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전선의 장군’ 속범정

2020-03-26 08:28:41

속범정은 1893년 11월에 산서성 곽현(지금의 원평시) 서사촌에서 태여났다 일찍 손중산이 령도한 동맹회에 참가했다. 1911년 신해혁명시기 속범정은 혁명군 원정대 대장을 맡고 대동을 일거에 함락했으며 서북호국군을 조직하고 원세개를 토벌했다. 그 후 속범정은 풍옥상이 조직한 국민군에 참가했고 제3군 제6혼성려 려장 및 국민련군 군사정치학교 교장을 맡았다.

1931년 ‘9.18’사변 후 속범정은 일본과의 타협을 반대하고 항일을 주장했으며 선후하여 서안 수정공서 감숙주재 행서 참모장, 륙군 신편 제1군 참모장, 중장 총참의를 력임했다. 1935년, 일본이 화북사변을 발동하였을 때 속범정은 민족위기의 심각성을 깊이 느끼고 직접 남경에 가서 항일을 호소했지만 장개석은 ‘외적을 물리치자면 먼저 국내부터 안정시켜야 한다’는 방침을 고집하면서 반대하였다. 고민과 슬픔에 부대끼며 나라를 구할 길이 없다고 생각한 속범정은 중산릉 앞에서 포복자살하여 죽음으로 국민들을 각성시키려 했다. 다행히 구조되여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속범정은 장개석의 매국정책과 철저히 결렬하고 나라와 국민을 구하는 길을 계속 탐구하기 시작했다. 항주에서 료양하는 기간 그는 맑스주의 ‘자본론’ 등 진보적인 서적과 잡지들을 읽으며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고 공산당의 내전을 중지하고 단합하여 항일하는 주장을 찬성하였다. 공산당원 남한신의 소개로 속범정은 주은래와 오래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국가와 민족의 리익을 중시하는 공산주의자의 정치견해에 설복되여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신념을 확고히 다졌다.

속범정 렬사

1937년 9월, 속범정은 제2전구 민족혁명전쟁전선 총동원위원회 주임위원을 맡고 공산주의자와 협력하여 산서 신군을 창건하여 산서의 항일전쟁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속범정은 태원이 함락되기 전에 산서 서북에 가서 산서 제2구 보안사령을 겸임했으며 후에 림시로 편성된 제1사 사장을 맡고 팔로군 120사 하룡, 관향응 등과 합작하여 유격전쟁, 군중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함께 진서북 항일근거지를 건립했다. 1939년말, 장개석이 첫 반공고조를 일으키고 염석산이 ‘12월사변’을 발동해 진서북 항일무장을 비밀리에 소멸했다. 속범정은 직접 팔로군 제120사 제358려에 가서 상황을 알리고 대책을 연구했으며 국민당 완고파를 반격하는 싸움에 참여하고 지휘했다. 1940년 1월, 산서 신군은 총지휘부를 설립했고 속범정이 총지휘를 맡았으며 또 진서북군구 부사령원, 진서북 행정공서 행서주임을 맡았다.

1940년 겨울, 일본군이 진서북근거지에 대해 잔인하고 대규모적인 소탕을 실시하자 속범정은 행서기관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종횡무진하면서 싸웠다. 장기간의 과로로 병에 시달렸지만 그는 사람을 놀래우는 의력으로 병상에서도 공문을 교열하고 심의했으며 긴급사항을 처리했다. 병상황이 부단히 악화되여 중공중앙은 그가 연안에 가서 치료받도록 했다. 병을 치료하는 기간에도 그는 여전히 항일구국을 념두에 두었고 반동파들을 규탄하는 많은 글들을 썼다. 염석산이 팔로군을 악독하게 비방하는 데 대해 속범정은 <산서 군벌 염석산에게 보내는 글>을 써서 염석산의 추악한 행위를 호되게 비판했다.

1947년, 호종남이 연안을 침범하였다. 속범정은 섬감녕변구 당정군기관을 따라 연안에서 철퇴하던 도중에 병이 악화되여 9월 12일 산서 림현에서 사망했다. 림종을 앞두고 속범정은 중공중앙과 모택동 주석에게 쓴 유서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할 것을 신청했다. 중공중앙은 그의 청구를 받아들였으며 1947년 9월 13일 중국공산당 정식당원으로 추인되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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