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85
녀성혁명가 김새별과 남편 홍완구
1932년 음력 1월, 홍완구와 김새별은 장봉한 등 몇명과 함께 중공공산당 당원으로 되였다. 그뒤 김새별은 남편 홍완구와 더불어 같은해 봄 천수일대의 기민투쟁을 성과적으로 지도했고 적들이 주시하는 인물로 되였다.

2020-05-18 08:41:18

1933년 음력 5월 19일, 우복동전투가 벌어졌던 우복동 4중촌 ㅡ 오늘의 화룡시 남평진 고산촌 경내에 세워진 우복동전투유적지 안내비. (2019년 9월 17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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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20년대 후반 화룡현 명신사 천수갑 남양동에는 김새별이라는 한 녀인이 살고 있었다. 새별은 이름이 아닌 별호인데 가난한 집 출신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집안일, 바깥일로 잔뼈를 굳히였다. 후에 자기보다 몇살 우인 한마을의 가난한 집 총각 홍완구(洪完九, 1891년생)와 살림을 이루었다. 궁핍한 살림에도 부부간의 금슬은 좋았고 선후하여 아들 넷을 낳아 길렀다.

1928년경에 천수갑 남양동에는 부근 마개동마을의 윤동호가 드나들었다. 윤동호는 일찍부터 동만도 (화요파) 당원으로 되여 원화동의 안학선과 함께 명신사일대에 혁명의 씨앗을 뿌려가고 있었다. 홍완구와 안해 김새별은 윤동호에게서 로씨야 10월혁명의 소식을 들으면서 많고 많은 혁명의 도리를 알게 되였다.

그만큼 윤동호는 홍완구와 김새별의 계몽선생이였고 혁명동지였다. 남양동마을은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지주와 자본가를 타도하자!”,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가난한 사람은 뭉쳐 일어나자!” 등 삐라와 포스터들이 마을을 뒤덮기 시작하였다. 남편 홍완구를 앞세운 김새별의 혁명에로의 첫걸음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20년대 후기에 화룡현 각지에서는 보갑제도가 실시되면서 보장, 갑장 선거가 일대 바람으로 되였다. 1929년초에 천수일대에서도 갑장 ‘선거’를 하게 되였다. 갑장선거모임에서 윤동호는 극구 김새별의 남편 홍완구를 추천하였다. 또 사전에 마을마다 믿음직한 사람을 박아넣었기에 홍완구는 사람들의 옹호 속에서 천수갑 갑장으로 선거되였다.

천수갑은 리화동, 룡천동, 마개동, 남양동, 지인동 등 여러 마을로 이루어졌다. 홍완구는 갑장이란 이 공개적인 신분으로 마을마다 다니며 투쟁골간을 물색하였다. ‘결의형제’의 방법으로 10여명의  동지와 손잡고 윤동호의 지도 밑에서 계급의식을 키워갔다.

1930년 가을 화룡현 각지에서는 대중적 추수폭동이 맹렬히 일어났다. 중공삼도구 구위에서 광범한 농민들을 이 폭동에 궐기시킬 것을 호소하자 홍완구는 ‘결의형제’들을 중심으로 마을마다 성세를 일으켰다. 김새별은 남편의 부탁으로 마을과 주변 마을의 녀성들을 불러일으켰다. 9월 7일에 천수갑의 농민들은 마침내 우심일대의 농민들과 합류하여 우심산 왕재동골로 들어갔다. 삼도구구위 군사부장 장수의 지도 밑에서 쏘베트정부 건립대회를 서두르는데 골안 아래에서 자지러운 총소리가 들리며 군벌정부의 륙군대 놈들이 쓸어올라왔다. 그통에 모인 군중들은 신속히 흩어졌다.

그 후 한동안 구위와의 련계가 단절되였다. 홍완구는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며 말없이 ‘갑장’일에 왼심을 썼다. 김새별은 그러는 남편을 소리없이 받들어나섰다. 농민군중들의 마음을 한곬으로 모아 앞으로의 투쟁력량으로 키우려는 생각이였다.

화룡시 남평진 고산촌의 한 마을 ㅡ 그제날 우복동전투가 벌어지고, 홍완구 등 항일혁명가들이 활동하던 유서깊은 고장. (2019년 9월 17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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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초, 중공삼도구구위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는 윤동호가 남양동에 돌아왔다. 누구보다도 기뻐한 것은 홍완구와 김새별이였다. 잇달아 천수갑일대 마을마다에 농민협회와 부녀회 등 군중단체가 조직되고 반일선전활동이 열을 올리였다. 천수갑의 남양동부녀 회책임자는 김새별이였다. 1931년의 주요선전은 반일, 민족대단결, 추수투쟁 등 반일반봉건 투쟁이였다.

김새별은 남편과 함께 반일반봉건투쟁의 앞장에 나섰다. 투쟁 속에서 홍완구는 물론 김새별도 세련된 혁명자로 자라났다. 1932년 음력 1월, 홍완구와 김새별은 장봉한 등 몇명과 함께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였다. 그 뒤 김새별은 남편 홍완구와 더불어 같은 해 봄 천수일대의 기민투쟁을 성과적으로 지도했고 적들이 주시하는 인물로 되였다.

1932년 가을의 어느 장날, 구위간부 ‘제국주의’가 장 보러 가는 차림새를 하고 홍완구의 집으로 찾아왔다. 천수일대의 혁명자 10여명이 모여앉아 추수투쟁을 벌릴 데 대한 구위의 지시를 전달받았다. 이때 뜻하지 않던 일이 벌어졌다. 삼도구의 김일로자위단이 천수일대의 변절자 지호준을 앞세우고 살기등등하게 남양동에 달려들었다.

구위간부와 회의군중은 급보를 받고 신속히 뒤문을 박차고 밖으로 내달렸다. 나중에 홍완구가 따라섰다. 집에는 임신한 안해 새별이 남았는데 그는 남편더러 어서 떠나라고 재촉하였다. 남편이 떠난 뒤 새별은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마침 방안 한구석엔 미처 감추지 못한 비수 한자루가 댕그라니 놓여있었다. 그는 얼른 비수를 가슴에 품었다. 이때 자위단 놈들이 들이닥쳤다. 그자들은 텅 빈 집에 녀인 하나 뿐인 것을 보고 남편이 어디로 갔는가고 따지고 물었다. 새별이 대답하지 않으니 한놈이 새별이의 머리를 움켜잡고 일으켜세웠다. 순간 가슴에 품었던 비수가 달랑 구들 우에 떨어졌다. 기고만장한 자위단 놈들은 새별에게 물매를 안기며 홍완구 등이 피신한 곳을 대라고 족쳐댔다. 새별이는 입을 꼭 다문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날 놈들은 어디에선가 체포한 구위간부 한 사람을 끌고 왔다. 알고보니 그는 구의 부녀책임자 최옥산의 남편인데 구당위 선전부장을 맡고 있었다. 이미 시달림을 받은 흔적이 력연하였다. 놈들은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자 새별이와 구위간부를 홍완구의 집안에다 처넣고 집에다 불을 질렀다. 홍완구의 네 아들이 죽기내기로 아우성을 치며 불속에 뛰여들려 했으나 번마다 놈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김새별의 남편 홍완구는 놈들이 물러난 뒤에야 타버린 집터에 나타났다. 그의 가슴은 갈갈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말없이 자기를 받들어주던 안해였다. 그번  참변 후 홍완구는 아이들을 큰어머니에게 맡기고 우복동구위를 찾아갔다. 그 뒤 큰아들은 마을청년들과 함께 삼도구에 끌려가 학살당했다. 둘째와 셋째는 앓아 요절하고 어린 막내만 요행 목숨을 건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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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동으로 망명한 후 홍완구는 구위에서 농민협회 책임을 맡았다. 그는 키가 작은편이였지만 무엇을 할라치면 일손이 잽쌌다. 홍완구의 수염이 노랬기 때문에  동지들은 그를 ‘노랑 동무’라고 불렀다. 그 시절 우복동의 몇개 골안에는 근 200세대의 조선이주민 산재호들이 살고 있었다. 우복동마을은 1중촌으로부터 5중촌까지 차례로 되여있었다.

1932년 가을부터 부근의 류통사자위단과 류동자위단 놈들이 삼도구공안국, 삼도구경찰서 놈들과 결탁하여 제각기 겨끔내기로 ‘토벌’을 일삼는 바람에 삼도구위의 간부들과 외지 망명자들은 낮에는 등산생활을 하고 밤에야 가만히 내려와 군중사업을 벌릴 수 있었다. 그 겨를에도 홍완구는 농민군중들에게 혁명을 끝까지 해야 한다고 선전하였고 혁명렬사가족, 토벌에 피해를 입었거나 망명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방조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1932년 늦가을, 우복동에 있는 구위서기 리동백의 집에서 구당위 확대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에는 리동백, 홍완구, 장봉한 등 구위 간부들과 우복동지부의 간부 도합 10여명이 참가하였다. 회의는 놈들의 토벌이 갈수록 우심한 형편에서 어떻게 군중을 발동시키고 단합시키겠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리였다. 회의 후 구위에서는 구위 간부와 동지들을 분공지역에 내려가 회의 정신을 시달하도록 하였다.

한 시기 지나 구위에서는 또 상기 인원이 참가한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중심의제는 민족단결 선전과 혁명렬사가족 방문, 위문 사업 등이였다. 회의는 또 홍완구의 제의에 따라 피난민사업을 하나의 과제로 삼았다. 홍완구는 회의가 끝난 후 구내 각지에 가 외지로 피난하려는 혁명군중들에게 어디로 가든지 놈들 정책은 다 같기에 본고장에서 투쟁을 견지하며 싸워가자고 마음을 터놓았다.

1933년 4월, 홍완구가 리동백의 뒤를 이어 중공삼도구위 제6임 서기로 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삼도구의 투쟁환경은 보다 어려워졌다. 이해 음력 5월, 화룡현유격대 9명이 일본군지휘관 쯔루오까 등 놈들을 격살한 ‘우복동전투’가 벌어진 뒤라 더욱 그러했다. 1933년 6월, 놈들은 우복동어구의 맹가골에다 집단부락을 세운 뒤 8월에는 또 골안어구에서 멀지 않은 차창자에다 경찰분주소를 설치하였다.

우복동의 혁명력량은 날로 감소되고 적지 않은 동지들이 가정을 이끌고 외지로 떠나갔다. 우복동은 마을마다 텅 비다싶이 하였다. 이런 형편에서 홍완구는 어랑촌 근거지에 있는 현위와 자주 련계를 가지면서 준엄한 정세에 대처할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해 1933년 8월경의 어느 날 저녁, 홍완구는 마을에 내려가 당원간부와 투쟁골간들이 참가한 비밀회의를 열었다. 회의 도중 차창자분주소 놈들이 불의습격을 들이댔다. 홍완구는 요행 빠져나왔지만 9명 동지가 체포되여 분주소로 끌려갔다.

참혹한 현실이였다. 우복동에 남은 외지혁명자 30~40명은 우복동 몇개 마을에 집중되여 낮에는 의연히 동산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33년 가을, 현당위의 한 책임동지가 우복동에 왔다가 이런 현실에 띠우자 “군중을 떠나 산속에만 있어서는 안된다. 혁명을 계속하자면 반드시 군중 속에 다시 들어가 처녀지 개척 사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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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완구는 우복동의 한 산중에서 구위 긴급회의를 열고 현위 책임동지의 지시를 전달하면서 구위의 간부와 망명자들은 분산하여 군중 속에 들어가 처녀지 개척 사업에 나서야 한다, 앞으로 투쟁 가운데서 다시 만나자고 강조하였다. 회의 후 구위간부와 혁명자들은 약 2개월 후 구위와 련계를 맺겠다고 홍완구와 약속하면서 홍기하목재판으로, 두만강 떼목로동자들 속으로, 룡정-조양천 철도부설 로동자들과 양무전자 목탄구이 로동자들 속으로 륙속 떠나갔다. 홍완구의 신변에는 5~6명밖에 남지 않았다.

1933년 9월, 홍완구는 우복동의 양로지골에 비밀아지트를 정하고 활동하였다. 우복동당지부 서기 리운식 등 몇몇 지방혁명자들이 식량과 신 등을 모아서 산중으로 가져갔다. 리운식의 안해 동영숙도 대여섯분의 밥을 해가지고 때때로 비밀아지트를 찾았다. 놈들이 사처에 눈을 밝히는데서 홍완구는 서북쪽 산너머 복장동으로 옮겨가서 산막인 비밀아지트로 옮기였다.

복장동 비밀아지트에는 홍완구외에도 구위 통신원 정홍구, 공청단구위 간부 남동수, 우북동 공청단원 조기선, 18살쯤 되는 한 젊은이 등 넷이 있었다. 먹는 것이 문제였다. 리운식이 집의 쌀을 퍼나르기는 장구지책이 못되였다. 그래서 그들은 남의 눈을 피하며 잣을 땄다. 리운식이 그 잣을 충신장(화룡시가지)에 가져다 팔아 쌀과 소금, 신, 천 등을 해결하였다.

놈들은 홍완구를 붙잡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다. 포수들마저 매수하여 밀정으로 내세웠다. 홍완구는 복장동의 비밀아지트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고 낮이면 산속에 깊이 들어가고 밤이면 가만히 돌아왔다.

1933년 음력 12월 3일 새벽녘이였다. 구위 통신원 정홍구가 불을 지피고 밥을 하려고 서두르는데 갑자기 자지러진 총소리가 울리더니 왼쪽 다리를 총탄에 맞았다.

밀정인 태평촌의 포수 리영대가 산막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차창자분주소에 고발하였던 것이다. 차창자분주소 소장 김창선이란 놈이 10여명의 순사와 자위단놈들을 거느리고 해뜨기 전에 벌써 비밀아지트를 포위하고 있다가 날이 밝자 총질을 한 것이였다.

사태는  엄중하였다.  홍완구는 남동수 등 넷을 아래쪽으로 피신시키고 재빨리 비밀문건을 감추었다. 그리곤 동지들이 간 반대방향-산 우로 올리달았다. 놈들이 홍완구에게로 몰려들며 미친 듯이  사격하였다. 홍완구는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놈들이 다가들자 홍완구는 안깐힘을 다 써서 수중의 유일한 무기인 자작수류탄을 꺼내 뿌렸다. 야수보다도 못한 놈들은 홍완구의 머리를 잘라내서 분주소 마당에다 걸어놓았다. 안해 김새별과 홍완구는 이렇게 피어린 항일전선에서 선후하여 쓰러졌다.

광복 후인 1947년 봄 그제날의 흉수들은 인민의 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태평촌 류인선 농민의 집 마당에서 리영대 등을 투쟁하는 대회가 열리였다. 피눈물의 공소가 대회를 꽉 메웠다. 토지개혁공작대에서는 홍완구의 막내아들 홍진식에게 총을 주어 아버지의 원쑤를 갚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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