또 같이 로하중학교 선배인 조선인 김성호(주문빈)의 영향하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니 때는 1929년을 가리킨다.

북평 통현의 로하중학교 시절은 국민당 장령의 아들 장문렬을 사회주의자로 키워냈다. 로하중학교 시절은 또 장문렬에게 김문철의 녀동생 김순경과의 사랑의 대문을 열어주었으니 인생사의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잊지 못할 시절이였다. 그 후 장문렬은 1933년-1934년 사이 상해 복단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암암리에 공청단중앙 선전공작과 공청단강소성위 선전부장 사업에 충실할 수가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김순경과 장문렬이 상해로 전근되여 공청단중앙국 사업에 나선 지 얼마 안되여 김순경의 미래 언니 도개손도 공청단중앙국으로 전근한 사실이다.

1932년말 도개손은 공청단북평시위 선전부장으로부터 공청단천진시위 부녀부장으로 전근되였다가 1933년 봄에 공청단북평시위 조직부장으로 맹활약을 보인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 상해의 공청단중앙국이 대파괴의 소용돌이에 빠지자 중공중앙은 화북에서 한패의 사람들을 뽑아 공청단중앙국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도개손은 그 한패 속의 일원으로 상해로 전근되여 공청단중앙 순시원으로 활동하다가 공청단강소성위 선전부장 책임을 맡아나섰다.

공청단중앙국 내부교통원 당익지(唐益之)는 도개손의 상해 전근도 앞에서와 같이 소중한 회고를 남기여 도개손과 김순경 연구에도 크나큰 도움을 주고 있다.

1933년 5월-6월 사이 나는 또 북방에서 전근되여 오는 쑈도(小陶,즉 도개손)를 맞아주었다. 그는 처음에 청도에서 오는 쑈류(小刘)와 언니동생으로 꾸미고 류숙지를 같이하였다. 약 반년 만에 쑈도는 공청단강소성위 선전사업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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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개손의 상해 공청단중앙국 출현은 비밀행동으로나마 김순경과 장문렬 셋이 다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여주었다. 약 반년 만에 도개손이 공청단강소성위 사업에 나섰다지만 공청단강소성위라야 상해를 근거지로 한 데서 서로 어울리는 데는 지장이 되지 않았다.

이에 못지 않게 보다 흥미로운 것이 각일각 이들에게로 다가선다. 여기 흥미로움의 상대는 도개손의 남자 김문철이려니 그 이야기 발단은 1932년으로 거스르게 된다. 1932년 9월 김문철은 조선의 평북경찰서에 잡히였다가 1933년 1월 30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압록강가 신의주형무소 검사국에 이감되였다. 그해 9월 25일에는 일제측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나중에 징역 1년 6개월에 선고되였다.

1934년 10월, 김문철은 신의주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곧추 북평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체포 전 지도자가 적들에게 체포되는 바람에 조직관계가 끊어졌다. 그때 김문철은 북경에서 젊은 녀성혁명가로 활동하는 조카 김영애(金英爱,즉 徐彦)를 통해 미혼처 도개손이 상해에서 활동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고 지체없이 주저없이 상해로 달려갔다. 그때가 1934년 가을로 알려진다.

김문철은 상해에 이르러 먼저 비밀리에 공청단중앙국 조직부에서 활동하는 녀동생 김순경과 련계를 가지였다. 뒤미처 공청단강소성위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는 도개손도 만났다. 김문철과 도개손이 련인 사이라는 것을 아는 공청단강소성위 서기 정정부(郑征夫)는 김문철이 도개손과 같이 숙박할 수 있다며 지지하여 나섰다. 그러나 중공강소성위 서기는 안된다며 쐐기를 박았다.

김문철은 방망이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워났다. 조선 신의주에서 어떻게 달려간 북평이고, 북평에서 다시 남하행으로 어떻게 달려간 상해였던가. 한동안의 랭정을 거쳐 리성을 되찾았지만 김순경은 잘 달통되지 않아했다. 혁명가로서의 오빠를 너무나 잘 아는 순경이였다. 오빠의 영향으로 혁명의 장도에 오른 순경이였다.

한들 무슨 뾰족한 수도 보이지 않았다. 자기들 지도자의 지시를 좇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게 오빠 김문철은 도개손과 같이 숙박할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나마 성당위 서기는 인성이 동했던지 공청단성위 간행물 《소년진리보》를 함께 편집하라고 한다. 함께 어울릴 기회가 있으니 불행중 다행이라 할가.

  그 다행도 잠간이려니 새로 공청단중앙 서기로 부임한 왕문덕(王文德)은 김문철을 아예 믿지 않으면서 《소년진리보》를 편집하지 못하게 했다. 그쯤이면 몰라도 한걸음 나아가 김문철은 지정된 방에서 마음대로 떠나지도 못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일을 알게 된 대바른 김순경은 펄쩍 뛰였다. 해도해도 너무한다, 동지의 가슴에 비수를 박는다는 김순경의 푸념이 이어졌다. 후에 이자는 적들에게 체포되여 변절하고 말았다. 김순경의 예리한 안광은 그자를 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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