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알려지는 혁명가 김홍선
채평은 서안탄광 로동자들속에서 한패의 선진분자들을 뽑아 로동자무장유격대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 유격대는 남만에서 활동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 제1퇀에 소속되였다.

2020-04-20 08:55:26

항일련군 출신 항일로간부 리민.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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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천과 리춘만, 김홍선(채평), 리인근 등은 송동모범학교를 기지로 련속 2기에 걸쳐 매기 2개월을 기한으로 하는 군정간부학교를 꾸리면서 170여명(어떤 자료는 140여명이라고도 한다.)의 혁명간부를 양성해냈다. 1930년 10월에는 오동하와 그 일대 농민들을 조직하여 복풍도전회사(福丰稻田公司)를 상대로 감조감식투쟁을 전개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듬해 1931년 봄에 현유의 중공탕원현위는 중공탕원중심현위로 발전했다. 리춘만이 계속 중심현위 서기로 나서고 김홍선 등이 계속 현위 구성원으로 나섰다. 1931년 가을 전례 없는 송화강 대홍수가 오동하 복흥촌을 밀어갈 때 리춘만과 김홍선 등 현위 동지들은 홍지방지투쟁을 정력적으로 벌리면서 혁명활동을 줄기차게 이어갔다.

김홍선과 동지들은 전력을 다하여 탕원현을 중심으로 하는 항일유격대 건설에 살손을 붙이였다. 이어 탕원반일유격대가 탕원민중반일유격총대로 발전하면서 그 후 항일련군 제6군의 토대가 마련되여갔다. 김홍선은 최석천, 리인근, 리춘만 등 동지들과 함께 탕원반일유격대와 항일련군 제6군 창립에 기여한 항일혁명가 가운데의 한사람이다.

그러던 김홍선이 탕원과 그 일대에서는 더 보이지 않는다. 물론 탕원시절은 채평으로 통하였다. 어디로 갔을가? 어떻게 되였을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년 8월 출판)에서는 김홍선을 반경유(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서 선후하여 중공녕안중심현위 서기, 중공수녕중심현위 서기, 중공기리동국 조직부장, 중공만주성위 순시원을 력임)로 리해하면서 1933년 7월, 유격대내 민생단 혐의자 숙청을 주도하다가 박두남에게 살해되였다고 밝히였다.

김홍선의 친동생인 김홍계도 형님의 실정을 알지 못하였다. 하여 김홍계(김책)는 1941년의 자기 ‘리력서’에 1938년에 주보중 동지에게서 들었다면서 동만에서 민생단 혐의로 피살되였다고 언급하였다. 김홍선의 친동생도 그러하니 김홍선의 결과를 누구도 고증하지 못하였다. 김책 관련 글들은 한어문으로 인터넷을 덮고 있고 전문 석사연구론문도 씌여졌지만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 2019년이 되였다. 바로 지난해 2019년 12월 19일, 앞에서와 같이 남희철씨가 자기의 모멘트에 한편의 추천의 글을 올린 것이 발단으로 되였다. <조선 개국원로 김책의 형님 채평을 찾아서(寻踪朝鲜开国元勋金策之兄蔡平)>란 추천의 글은 글의 주인공 채평이 곧 김책의 친형님이라는 것과 채평의 최후를 밝히고 있다. 글의 발표시간은 2019년 11월 5일이고 위챗계정은 소맹독사 삼경감사(小孟读史 三镜鉴史)로 되여있었다.

항일련군 출신 리재덕 젊은 시절 사진.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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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에 따르면 작자는 2015년 11월 23일 오후 1시,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제2기 고전적 고미술(古典籍古美术)  경매행사에서 우리 항일련군 옛 사진들에 주의를 돌리였다. 그중 한점의 사진은 중공해룡구위 서기 채평ㅡ두대포(杜大包)의 피살된 모습의 사진이였다. 따라서 작자는 채평이 곧 중공북만성위 서기로 활동했던 김책의 형님임을 알게 되고 중공해룡구위 서기로서의 채평 자료를 찾아보게 되였다.

백도(百度)에서 중공해룡구위 서기 채평을 검색하여보니 대략적인 자료로나마 채평 소개 글들이 여러 면으로 뜨고 있었다. 위챗계정ㅡ‘소맹독사 삼경감사’의 작자는 이런 자료들을 기초로 채평의 자료를 언급하고 있다. 또 채평이 활동했던 반석과 해룡 일대와 희생지 모두를 찾아보며 의미 있는 추적을 벌리였다. 이런 결과물이 그의 위챗계정에 뜨니 믿을 만한 자료들이였다. 위챗계정을 통해 작자와도 련계를 가져보았다.

알고 보면 1933년초 이후 흑룡강성 탕원일대에서 사라진 채평은 1933년 4월에 중공만주성위에 소환되여 활동하고 있었다. 또 만주성위의 파견으로 그 시절 서안(西安, 오늘의 辽源)탄광에 파견되여 로동자운동에 뛰여들게 되였다. 채평은 서안탄광 로동자들 속에서 한패의 선진분자들을 뽑아 로동자무장유격대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 유격대는 남만에서 활동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 제1퇀에 소속되였다. 채평도 유격대를 지도하면서 독립사 1퇀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채평은 목뒤에 5센치메터에 달하는 혹이 있고 성씨도 두씨(杜氏)로 하였기에 두대포(杜大包)로 불리였다.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는 1933년 9월 18일 반석현 버리하투(玻璃河套)에서 조직된,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항일무장이였다. 제1군 독립사는 제1퇀과 제3퇀으로 무어졌다. 또 정치부, 참모처, 군수처, 군의처와 정치보안련, 소년영을 두었는데 사장 겸 정위는 양정우이고 참모장은 조선동지 리홍광이 맡아 나섰다. 채평이 조직한 서안탄광 로동자유격대는 제1군 독립사 제1퇀에 소속되여 남만항일무장의 일익을 담당하여 나섰다.

1935년에 이르러 남만의 지방당조직은 엄중한 파괴를 입었다. 1935년 5월, 조선동지 리동광을 서기로 하는 중공남만특위에서는 중공해룡구위를 새로 조직하면서 제1군 독립사 제1퇀에서 활동하는 채평을 신임 구위서기로 파견하였다. 채평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구위 산하 여러 당지부와 반일회가 조직되여 활발한 항일활동을 벌리였다.

1936년 3월에 이르러 반석 대안툰(大安屯)과 초묘자촌(草庙子村)에 각기 농민자위대가 조직되였다. 이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2사는 수차 휘발하(辉发河) 이북으로 돌아가 당지 당지부와 혁명군중들의 힘있는 지지를 받으며 활동할 수가 있었다. 채평은 북만에 이어 남만지역 항일무장에 기여하는 기회를 가지였다.

채평을 김책의 형님으로 떠올린 리재덕의 회고문 부분. (‘삼경감사’가 자신의 계정에 올린 사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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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여름, 반석 상안툰(常安屯)의 공청단원 왕상(王祥)이 변절하면서 일은 급격히 꼬여갔다. 왕상은 반석일본헌병분견대(分遣队)의 직업밀정 리복(李福)과 밀모하여 채평을 투항시키려다가 채평의 거절을 당했다. 이에 왕상은 그해 1936년 9월 18일 오후 세시에 집짓기용 나무를 찍어야겠다며 채평을 꼬여 상안툰 서북골 수림 속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군 기회를 타서 도끼로 채평을 살해하고는 일본헌병대에 알리고 피살된 사진까지 찍어두었다.

이날의 사진이 그로부터 79년 세월이 지나 상기 위챗계정 작자의 수중에 들어왔으니, 채평은 그렇게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였다. 2015년 11월 일본 동경에서 우연히 채평의 피살사진을 얻게 된 후 상기 위챗계정 작자는 반석시에 가 고암(高岩) 선생을 찾았다. 고암 선생을 통해서 원 반석시당사판공실 최위(崔巍) 주임이 채평피살사건을 전문 조사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드디여 위챗계정 작자는 1936년 반석일본헌병대에서 채평의 머리를 베여 현성의 대남문에 걸어놓았고, 시체는 산짐승먹이로 산에 버리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반석시 관련 부문에서는 일찍 지난 60년대와 80년대 두번에 걸쳐 채평의 유골을 찾아 나섰으나 허사로 돌아가고 피살된 자리를 확인하여두었다.

위챗계정 작자는 조선동지 채평 암해에 가담한 왕상과 리복의 수치스런 끝장도 알아보았다. 리복이란 작자는 1947년 토지개혁시 죄가 두려워 도망쳤다가 반석현공안국에 체포되고 사형판결을 받았다. 그러던 리복은 사형에 앞서 장춘감옥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변절자 왕상은 해방 후 군중들의 적발에 의해 혈채가 드러나면서 인민의 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김홍선 전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알고 보면 김홍선 발자취는 세 사람인양 세갈래로 흩어져 서로 어울리지 못하였다.

하나는 김책 형님으로서의 김홍선이다. 김책 관련 자료는 상당히 많은 편이지만 김홍선 관련 자료는 빈약한편인데, 그나마 김홍선은 길동국 조직부장 반경유로 변신하여 1933년에 반‘민생단’운동에서 ‘민생단’ 혐의로 피살된 것으로 전해 내려온다.

다른 하나는 탕원현에서의 채평이다. 채평은 1927년 여름에 탕원 오동하에 출현하면서 중공탕원현위와 그 후 중공탕원중심현위 위원으로 활동, 탕원의 항일혁명투쟁과 항일무장건설에서 불후의 기여를 한다. 그 시절 탕원현위와 후일 항일련군 교통원으로 활동한 리승(李升)은 채평이 탕원중심현위 서기였다고 한다.

이는 《흑룡강사지(黑龙江史志)》2006년 제2기에 실린 글 <항일련군 로교통원 리승>에 나오는 것으로서 신빙성을 가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채평은 중공탕원현위 제1임 서기 리춘만에 이은 제2임 서기로 볼수 있다. 지금은 항일렬사 배치운이 실제 제2임 서기로 등장하면서 채평 현위서기 문제는 나오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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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탕원 출신 항일련군 녀전사 리재덕과 리민은 채평이 항일련군 명장 김책의 형님임을 알고 있음에도, 리재덕과 리민을 취재하고 글을 써낸 이들이 많고 많아도 지금껏 탕원의 채평을 누구 하나 김책의 형님 김홍선과 이어보지 않았다. 깊은 유감이 아닐 수가 없다.

마지막 하나는 중공해룡구위 서기로서의 채평이다. 해방 후 최근년간까지도 반석이나 채평이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당지 관련 부문, 연구가들은 채평이 탕원 쪽에서 온 항일렬사라는것을 알면서도 웬지 하나로 잇는 연구가 따르지 못하였다. 채평이 항일련군 명장 김책의 친형님임은 더구나 알지 못하였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2015년 11월에 이르러 상기 위챗계정 작자가 일본 동경의 관련 경매회에서 채룡의 피살사진을 발견하고 채룡을 추적하여서야 채룡이 곧 김책의 형님임을 처음 밝혀냈다. 직업 항일사 연구가가 아니고 우리 민족의 항일력사를 모르는 데서 채룡의 본명이 김홍선임은 알지 못하였다.

위챗계정 작자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위챗계정의 작자가 아니면 지금도 채룡을 김홍선으로 이어보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필자가 중공탕원현위와 중심현위 위원으로서의 채평, 항일련군 명장 김책과 그 가족관계에 이르기까지 잘 알고 있었기에 상기 위챗계정 작자의 글이 떠오르자 세갈래 연구자료를 채평ㅡ김홍선이란 하나의 선으로 이어놓을 수가 있었다.

김홍선의 전기는 아직 끝이 아니다. 김홍선 이들 삼형제와 이들의 아버지 등 가족관계의 주요한 면은 밝히고 지나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본문 앞부분에서 우리는 김홍선은 김홍계(둘째 김책), 김홍희(金洪熙, 막내, 다른 이름은 김종희) 두 동생이 있었음을 스치고 지나왔다. 먼저 막내동생 김홍희를 말하면 김홍희에 대한 자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큰형과 둘째형을 따라 혁명의 장도에 올랐다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고 그 후 희생되였다는 것이 고작이라 하겠다.

둘째동생 김홍계, 즉 김책에 대해 한가지만 보고저 한다면 1927년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이 있은 후 형님 김홍선은 만주총국 선전부장으로 활동할 때 김홍계는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에서 일제놈들에게 체포되여 서울로 압송된다. 그는 서울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였다.

서대문형무소에 2년쯤 있다가 1930년 1월에 석방되여 연길현 수신향 래풍동(오늘의 화룡시 동성진 경내)으로 돌아오니 아버지 김지모(金智模)와 부인 안경숙(安庆淑)은 가난과 비애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병사(부인은 1928년에 병사)하였다. 집에는 어머니와 철모르는 두 어린 아들 국태(国泰, 1924년생)와 정태(正泰)가 남았을 뿐이다. 어머니에 대해선 알려지는 바가 없다.

  김홍계는 두 주먹을 불끈 쥐였다. 어린 두 아들을 처남에게 맡기고는 처남이 준 소를 팔고는 다시 피어린 항일의 거창한 투쟁에 뛰여들었다. 그때 형님 김홍선은 녕안현 동경성에 집을 잡고 있었고 집에는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어린 오누이 둘이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그들은 어떻게 지냈을가, 김홍선의 북만 탕원 시절과 남만 반석, 해룡 시절도 녕안 동경성에서 살고 있었는지, 김홍선이 항일의 싸움터에서 생을 마감한 후에는 어떠했는지 모르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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