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난 항일녀성혁명가 김순경
상해의 험악한 투쟁환경속에서 김순경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빠 김문철과 도개손을 비밀리에 만나 오빠 부부의 만주행을 돕기로 하였다.

2020-03-30 08:54:15

김순경의 오빠이고 저명한 혁명가인 김문철. (사진 김연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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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1월, 오빠 김문철을 걱정하던 김순경은 남편 장문렬과 함께  상해에서 할빈행에 올랐다. 이들이 언제 결혼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으나 중공상해중앙국의 지령에 의해 할빈에 자리잡은 중공만주성위로 전근하는 길이였다. 장문렬은 중공만주성위 상무위원 겸 공청단만주성위 서기로 부임하고 김순경은 공청단만주성위 선전부장인가 부녀부장인가를 맡아 나섰다.

그 무렵 상해의 당단 수뇌기관이 대파괴를 당하였다. 국제공산당 중국대표는 장문렬을 의심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지난 세기 30년대초 상해에서 공청단중앙국 교통원으로 뛰던 당익지(唐益之)는 <내가 아는 30년대 공청단중앙국>이라는 한편의 회고문(래원ㅡ중국공청단넷, 중국청년넷, 2018년 5월 2일)에서 1934년 10월의 대파괴를 언급하고 있다.

공청단중앙국은 1934년 10월에 재차 대파괴를 당했을 때 나는 투옥중이였다. 후에 공청단강소성위 교통원 척쟁음(戚铮音)동지한테서 들었는데 그번 대파괴는 원 공청단강소성위 조직부장 쑈판(小范, 즉 范正中)이 서주로 전근되여 련락원으로 있을 때 체포되여 변절한 데 기인되였다. 쑈판은 변절한 후 의연히 련락원의 신분으로 상해에 와서 공청단중앙국과 공청단강소성위 기관과 련계를 가지였다. 그들 매 사람의 숙박지를 탐지한 후 적들은 10월말에 공청단중앙국 서기 진백위와 조직부장 쑈주(小朱, 즉 李一凡, 赵克昂), 선전부장 황약면(黄药眠) 및 그들과 기관에 같이 숙박한 세 녀동지와 로의란(卢义兰), 로의매(卢义梅)를 체포하였다. 또 당중앙국에 전근되여 사업하는 락타(骆驼, 즉 徐宝铎)도 체포하였다. 락타, 진백위, 쑈주는 체포된 후 모두 변절하였다. 그번 파괴는 공청단중앙국의 사업에 엄청 큰 손실을 주었다.

당익지의 이 회고문은 1984년 8월 6일에 쓴 한단락으로서 1934년 10월, 상해의 공청단중앙국에서 나타난 대파괴를 일목료연하게 밝히고 있다. 그 시절도 그번 대파괴는 김순경이나 장문렬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시절 모스크바 국제공산당 중공대표단 왕명과 강생은 장문렬이 할빈에 간 후 만주당조직이 또 파괴를 당했다고, 당단만주성위에 내부간첩이 있다고 보게 되였다.

만주당조직의 파괴란 1935년 할빈 6.13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은 한 변절자의 밀고로 터지면서 우리 동지 52명이 체포되고 당조직이 엄중한 파괴를 당한 사건이였다. 이 사건은 북만 전역에 신속히 파급되면서 그 엄중도가 보다 험악하게 번져갔다. 그럼에도 1935년 할빈 6.13사건은 김순경이나 장문렬, 당단만주성위 동지들로 기인된 사건이 아니였다.

김순경의 발자취 어린 지난 세기 30년대 할빈 거리의 한 모습.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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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선 1934년 6월, 중공상해중앙국 서기 리죽생(李竹生)이 체포되여 변절한 사실도 그러하다. 멀리 모스크바의 왕명과 강생은 상해중앙국에서 만주성위에 파견한 지도간부들은 모두 간첩이라고 보았다. 전임 만주성위 서기 림전암이나 후임 서기 왕덕(王德)도 그러하고 왕덕의 부인이고 선전부장인 담국보(谭国甫)도 그러하고 후임 서기대리 양광화(杨光华)도 그러하고 공청단만주성위 김순경과 장문렬도 그러하다고 한다.

그런 취지에서 왕명과 강생은 선후 두번이나 만주성위에 모스크바로의 소환전보문을 띄우며 기세등등했다. 그렇게 모스크바로 불리워간 중공만주성위 서기 림전암(林电岩, 1900ㅡ1938)은 종무소식이였다. 1934년말 중공만주성위와 중공상해중앙국과의 련계가 끊어지니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는 왕명과 강생은 중공주재 공산국제대표단의 명의로 모스크바에 전보명령을 내렸다. 1935년초의 긴급 전보문에서는 만주성위의 문건은 모두 없애라, 만주성위의 책임동지들은 전부 모스크바에 모여 만주사업문제를 토의한다… 등등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전보명령에 중공만주성위 서기 양광화는 선전부장 담국보, 공청단만주성위 서기 장문렬 두 상무위원과 더불어 긴급회의를 가지였다. 회의에서 담국보는 보존가치가 있는 성위의 문건들을 전부 소각하는건 손실이 너무 크기에 부분 중요한 력사문건들은 공산국제에 보내 보관하도록 하자고 제의하였다. 쑈뤄(小骆)로 불리우는 장문렬은 이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양광화도 같은 의견이였다.

회의는 또 모스크바행은 양광화와 담국보 둘만이 가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양광화는 4월 5일에 만주성위 산하 각지 당조직은 독립자주적으로 사업하여야 한다는 통지문을 내림과 아울러 성위 상무위원이고 공청단성위서기인 장문렬이 만주성위 대표로 남아 성위 일상사무를 보도록 위임하였다. 그때가 1935년 4월이다.

김순경은 남편 장문렬을 통하여 사태의 엄혹성,비상시기의 중공만주성위의 이모저모를 모두 알게 되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다. 그는 만주성위가 사실상 철소됨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였다. 그럴 때 상해 쪽에서는 공청단중앙국이 재차 파괴(1935년 7월)당하고 공청단중앙국 서기 왕문덕은 체포되여 변절하고 말았다. 공청단중앙 조직부장 장신달(张信达)과 공청단중앙 교통원 유서원(俞西远)도 체포되니 공청단중앙국에는 선전부장 과부(戈夫) 하나만이다.

그 사건에 도개손은 휘말려들지 않았으나 한창 임신중이여서 건강이 형편없이 못해졌다. 따라서 맡은바 사업에도 지장이 없지 않았다. 그것이 안타깝지만 도개손은 입술을 깨물었다. 김문철과 도개손의 정식결혼은 1935년 초의 일이다. 이해 12월 7일에 도개손은 아들애 김연상(金燕祥)을 낳았다. 그럼에도 도개손은 남편 김문철과 새로 공청단원으로 발전시킨 리지중과 셋이서 《소년진리보》를 꾸려나갔다. 상급의 지도가 없는 현실 속에서 어려운 신문꾸리였다. 《소년진리보 (少年真理报)》는 공청단강소성위에서 꾸리는 신문으로서 발행량이 1000여부에 이르니 쉽지가 않은 일이였다.

김순경의 발자취 어린 30년대 할빈 거리의 한 모습.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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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진리보》의 어려운 시기를 넘기면서 김문철 부부는 조직의 지령으로 곧 만주행에 오르게 되였다. 이 일은 극비여서 누구도 알수가 없었지만 1935년 3~7월간 림시공청단중앙국 교통원을 맡은 유서원(俞西远)은 김문철 부부의 만주행을 두고 직감하고 있었다. 후일 그는 그 시절을 두고 이렇게 회고하였다.

“상급에서 나에게 일부 문건을 주면서 내가 베낀 다음  도개손에게 주라고 하였다. 모두 만주공작에 관한 당의 관련 기밀문건이였다. 그중 당중앙이 만주공작에 대한 지시와 결정, 만주성위에서 당중앙에 드리는 보고 및 만주정세에 대한 분석 등등이 들어있었다. 이런 문건들을 어찌하여 도개손에게 주어야 하는가를 상급에서 해석하지 않았다. 도개손도 문건을 받은 후 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도개손도 만주로 파견된다고 보았다.”

유서원의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확실히 김문철 부부는 만주성위란 새로운 과업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조직관계가 끊어져 만주로 인차 가지 못하고 상해에 머무르는중이였다. 그때 김문철 부부와 만주성위와의 련락자로 나서면서 손을 잡아준 이가 있었으니 다름아닌 김문철의 녀동생 김순경이였다.

몇달이 지나 그해 1935년 겨울철이 돌아왔다. 11월, 김순경은 중공만주성위를 지켜선 남편 장문렬의 특수비밀과업을 지니고 할빈을 떠나 상해에 숨어들었다. 특수비밀과업이란 련락이 단절된 중공상해중앙국을 찾는 일이였다. 상해의 험악한 투쟁환경 속에서 김순경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빠 김문철과 도개손을 비밀리에 만나 오빠 부부의 만주행을 돕기로 하였다.

그렇게 첫 처사가 태여난지 얼마 안되는 오빠의 어린 아들애를 북평에 안전히 데리고가서 둘째 오빠의 부인으로 되는 언니 리석경(李皙卿)에게 맡기는 일이였다. 다음은 할빈으로 돌아가서 남편 장문렬에게 김문철과 도개손의 전근을 알리는 일이였다. 장문렬은 도개손한테 광서, 광동, 사천, 산동, 하북 등지의 비밀련락선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도개손에게 자기의 극비통신처를 알리였다.

비밀전보였다. 김문철 부부는 김순경의 도움으로 끝내 만주성위와 관계를 가지였다. 흥분된 그들 부부는 멀리 떨어진 만주성위에 자기들 관계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고 장문렬은 장문렬대로 이는 사인관계 련락이 아니니 만주행을 똑똑히 하는 한편 보고를 부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당신들 두분은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해 공청단중앙국과는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또 꼬리를 달고 오지 못합니다. 당신들이 와서 오는 바를 잘 알리여야 관계를 넘길 수 있습니다.”

장문렬의 극비전보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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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5월 25일 새벽, 김문철 부부는 렬차편으로 할빈에 도착하였다. 비밀조직선을 좇아 김순경을 만나고 장문렬을 만났다. 그들은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오빠 동생이 아닌 동지적 악수였다. 장문렬은 비상시기에 처한 만주성위의 현실을 알리였다. 그때 만주성위에는 장문렬 한사람 뿐이였다. 그 시절 장문렬은 사실 쑈리(小李)로 통하면서 대리서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상급 당조직에서 정식으로 임명한 대리서기가 아니라 양광화 서기가 모스크바에 불리여가면서 만주성위 사업을 위임한 터였다.

김문철은 중공할빈시위 서기로, 도개손은 시위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였다. 김문철 부부는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철도와 공장, 학교 등지를 찾아다니면서 불철주야로 당의 사업을 벌리였다. 6월 상순에는 김순경의 안내로 한수괴(韩守魁, 즉 金赤民)와의 공식대면을 가지였다. 만주성위 서기 양광화가 모스크바로 소환된 후 중공주재 공산국제대표단에서 밀파한 사람이였다.

그럴 때 1935년 할빈 ‘6.13’사건이 터지면서 할빈 당조직은 엄중한 파괴를 당하였다. 헌신적인 사업은 물론 김문철 부부의 처지는 매우 위태로왔다. 만주성위 대표 장문렬은 이들 부부가 신속히 할빈을 떠나도록 하였다. 6월 17일, 바로 6.13사건이 터져 나흘째 되던 날 김문철 부부는 김순경의 극비리 배웅 속에 할빈을 떠나 북평행에 올랐다.

한편 왕명, 강생은 만주성위의 나머지 인원들을 계속 모스크바에 보내 심사를 받도록 엄명을 내리였다. 한수괴는 할빈으로 온 후 중공만주성위를 철소하고 동북의 4대 유격구를 중심으로 길동, 동만, 남만, 북만 4개 성위와 할빈특위를 조직한다는 공산국제대표단의 지시를 전달했고 6월에 장문렬은 성위대표의 명의로 동북각지 당조직들에 중공만주성위를 정식으로 철소한다는 통지를 내리였다.

잇달아 중공길동성위, 동남만성위(남만성위로 불리움), 북만성위와 할빈특위가 륙속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순경의 역할도 자못 큰 것으로 알려진다. 김순경과 그의 남편 장문렬은 동북항일투쟁의 긴요한 력사시기에 마멸할 수 없는 불멸의 위훈을 세웠다. 이런 관계로 김순경 부부는 모스크바행을 거듭 늦추다가 1936년 7월 1일에 이르러 두살배기 딸애 해라(海拉)를 데리고 만주리(满洲里)를 거쳐 이국행에 올랐다.

김순경 부부는 할빈출발을 앞두고 한수괴의 집에서 하루밤을 지우게 되였다. 한수괴가 작별식사를 마련하였다. 한수괴(이들 부부가 할빈을 떠난 후 적들에게 체포되여 변절)는 특별히 장문렬의 이른바 내부간첩문제는 허위이다, 당조직에서 인차 해명해줄거다 라고 말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은 어떠하던가, 김순경 부부는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얼마 안되여 강생 등에 의해 인차 처결되는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1936년 이해 김순경(1913ㅡ1936)은 24살, 장문렬(1911ㅡ1936)은 26살 한창 나이였다. 이들 부부의 두살배기 딸애 해라는 어떻게 되였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지난 세기 30년대 초반과 중반 북평과 상해, 할빈 등지에서 혁명투쟁에 나선 우리 민족의 저명한 녀성항일혁명가 김순경과 그의 남편 장문렬은 이렇게 쓰러졌다. 우리 민족이 지금껏 모르던 김순경, 김순경전기는 연변일보를 통하여 우리 민족사상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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