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련군 제7군과 세 항일혁명가
김영숙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항일의 도리를 알기 쉽게 가르쳤다. 찾아가는 집마다 그들의 일손을 도우며 이야기를 나누니 항일의 도리가 마음마다에 흘러 들었다.

2020-05-09 09:02:33

동북항일련군 휘장.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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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0월, 조선족을 중심으로 하는 중공요하중심현위에서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자기의 항일무장을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황포군관학교 출신 혁명가인 최석천(崔石泉)과 김문형(金文亨)은 한자루의 권총을 토대로 특무대를 조직하였다. 특무대는 최석천, 김문형, 김동천(金东天), 최룡석(崔龙锡), 허성재(许成在), 박영근(朴英根) 등 6명 조선족당원들로 무어졌다. 5개월간의 간고한 투쟁을 겨쳐 특무대는 시초의 6명으로부터 40여명으로 늘어났다.

1933년 4월 17일, 요하 대엽자(大叶子)에서 요하현특무대는 요하농공의용군(饶河农工义勇军)으로 개편되였다. 요하농공의용군 대장은 최석천이고 정치부 주임은 김문형, 아래에 3개 소대를 두었다. 1소대 소대장은 최석천, 2소대 소대장은 허성재, 3소대 소대장은 채일훈(蔡一勋)이였다. 1934년 2월 3일에 요하농공의용군은 요하민중반일유격대대로 개편되였다. 최석천이 대대장대리로, 박진우(朴振宇)가 정치지도원으로 임명되였다. 그해 4월에 이르러 대엽자구는 항일유격근거지로 발돋움하였다.

이듬해 1935년은 요하민중반일유격대대로 말하면 휘황한 발전의 한해였다. 이해 요하민중반일유격대대는 대엽자구에서 가진 중공유하중심현위 제3차 확대회의 결의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4퇀으로 개편되였다. 리학복이 퇀장으로, 박진우가 부퇀장으로, 최석천이 참모장으로 나섰다. 그 후 제4군 제4퇀은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2사로의 발전 과정을 거치였다.

1936년 3월, 중공요하중심현위는 중공하강특위로 개편되였다.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2사 사장 정로암(郑鲁岩, 후에 변절)이 중공하강특위 서기로, 중공요하중심현위 서기이고 조선족인 서봉산(徐凤山, 본명 金世日, 항일렬사)이 하강특위 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해 9월 12일, 중공하강특위는 활동구역인 요하현 폭마정자 소동구(暴马顶子小东沟)에서 군정회의를 가지고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2사를 동북항일련군 제7군으로 개편하기로 하였다.

이해 1936년 11월 15일에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2사는 요하현 관문취자(关门嘴子)에서 동북항일련군 제7군으로 개편되였다. 진영구(陈荣久, 항일렬사)가 군장으로, 최석천이 참모장으로 부임하였다. 1937년 3월, 군장 진영구가 적들과의 싸움에서 희생된 후 최석천이 제7군 당위 서기 겸 군장대리로, 조선족 리학복이 7군 산하 제1사 사장으로 부임하였다.

흑룡강성 쌍압산시 요하현 요하진 남산공원에 세워진, 항일련군 제7군의 시초를 이룬 요하항일유격대기념비.(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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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과 1938년은 동북항일련군 제7군의 황금발전시기로 알려진다. 이 시절의 7군 군장은 조선족 리학복(李学福)이고 참모장 겸 군장대리는 최석천이였다. 리학복이 병으로 부대를 떠나 외지에 가서 치료하여야 했기에 최석천이 군장대리로 나섰다. 1937년에 7군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면서 산하에 전문 부녀영을 조직하였다. 부녀영 영장은 류옥매(刘玉梅)가, 부대대장은 조선족 심영숙(沈英淑)이 맡아 보았다. 동북항일련군 제7군 부대에서의 심영숙의 등장이다.

유감스럽게도 심영숙에 대해서는 아직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 부녀영의 녀전사들은 대다수가 16~17세이고, 가장 나어린 녀전사는 12~13세로 나타난다. 거개가 조선족으로 이루어진 이들 녀전사들은 한창 자라나는 10대의 소녀시절에 결연히 총을 메고 일제놈들과의 피어린 싸움에 나섰다. 그런 녀전사들이여서 매차의 전투들에서 남전사들에 뒤지지 않았고 대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항일무장투쟁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녀전사들 가운데서 적들에게 투항하여 변절한 전사는 한사람도 나지지 않았다.

7군 부녀영 부영장 심영숙이 그 특출한 대표로 된다. 1937년 어느 한차례의 정찰과업 수행중에서 심영숙은 불행히 일제놈들에게 체포되였다. 적들은 심영숙에게 갖은 혹형을 가하면서 항일련군부대와 지방과의 관계 모두를 실토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심영숙은 입을 앙다물고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았다. 나중에 맥이 진한 적들은 심영숙을 무참히 살해하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도 심영숙이 어디서 태여났고 출생일이 언제며,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항일련군 7군에 가입하였는지를 모르고 있다. 안다는 것이 7군 소속 부녀영 부영장이고, 1937년에 일제놈들에게 체포되여 장렬히 희생되였다는 것 뿐이다. 하지만 항일련군 제7군과 7군 부녀영엔 심영숙 녀전사가 기록되여있으니 그의 이름과 빛나는 최후는 대를 이어 영원할 것이다.

요하항일유격대기념비내 조각군체.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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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련군 제7군의 기간부대는 시초 조선족으로 구성된 요하현특무대와 그뒤를 이은 요하농공의용군으로부터 점차 발전과정을 거친,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항일무장부대였다. 이 항일무장부대는 북만항일련군사의 주요한 한갈래로서 림룡엽(林龙叶)ㅡ김영숙(金英淑) 부부에 대한 이야기가 섞여 사람들을 심히 감동시킨다.

림룡엽, 김영숙 부부가 모두 어느해 태여났는지는 밝혀지는 자료가 보이지 않지만 조선족이고 요하현 폭마정자(饶河县暴马顶子)에서 살다가 1931년 9.18사변 후 소가하 서남산(小佳河西南山)으로 지대를 옮긴 것으로 알려진다. 사람들은 서가하 서남산을 추마산(推磨山)이라고도 부른다.

1934년 일제놈들과 위만경찰들은 북만의 편벽한 외진 산촌인 소가하 서남산에까지 강제적으로 집단부락을 설치하면서 응하지 않는 자는 집에 불을 지르며 죽이며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적들은 숱한 밀정과 헌병들을 풀어 반만항일이라는 죄명을 들씌우며 마음대로 사람들을 잡아갔다. 림룡엽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다. 일제놈들의 꼴이 보기 싫어 정든 조선의 고향을 떠나 북만 멀리 외진 산촌에 보짐을 풀었는데 간악한 무리들은 이곳 외진 산촌에까지 달려들어 잔혹한 통치를 서슴지 않는다.

어느 날 림룡엽은 안해 김영숙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살길을 찾아 조선의 고향을 떠나 북만까지 들어왔는데 이제 더 어디로 가겠소, 유일한 살길은 손에 총을 잡고 왜놈들과 싸우는 길이요.”

김영숙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남편이 걷고저 하는 길이 목숨을 내거는 일제놈들과의 생사박투의 피어린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폭마정자와 추마산 일대는 우리 항일유격대의 근거지로서 마을의 허다한 사람들이 비밀리에 항일유격대를 받들어나섰다. 어떤 사람들은 항일유격대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그때 림룡엽은 마을에서 반일구국회 소조장을 맡고 있었다. 림룡엽 부부는 비밀토의를 거쳐 온 가족이 항일부대에 참가하거나 후원하기로 작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림룡엽은 큰 딸애를 데리고 결연히 후날 항일련군 제7군으로 불리우는 항일부대에 참가하고 집에는 김영숙과 어린 두 아들이 남았다. 김영숙은 막내 아들을 업고 자질구레한 집안일부터 바깥 농사일에 이르기까지 살손을 붙이면서 생활의 중임을 한몸에 떠이였다. 이와 더불어 김영숙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항일의 도리를 알기 쉽게 가르쳤다. 찾아가는 집마다 그들의 일손을 도우며 이야기를 나누니 항일의 도리가 마음마다에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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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숙은 마을의 반일회 회원들과 함께 마을 안팎을 잘 살펴 적들의 일거일동과 움직임으로부터 정보를 많이 수집하였다. 수집한 정보들은 나물캐러 가거나 땔나무를 하는 척하면서 산속의 비밀지점에 보내였다. 반일회 녀성들과 같이 식량을 모으고 신이랑 만드는 후원사업도 김영숙의 비밀활동의 주요한 일환이였다. 무릇 산속의 7군부대가 요구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나섰다.

불면불휴의 항일투쟁 속에서 몇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1938년에 이르러 보다 혈안이 된 일제놈들은 도처에서 항일련군을 토벌하는 한편 지방에서는 치안을 강화한다면서 밀정과 주구들을 가득 풀어놓았다. 눈보라 몰아치던 이해 12월의 어느 날 밤중에 눈사람이 된 남편 림룡엽이 집에 가만히 들어섰다. 알고보니 남편은 한차례 과업수행에 나섰다가 추마산을 거치게 되였다. 마침 눈보라이는 밤중이여서 7군의 소속부대 지도부에서는 정보도 수집할겸 식량도 얻을겸 집에 들려보도록 배려를 돌리였다.

그런데 밤중의 비밀행동이 밤낮 없이 쏘다니는 밀정들에게 밝혀졌다. 날샐녘에 한무리 왜놈들과 위만경찰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림룡엽, 김영숙 부부를 체포하여 소가하(小佳河)로 압송하였다. 적들은 거꾸로 달아매기, 가죽띠와 철사로 때리기, 고추물먹이기, 인두로 지지기 등 각가지 고문을 들이대면서 김숙영 부부를 이틀간이나 들볶았다. 정신을 잃으면 찬물을 끼얹으며 야단이였다. 사흘째 되던 날 적들은 이들 부부를 흙으로 다져만든 둔덕진 곳에 끌어내고 마을사람들을 강제로 모이게 하였다.

김영숙 부부는 온몸이 피로 랑자하고 두손이 결박되였지만 적들을 쏘아보며 머리를 떳떳이 쳐들었다. 모여든 마을사람들은 눈물을 머금고 그들을 지켜보아야 하였다. 이때라고 우두머리인듯한 한놈이 김영숙 부부를 삿대질하며 고함질렀다.

“너희들 저절로 말해봐. 무슨 죄를 지었어?”

“우리는 아무런 죄도 없다. 네놈들 일본날강도들이 애매한 중국사람들을 죽이며 미쳐 날뛰고 있다. 네놈들 죄야말로 하늘에 사무친다.”

김영숙은 적 두목의 말을 동강내며 석쉼한 높은 소리로 꾸짖었다. 그리곤 돌아서서 군중들에게 눈길을 던지며 “일심단결하여 일본강도들을 때려부시자!”하고 맘껏 웨치였다. 남편도 구호를 높이 불렀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일본날강도들을 중국에서 몰아내자!”

적들은 날뛰였다. 마을사람들에게 위협감, 공포감을 심어주자던 일이 항일선동으로 번지여가니 그럴만도 하였다. 우두머리놈은 허리에 찬 군도를 홱 뽑아 휘두르며 “총살, 총살이다. 어서 끌어가.”라고 고래고래 웨치였다. 한무리 적들이 달려들어 림룡엽ㅡ김영숙 부부를 치고 박으며 야단치다가 소가하 서하토(小佳河西河套)로 끌고 갔다. 다른 한무리 적들은 마을사람들도 서하토로 끌었다.


5

한바탕 총소리가 울리였다. 림룡엽ㅡ김영숙 영웅부부의 최후를 지켜본 마을사람들은 그들 부부가 생명을 마감짓는 순간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중국공산당 만세!”를 불렀음을 똑똑히 듣고 있었다. 서하토에 정적이 깃들자 마을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마을로 돌아섰고, 몇몇 로인들은 비통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다.

림룡엽 부부가 적들에게 살해될 때 큰아들 림영심(林永深)은 겨우 8살이고 막내 림영선(林永善)은 보다 어린 5살배기 철부지였다. 적들이 물러간 후 마을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들 영웅부부의 유체를 고이 묻어주었지만 큰애는 최성환(崔星焕)이라 부르는 집에 가서 소몰이를 하면서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되였다.

작은 애는 요하현의 대악패지주이고 대한간인 원복당(苑福堂)의 사위ㅡ위경찰서장 조가패(赵家佩)의 집에 들어가 이름을 조봉기(赵凤岐)라고 고쳐야 했다. 두 애는 두 집에서 우마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면서 늘 욕을 먹으며 얻어맞았다. 조가패는 지어 두 형제가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고 조선사람들과도  말을 나누지도 못하게 득달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 림룡엽ㅡ김영숙 렬사의 맏이 영심이는 1946년에 우리 군 토비숙청부대 왕경곤부(剿匪部队王景坤部)포병련에 입대하였다. 이해 영심은 18살이였다. 그뒤 료심전역에서 1등공을 세우고 1950년에는 부퇀장으로 승급, 압록강을 뛰여넘어 조선의 싸움터로 나갔다가 상감령전역(上甘岭战役)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1934년생인 막내 영선이는 13살나던 해 토지개혁공작대 대장 유시모(俞时模)의 경위원이 되였다가 부대를 따라 남전북전에 뛰여들었다. 요하현위당사연구실과 요하현정부 관련 자료에 따르면 80년대 중반에 림영선-림봉기(林凤岐, 지금 이름)는 심양군구 정치부 판공실부비서장으로 근무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림룡엽을 따라 항일련군에 참가하였던 큰딸은 1940년에 항일련군부대를 따라 쏘련경내로 전이한 후 소식을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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