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장령 양호성

2020-05-13 08:28:04

섬서성 서안시 장안구에 위치한 양호성 장군 릉원에 들어서면 맞은편 올리막길 량옆에 ‘천고의 공신’과 ‘민족의 영웅’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애국장령이며 중국공산당의 진정한 친구인 양호성이 이곳에 고이 잠들어있다.

양호성은 1893년에 섬서성 포성현 감북촌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09년에 부자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중추회를 설립했고 1911년 무창봉기가 폭발한 후 섬서민군에 참가하였고 신해혁명에 뛰여들었다. 1915년 원세개를 토벌하는 전투에 참가했고 1917년 섬서 정국군 제3로군 제1지대 사령을 맡았으며 1921년에 정국군 제3로군 사령을 맡았다. 1924년, 양호성은 국민당에 가입했고 1925년 국민군 제3군 제3사 사장을 맡았다. 그는 손중산의 ‘3대 정책’을 옹호하였고 국공 합작을 적극 주장했으며 공산당원 위야주를 초빙해 그가 창설한 3민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을 맡도록 했다. 그때로부터 양호성은 줄곧 공산주의자들과 량호한 우정을 유지했으며 반동군벌들의 암흑한 통치를 목격하는 동시에 기세 드높은 혁명물결의 고무를 받았다.

양호성 렬사

1927년, 양호성은 국민혁명군련군 제10로군 총사령을 맡고 북벌전쟁에 참여했다. 1929년 국민혁명군 신편 제14사 사장을 맡았고 후에 제17사 사장, 륙군 제7군 군장을 맡았다. 1930년 제17로군 총지휘, 섬서성정부 주석, 서안 수정공서 주임을 맡았다. 양호성은 비밀리에 중공서북특별지부의 사업을 지지하였고 공산당과 합작하여 항일할 것을 주장했으며 1933년 사천, 섬서에 진입한 홍4방면군과 상호불가침 협의를 체결했다. 중공중앙이 섬서, 감숙에 진입한 후 그는 비밀리에 중공대표 왕봉을 만나 중공중앙의 항일민족 통일전선 정책을 전적으로 찬성한다고 밝혔으며 중공과 단합하여 항일하는 협의를 달성했다. 중공중앙은 1936년 가을 장문빈을 17로군 주둔 대표로 파견했다.

1936년 12월 12일, 양호성은 장학량과 함께 전국인민은 단합하여 항일해야 한다는 요구에 순응하고 중국공산당 항일민족 통일전선의 호소에 호응하여 서안사변을 일으켰다. 사변 발생 이후 중국공산당은 평화적 방식으로 해결할 것을 견결히 주장했고 주은래 등을 대표로 서안에 가 장학량, 양호성을 도와 대책을 마련하도록 했다. 서안사변의 평화적 해결은 시국전환의 중요한 고리였다. 그때로부터 10년 내전 국면이 기본상 결속되였고 국내 평화가 초보적으로 실현되였으며 국공 량당의 제2차 합작에 조건을 창조했다. 서안사변 후 양호성은 장개석의 강요하에 사직하고 ‘외국고찰’을 떠났다. 전국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귀국하였지만 인차 국민당에 의해 12년 넘게 감금당했다. 감옥에서 그는 정의롭고 엄숙하고 의지가 강했으며 시종 애국주의 립장을 견지했다. 1949년 9월 6일, 양호성은 비밀리에 살해당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1950년 2월 7일, 섬서성인민정부는 양호성의 유해를 서안 남쪽 교외 소릉강변에 안치하고 양호성 장군 릉원을 세웠다. 이곳은 오늘날 전국 중점 렬사기념건축물 보호단위로 되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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