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알려지는 혁명가 김홍선

2020-04-13 08:49:08

지난 세기 30년대 체조를 하는 룡정 동흥중학교 학생들 모습. 멀리 비암산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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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대 초기의 룡정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 두 중학교 학생들 속에서 맑스주의를 연구하는 과외써클소조ㅡ‘광명회’가 조직되고  ‘사회과학연구회’, ‘친목회’, ‘독서회’ 등이 조직되면서 동흥중학교는 부글부글 끓었다. 동흥중학교 교원으로 활동하는 김홍선은 그 시절 리주화, 리린구(李麟求), 박윤서(朴云瑞), 주청송(朱青松) 등과 더불어 로씨야 10월혁명의 사상과 맑스주의 새 사상을 전파하는 운동의 진두에 나섰다.

1924년에 제1대 교장 최익룡의 뒤를 이어 한장순이 제2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학생 규모가 9개 반 402명으로 늘어나니 교원도 원래의 3명으로부터 9명으로 늘어났다. 따라서 경비난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면서 한장순, 김홍선 등은 조선 각지 의연금 모집(연변문사자료 제6집, 제8페지)에 나서게 되였다. 김홍선과 한장순 등이 회령, 웅기, 청진, 함흥, 원산, 서울 등지를 부지런히 다니며 최선을 다한 덕분에 학교의 운영은 많은 호전을 가져왔다. 그때가 1925년으로 헤아려진다.

룡정 동흥중학교 교원시절 김홍선의 동생 김홍계(김책)가 동흥중학교에서 중학공부를 시작하였다. 소학교는 정규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야학교에 다니며 글을 배웠다지만 이에 대해선 알려지는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동흥중학교 입학에 앞서 형님 김홍선의 영향으로 이미 일제놈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나선 김홍계가 중학교를 다니면서부터 본격적인 혁명가의 생애를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1926년 5월에는 만주총국이 설립되였다. 이해 10월에는  또 만주총국 산하 동만구역국(동만도)이 설립되면서 동만구역국은 점차 산하 9개 군, 19개 세포조직으로 발전했다. 김홍계는 동만도 산하 9개 군 가운데 하나인 평강군 오도구 세포(지부) 책임자로 나타난다. 김홍계는 동흥중학교 재학생이자 오도구 세포 책임자로 맹활동을 벌리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비암산 서남쪽, 평강벌 동쪽에 자리잡은 래풍동과 그 일대는 만주총국 동만도(화요파)의 소재지로 되였다. 동지들 속에서 래풍동 골안어구 개척리는 ‘화요파공산당’이라는 소문이 크게 나돌았다. 그들 형제는 동지들과 더불어 평강벌 서쪽가의 예수촌(오늘의 진달래촌)과 장인강 등지를 자주 다니면서 조직발전에 힘을 보태였다.


광주 황포 장주도에 위치한 복원된 황포군관학교.           (2007년 5월 19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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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26년.

조선이주민들에게 북간도로 불리운 연변에는 조선사람들을 피어린 반일투쟁에로 나설 때 남녘땅 광동 광주에서는 이에 앞서 손중산 선생이 지도하는 황포군관학교가 창설되고 국민정부가 조직되면서 광동성 경내의 군벌세력이 숙청되고 광동 혁명근거지가 수립되여있었다.

광동의 획기적인 변혁은 조선 본토와 만주, 쏘련 연해주 등지의 조선사람들을 기쁨과 흥분에 벅차게 하였다. 그들은 중국의 새로운 변혁을 자기 조국 해방의 제1보로 간주하였다. 조선인 선진분자 수백명은 사회주의 계렬 ‘적기단’  등의 조직하에서 ‘국공합작’, ‘군벌 타도’, ‘제국주의 타도’의 불타는 념원을 안고 일본, 조선, 만주, 쏘련의 연해주 등지로부터광주에 모여들었다.

그들 수백명 조선인 선진분자 가운데의 한사람이 김홍선. 김홍선이 어떤 비밀통로로 광주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주총국 동만도의 부름을 받은 것은 드팀없는 사실이다. 동시기 화룡현 개산툰 문암동의 장자관, 개산툰 자동의 박의정, 한영섭, 김영식과 훈춘현 대황구의 엄상호, 리태훈, 리상준, 강석필 등도 그러하고 후날의 중공화룡현위 서기 김철산, 중공연길구위 서기 조기석, 중공훈춘현위 군사부장 신춘, 중공화룡현위 군사부장 방상범 등도 그러하다. 그들은 적기단의 파견으로 상해를 거쳐 광주로 달려갔다.

유감스럽게도 김홍선의 광주행 연구자료가 보이지 않는다. 바이두(百度)를 검색하면 김홍선이 중국 이름 채평으로 떠오르면서 황포군관학교에서 학습했다,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광주봉기도 참가하였다고 소개하여 고무를 받을 뿐이다.

흑룡강성 탕원현 항일투쟁 관련 자료를 보면 채평으로 떠오른 김홍선은 1927년 여름 이곳 오동하에 나타나 동지들과 더불어 라흥학교를 꾸리면서 혁명의 불씨를 뿌려가는가 하면 이곳에서 조선공산당 당원으로부터 중국공산당으로의 수속관계를 밟는다. 이런 자료들은 아주 많은데 그 출처는 모두 오동하 출신 항일련군 녀전사들인 리민과 리재덕 회고자료로 되고 있다.

여기 리민과 리재덕의 회고자료에서 우리는 김홍선이 오늘의 탕원 오동하에 나타난 때가 1927년 여름이고 이곳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는 점에 주의를 돌리게 된다. 이는 드팀없는 력사사실이여서 상기  황포군관학교 시절 입당과 광주봉기(1927.12) 참가는 그러려니하고 지어낸 언급임을 알게 된다.

이에 따라 우리는 김홍선이 황포 몇기생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소속부대를 따라 1926년 7월 이후 북벌전쟁에 참가하여 무한에 이르렀고, 1927년 장개석의 상해 ‘4.12’ 반혁명정변으로 위대한 북벌전쟁이 좌절된 후 무한을 떠나 북만 탕원에 이르렀음을 추측하여 볼 수가 있다. 물론 어느때 어떻게 무한을 떠났고, 어떤 경로를 통하여 북만으로 갔는지는 모르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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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선(채평) 연구로 보면 그는 북만에 간 후 먼저 탕원으로 간 것이 아니다. 김홍선은 먼저 녕안 동경성에 가서 자기가 일찍 소속되여 활동하던 만주총국을 찾았고 만주총국에서 그를 오늘의 탕원현 오동하로 파견하였다. 김홍선 혼자만이 아니였다. 당원들인 리춘만(李春满), 한우(韩友), 김리만(金利万), 최영일(崔英日) 등 화요계 계렬 5명 동지들도 김홍선과 더불어 만주총국의 파견으로 오동하 복흥툰  하동(河东)에 선각자로 나타나  라흥학교(罗兴学校)를 꾸리면서 반일사상을 선전하는 한편 여러 반일군중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오동하 마을은 라북현(오늘의 탕원현) 경내 송화강 하류에 위치한 고장으로서 오동하가 송화강에 흘러드는 하구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고장은 토지가 비옥하고 수원이 좋아 1922년에 이미 몇호의 조선이주민들이 모여 논을 풀고 벼농사를 지었다. 1924년경에는 민국 흑룡강성정부에서 조선이주민을 많이 받아들여 오동하 량안을 개척하게 해 오동하 하류 량안의 조선이주민은 일약 300여호에 달하였다. 조선사람 마을은 대외로 복흥툰이라 불리였다.

1925년경에 그 시절 흑룡강 독군(督军)인 오준생(吴俊生)과 만복림(万福林) 이 오동하 일대를 차지하고 조선이주민들을 받아들여 농장을 꾸리였다. 그 후까지 도합 두세패로 심양, 할빈 등지에서 조선이주민들이 들어섰고 가장 많을 때는 600여호로 치달았다. 농장은 후일 ‘복풍도전회사(福丰稻田公司)’로 개칭되였다.

김홍선 등 6명은 선참 오동하와 그 주변 마을들을 찾았다. 그들은 하동과 하서로 나뉘여진 오동하 복흥툰에서 군중들의 힘을 모아 하동에 몇칸짜리 초가집을 짓고 ‘라흥학교(萝兴学校)’라고 불렀으며 조선이주민 학생들을 받아들여 문화지식과 반일사상을 전수하였다. 학교 밖에서는 반제동맹과 부녀회, 소년탐험대 등 반일군중단체를 조직하며 혁명의 불씨를 뿌리기 시작하였다.

그런 와중에 만주총국 산하 동만구역국(동만도) 동지들이 활동하는 연변에서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이 터지였다. 사연은 이러하였다.

그 시절 만주총국은 기본상 화요파 동지들로 조직되였다. 1927년 5월 1일, 만주총국 산하 동만구역국은 룡정과 투도구를 중심으로 5.1국제로동절기념 시위행진을 성대히 벌리면서 조선과 북간도에 대한 일제의 침략과 조선민족에 대한 파쑈적 만행을 규탄하였다. 반일시위투쟁이 별다른 저애가 없이 뜻대로 진행되자 만주총국 책임자들은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해 10월 2일 저녁에 그들은 동만구역국 책임비서 장재윤의 집에 모여 또 한차례 반일대시위에 대해 토의했다. 이 소식을 탐지한 간도일본총령사관 순경들은 이날 밤 11시경에 룡정 정재윤의 집을 포위하고 불의의 습격을 들이댔다. 안기성, 즉 정재윤을 비롯한 만주총국과 동만구역국 주요 책임자들, 산하 각 군의 책임자 등 29명 동지들이 붙잡혔다.


지난 세기 20년대 오늘의 탕원현 오동하의 송동모범학교 옛터.    (왕기 촬영,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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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29명중에는 조공당 만주총국 책임비서 대리이고 조직부장인 최원택과 만주총국 선전부장 김동명 그리고 대성중학교 박재하교장 등 4명 교원이 섞여있었다. 소식이 전해지자 대성중학교는 불도가니와도 같았다. 이튿날 오전 2시간 수업을 마친 후 김소연 선생이 제의하자 학생들은 학교내 청년총련맹의 지휘하에 거리에 떨쳐나가 반일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동흥중학교의 학생들도 떨쳐나섰다. 분노의 함성은 룡정시가지를 들썽해놓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놈들은 사처에서 100여명의 간부와 민중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였다. 이른바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이였다.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은 만주총국과 동만구역국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그 사건에서 만주총국과 동만구역국의 령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원 화요파 계렬이 크게 손실을 입었다. 만주총국은 지도기구를 개편하면서 리동성을 책임비서로, 김성덕을 조직부장으로, 김홍선을 선전부장으로 내세웠다. 만주총국에서의 김홍선의 지위와 역할을 잘 알려주고 있었다. 이에 앞서 김홍선은 1926년 1월 25일 룡정에서 설립된 소속 동만청년총동맹의 집행위원이였다.

이듬해 1928년 봄에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인 최석천(崔石泉, 즉 최용건), 리인근(본명 李云健, 별명 张世振) 두 동지가 리인근의 조카인 리영근 등과 함께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을 받고 탕원현 오동하에 와서 먼저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오동하일대에서 원래의 복흥툰 라흥학교(萝兴学校)를 계속 잘 꾸리는 한편 김홍선 등과 함께 오동하 하서(河西)에 송동모범학교(松东模范学校)를 더 꾸리고 초생범위를 하강(下江) 전체의 조선학생들로 넓히였다.

1928년말에 중공당원인 최석천은 당지의 혁명청년들인 배치운(裴治云), 김성강(金成刚)을 첫패로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받아들이였다. 이듬해 1929년초에 또 김정국(金正国), 마덕산(马德山), 서광해(徐广海), 장흥덕(张兴德) 등을 당조직에 받아들이고 하강(下江)에서의 첫 중공당지부를 조직하였다. 최석천과 리인근은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으로 활동하는 황포군관학교 출신 조선인 중공당원들이였다.

1929년 늦가을에 중공만주성위의 문건규정에 좇아 채평, 리춘만 등 6명을 중공당원으로 넘기였다. 때는 1929년 11월이니 최석천은 채평, 리춘만 등과 함께 탕원현 학립북 7호툰(鹤立北7号屯, 오늘의 新华车站)에서 전문회의를 가지고 리춘만을 서기로 하고 배치운(裴治云), 김성강(金成刚), 채평등을 위원으로 하는 중공탕원현위를 조직하였다. 현위 구성원 모두가 조선동지들이였다.

1930년 6월에 이르러 최석천은 리춘만, 김홍선 등 동지들과 더불어 송동모범학교에 2개월을 기한으로 하는 군정간부훈련반을 2기 꾸리였다. 리민, 리재덕 두분의 회고자료에 따르면 훈련반은 군사훈련을 위주로 하면서 정치리론과 시사정치과를 알맞게 배치하였다. 군사과는 최석천과 리은근이, 정치리론과는 리춘만-채평(김홍선)-정함평(丁咸平)이, 학원관리에 최규복(崔圭复)이 맡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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