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가 겸비한 혁명렬사 곽상생

2020-04-03 09:18:40

하남성 남양시 진평현 후집진에 위치한 곽상생렬사릉원은 푸른 소나무에 가려진 가운데 ‘곽상생 렬사의 묘’라는 묘비가 조용히 세워져있다. 남양시 애국주의교양 시범기지인 렬사릉원에서 전해져내려오는 영웅사적은 이곳에 와서 성묘하는 간부군중들을 또 한번 감동시키고 있다.

곽상생은 일명 곽치청이라고도 했으며 1911년 하남성 진평현에서 태여났다. 1931년 하남 개봉예술사범학교에 입학하였고 1933년 완서중학교에서 중국화 교원직을 맡았다. 중공지하당원의 영향하에 그는 사상이 날로 진보하여 사회의 암담함을 예리하게 폭로하는 수많은 미술작품을 창작하였다.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그는 항일구국운동에 적극 투신하여 ‘평형관 항일대첩 ’,‘장백산의 동북항일련군’ 등 200여폭의 항일구국 선전 만화, 유화를 창작하여 군중들의 항전열정을 격려하였다.

곽상생은 1938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자마자  중공진평현위의 파견을 받고 진평 민단사령부 교도대에 참가하여 정치교관을 맡았다. 완남사변 후 곽상생은 당의 지시에 따라 호북에 가 전전하며 신사군에 참가하였고 홍산공학 고급반 지도원, 당총지  서기직을 맡았다. 같은 해 6월 새로 개척한 한(천)효(감)(황)파 근거지에 가 군정련합판사처 주임직을 맡았고 무공대를 거느리고 적후에 들어가 6개 구위, 구정부를 건립하면서 한효파근거지를 점차적으로 확대하였다.

1943년 곽상생은 악예변구 세무총국 천한분국 국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당지 실정에 알맞게 당의 변구 세수정책과 재정정책을 견결히 관철, 집행하였고 인민들을 단결하여 항일 적후근거지에 대한 적들의 경제봉쇄를 분쇄하였으며 근거지 내외의 물자류통 경로를 소통시키고 변구에 대량의 물자자원을 제공하였다. 전면적 내전이 폭발한 후 곽상생은 형당원(오늘의 형주, 당양, 원안) 중심현 현장직을 맡고 명령에 따라 적후사업을 견지하였다.

1947년 5월, 반역자의 밀고로 곽상생은 불행하게 체포되였다. 적들의 갖은 혹형에서도 그는 시종일관 굴복하지 않았고 죽음을 초개같이 여겼다. 회개서를 쓰라고 핍박하는 적들에게 그는 떳떳하게 “탐오하지 않았고 나라를 팔아먹지 않았으며 인민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도대체 무슨 죄를 범했는지 모르겠다. 후회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썼다. 11월 15일, 진평 해방 전야에 적들은 곽상생을 형장으로 압송하여 살해하였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37살밖에 안되였다.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국민당 반동파를 타도하자!”, “중국공산당 만세!”, “중국인민해방군 만세!”를 높이 웨쳤다.

  진평진 후집진 상생소학교의 교수청사 앞에는 곽상생 렬사의 동상이 우뚝 솟아있다. 상생소학교 교장 당자항은 “우리 학교에서 공부한 적 있는 곽상생 렬사를 기념하기 위해 학교 명칭을 상생소학교로 바꾸었다. 학교에서는 해마다 청명이면 선생님과 학생들을 조직하여 렬사동상 앞에서 혁명선렬을 기리는 활동을 진행함과 동시에 곽상생렬사릉원에 가 성묘한다.”고 소개하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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