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알려지는 혁명가 김홍선
보다 흥미로운 것은 채평은 항일무장투쟁의 피어린 나날 북만땅에서 항일련군 명장으로 활동했던 항일혁명가 김책의 형님이라는 점이다.

2020-04-07 09:01:27

사진 한장으로부터 채평ㅡ김홍선을 처음 떠올린 한족 젊은 친구 삼경감사(三镜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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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만이라 불리운 오늘의 흑룡강성은 조선족 항일혁명가들의 발자취가 곳곳에 스민 불멸의 땅이다. 그 가운데서도 탕원현은 항일의 불길이 드세게 타오르며 후날 항일련군 제6군을 탄생시킨 력사의 고장이려니 이 고장에는 이름난 조선족 항일혁명가들이 많고도 많았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조선족 항일혁명가 김홍선(金洪善, 채평으로 불리웠음)은 그들중의 한명이다.

김홍선은 채평(蔡平)이란 가명으로 라북현으로 불리운 탕원현 오동하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드러난다. 그때가 1927년 여름이다. 채평을 자주 언급한 사람들은 이곳 오동하 출신의 항일련군 녀전사들인 리민과 리재덕으로 알려진다. 리민과 리재덕의 여러 회고문과 기타 사람의 여러 취재 원고들엔 탕원현 오동하가 자주 오르내리며 그때마다 채평이 꼭꼭 등장하군 한다.

그렇다면 오동하에 등장하는 채평은 누굴일가. 유감스럽게도 리민이나 리재덕이 채평을 더 알리지 않았기에 우리는 채평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채평에 대해 더는 중시를 돌리지 못하여 채평은 조선족항일사의 한페지를 이루지 못한 채 묻혀갔다. 정말 채평에 대해 더는 알 수 없는 걸가, 아니였다.

지난해 2019년 12월 19일, 연변대학 예술학원 전임 교수 남희철씨는 자기의 모멘트에 한편의 추천의 글을 올리였다. 추천글 제목은 <조선 개국원로 김책의 형님 채평을 찾아서(寻踪朝鲜开国元勋金策之兄蔡平)>인데 채평이란 이름이 어쩐지 눈에 익었다. 아, 항일련군 녀전사들인 리민, 리재덕의 탕원현 오동하 회고에 자주 등장하던 채평이 아닌가. 급기야 남희철씨가 올린 추천글을 읽어 내려가니 탕원현 오동하에서 활동한 채평이 옳았다. 너무도 흥분되는 시각이였다.

<조선 개국원로 김책의 형님 채평을 찾아서>라는 글은 삼경감사(三镜鉴史)라는 젊은 한족친구가 정리한 한편의 글이였다. 글은 북만땅에서 일찍 항일련군 명장으로, 중공북만성위 서기로 활동한 김책을 소개하면서 김책의 형님은 채평이고, 채평은 탕원현에서 활동한 혁명가로서 1935년 5월에 중공해룡구위 서기를 맡은 바 있으며 1936년 9월에 희생되였다고 밝히고 있다.

바이두(百度)에서 채평을 검색하니 지난 세기 30년대 중반에 길림 반석지역의 해룡현에서 중공해룡구위 서기로 활동한 채평 소개글이 적지 않게 떠올랐다. 여러모로 검색하면서 검토하여 보면 채평은 탕원현에서 활동하다가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을 받고 북만에서 남만지구로 파견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삼경감사의 글이 옳았다.

여직 알지 못해 유감으로 남았던 조선족 항일혁명가 채평의 재등장이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채평은 항일무장투쟁의 피어린 나날 북만땅에서 항일련군 명장으로 활동했던 항일혁명가 김책의 형님이라는 점이다. 채평의 본명은 김홍선이며 김홍선의 고향이며 가족사, 이주사가 쭉 이어서 드러났다.

2019년 9월 18일, 화룡시 및 동성진 관련 인물들과 옛 래풍동마을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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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평의 본명은 김홍선(金洪善, ?-1936)이다. 출생일은 밝혀지지가 않으나 김홍선 동생 김홍계(김책)의 출생년도가 1903년인 것으로 보아 그보다 몇년 앞선 것으로 헤아릴 수 있다. 고향과 가족관계를 보면 함경북도 성진군 학상면 봉평촌(城津郡鹤上面棒枰村)태생이고 빈농가 출신, 할아버지는 김군직(金君直), 아버지는 김지모(金智模), 어머니는 박씨(朴氏)로 알려진다. (연변대학 2005년 5월 20일 석사학위 론문, 김책의 항일혁명활동 연구, 연구생 姜圣天, 지도교원 金成镐) 김홍선의 형제로는 아래로 동생 김홍계(金洪启, 둘째)와 김홍희(金洪熙,막내)가 있다.

이들 김씨 일가가 중국으로 이주한 것은 1910년 10월경으로 알려진다. 이해 1910년, 일본제국주의가 이른바 한일합병으로 조선을 강점하니 일가족 모두가 고향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너섰던 것이다. 김책 관련 인터넷 검색이나 2009년 12월 29일자 흑룡강신문 기사-<김책 동북항일투쟁의 탁월한 지도자>에서도 모두 1910년 설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김씨 일가의 이주 원인을 두고 김홍선의 아버지는 물론 김홍선도 반일운동에 뛰여들다가 망명한 것으로 윤색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실제와 어긋난다. 사실은 살길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넌 것이였지 이른바 망명이 아니였다. 말 그대로 털면 먼지 뿐인 그들은 연변으로 이주한 후 지주의 소작농으로 살아가야 하였다. 김홍선의 동생 김홍계, 즉 후일 김책이 지주집 목동살이를 했다는 것도 가난한 살림 때문이였다.

하다면 김씨 일가의 그 시절 두만강 이북 정착지는 어디일가, 김홍선의 바로 아래 동생 김책은 자기의 리력서(金策履历书, 1941.1.11,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甲60,1991年)에서 길림성 연길현 평강 기성촌(平岗基成村)으로 밝히고 있다. 관련 모든 연구자료들은 모두 이 평강 기성촌 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시절 평강벌 해란강 량안에는 기성촌이란 마을을 쉽게 찾아낼 수가 없다. 사실은 기성촌이 아닌 해방 후 보성촌이였던 것이다.

평강 보성촌도 지난 세기 10년대, 20년대로 말하면 틀리는 명칭이다. 그 시절 행정구역으로의 명칭은 연길현 수신향 래풍동(守信乡来丰洞)이였다. 래풍동도 남북 10여리 골안어구와 골안치기를 중심으로 여러개 마을들로 되여있었는데 김홍선네는 래풍동이라 불리우는 래풍동의 중심지에 자리잡았다. 래풍동은 지금의 화룡시 동성진 서쪽 3리가량 되는 철길 남쪽가 마을-보성 12대에서 남쪽으로 뻗은 골안 따라 10리 쯤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난해 2019년 9월 18일, 화룡시와 동성진 관련 부문과 더불어 래풍동을 찾았다. 동성진 주변 마을 보성 9대에는 개척리와 래풍동 유래를 잘 아는 정세건(郑世建,70세) 로인이 계시였다. 정세건 로인의 안내하에 래풍동을 찾으니 래풍동 옛 마을은 언녕 사라지고 마을자리 가을 맞은 옥수수밭만이 우리를 맞아주고 있었다.

2019년9월 18일 찾아 본, 김홍선의 어린 시절 정착지ㅡ오늘의 화룡시 동성진 보성촌 래풍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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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주사의 한 축도로 되는 래풍동에 첫 조선이주민들이 나타난 것은 1900년경으로 헤아려진다. 지금의 원 동성진 명풍촌과 보성촌 일대 그리고 남으로 뻗은 여러 골안 따라 한호 두호 모여들면서 개척리, 소오도구, 래풍동 등 중심마을들이 이루어졌다. 우리 연변에서 세전이벌의 벼농사가 1900년에 시작되고 룡정 남쪽 가까이 대불동어구에서 1906년에 벼농사가 시작되였다고 할 때 평강벌의 벼농사는 개척리, 소오도구, 래풍동의 조선이주민들로부터 시작되였다.

조선의 함경도 길주, 명천 등지의 이주민들은 1900년경 이곳 이주와 더불어 약 3헥타르의 수전을 풀어 밥상에 이밥을 올려놓을 수가 있었다. 수원부족으로 소출이 그닥잖으니 1904년에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벼종자를 가져다가 벼 생산량을 높인 력사를 기록하여놓았다. 이것이 그대로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개척》(민족출판사, 1999년 10월 출판) 제335페지와 336페지에 실려 오늘까지 전해진다.

이주 초기 그 시절에 빠져보니 감구지회가 새로운데, 래풍동 옛 마을터에서 정세건 로인께서 옛날 로인들 말씀에 따르면 자기가 사는 보성 9대가 옛날 이름난 개척리마을이고 철길너머 골안어구 마을이 보성 12대이며 골안치기 쪽에 자리한 래풍동마을은 수십호 인가를 가진 사람 사는 동네였다고 소개하여주니 실감이 난다. 그는 최근년간 원래의 명풍촌과 보성촌이 합병되여 보성촌으로 불리면서 옛 개척리 마을 명풍 2대가 보성 9대로, 명풍 5대가 보성 12대로 명칭을 달리했다고 동을 달기도 한다.

알고 보니 옛날 래풍동 지대가 보성촌구역으로 된 것은 그런 연유였다. 이런 래풍동마을에 김홍선네가 살았으니, 조선의 고향땅에서 이주를 결단하며 두만강을 건너설 때만 하여도 김홍선의 아버지 김지모는 아직 어리긴 하지만  끌끌한 아들 셋이니 이들이 자라면 두만강 북안 북간도에서 남부럽지 않은 살림을 차릴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였다. 이제 뒤에서 밝혀지지만 김홍선 삼형제는 모두 아버지의 소박한 념원과는 달리 이주 후 자라면서 항일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이는 래풍동에서 그닥 멀지 않은 룡정과 관련되였다.

사실 룡정과 래풍동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여서 래풍동에서 북쪽을 따라 골안어구까지 10리, 골안어구에서 동으로 룡정까지 20리 거리였다. 룡정의 유래를 두고 1884년에 조선 회령에서 온 장인석, 박윤언 두 농민이 오늘의 룡정에 들어선 것이 처음이라고 하는데, 1907년에 이르러야 룡정의 인구는 조선이주민 96세대에 중국인 5세대까지 도합 400여명(리광인. 조선족력사문학연구문집, 한국학술정보, 2006년 11월 출판, 제158페지)에 불과하였다. 그 뒤 몇년이 지나지 않아 조선의 회령, 종성, 무산 등지로부터 두만강을 건너오는 조선이주민이 급격히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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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2월의 관련 통계에 따르면 룡정의 인구는 3312호에 1만 5448명(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2-불씨, 민족출판사, 1995년 12월 출판, 제90페지)으로 알려졌다. 그중 조선이주민만 해도 2343호에 1만 1378명이였다. 룡정은 일약 국자가를 릉가하면서 연변의 제일 큰 도시로 떠올랐다. 룡정은 말 그대로 연변의 교통, 경제, 무역의 중심지이고 조선이주민의 문화중심지였다.

1919년 즈음부터 룡정에는 사회 유지인사들이 꾸린 동흥, 대성, 은진, 명신, 영신 등 남녀중학교가 설립되면서 연변 각지는 물론 남만과 북만으로부터 조선 각지, 연해주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생들이 밀려들었다. 이에 앞서 김홍선은 래풍동에서 지방의 사립학교를 다니다가 룡정으로 달려갔으니 동흥중학교 설립자의 하나로 보란듯이 이름을 남기게 되였다.

일개 지방 산골의 한 젊은이가 동흥중학교 설립자의 하나로 떠오르기까지 김홍선은 평범하지 않은 길을 걸었다.

1910년대 초반의 연변은 초기 사회주의자이고 반일혁명지사인 리동휘와 그의 동지들인 전일, 황병길, 김약연 등에 의해 1909년에 설립된 ‘간도교육회’가 ‘간민회’(1913년)로 개칭되면서 조선이주민들 ‘귀화입적’과 문화계몽운동이 일대 성세를 이루었다.

룡정으로 진출한 김홍선은 그 시절 연변의 시대적 물결 속에 휩쓸리면서 반일운동에 나섰다. 그 직접적 표현은 1919년 3월의 룡정 3.13 반일시위운동에 나서고 안무의 국민회군에 참가하여 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에 뛰여든 데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항일혁명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의 김홍선의 인생경력을 말해주고 있다. 이 같은 인생경력의 소유자였기에 김홍선은 룡정의 유지인사의 한 사람으로 룡정 사립동흥중학교 설립에 힘을 다하게 된다.

룡정의 사립중학교 설립력사를 헤아리면 동흥중학교의 설립에 앞서 동흥소학교가 먼저 세워졌다. 동흥소학교는 1921년 4월 15일에 세워진 사립소학교로서 최익룡(崔翊龙)과 룡정의 이름난 유지인사들인 김홍선, 리주화(李周和), 한장순(韩长淳) 등이 일심협력으로 힘쓰면서 넉넉한 의연금을 모집해들인 결과(연변문사자료 제6집, 제3페지)였다. 동흥중학교는 처음 동흥소학교 부설 중학교강습소로 꾸려지다가 그해 10월 1일에 동흥중학교로 승격하게 되였다.

  연길현 수신향 래풍동 출신 김홍선이 어떻게 이름난 룡정의 유지인사의 한 사람으로 되면서 동흥중학교 설립자로 나섰을가. 아직 이에 대한 자료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어찌됐든 동흥중학교 설립 초기 교원은 김홍선 등 3명이고 교원 셋이서 4개 반 113명 학생을 가르쳤다. 그러던 동흥중학교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게 되였으니 바로 로씨야 10월혁명의 영향과 1921년 상해 중국공산당의 창건의 영향으로 맑스주의 새 리론과 사회주의 새 사상이 전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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