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영렬” 장철민

2020-05-23 09:06:22

해마다 청명절이면 장영법은 모든 가족을 거느리고 함께 우산공동묘지를 찾아 아버지 장철민을 위해 성묘하군 한다. 평소에 장영법도 늘 혼자 이곳을 찾아 아버지 묘비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군 한다.

장철민은 1916년 강소성 의흥에서 태여났다. 1937년 전국적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21살밖에 안되는 장철민은 원명인 “장홍여”를 “장철민”으로 개명하여 자신의 철같은 항전결심을 표명하였다.

장철민 렬사.

1939년에 장철민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후에 가궁산당지부 서기직을 맡았다. 그는 항전에 적극 투신하여 일본침략자와 한간을 체포하였다. 1942년 장철민은 주렴부대가 장우에 주둔할 때 입대하였고 후에 무진유격지대 제3대 대장직을 맡았다.그는 부풍지역에서 일본군과 괴뢰군 세력이 수로요새에 댐을 쌓아 가로막는것을 돌파하였고 군중을 발동하여 군량수송에 의한 전선지원을 견지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국민당통치집단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내전을 발동하고 혁명력량을 소멸하며 항일전쟁 승리의 과실을 빼았으려 시도하였다. 이에 중공중앙은 전략배치를 조정하여 “북으로 발전하고 남으로 방어”하는 전략적방침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중앙의 포치에 따라 주력부대는 북으로 전이하였다. 장철민은 조직의 배치에 따라 강남에 남아 지하사업에 종사하였다. 후에 당시 국민당에 의해 의흥의 감옥에 잡혀들어가 박해를 받았다. 담보로 구출된후 장철민은 계속 남경,상해 등지에서 도자기굽는 가마공장 로동자, 빈민구 군중들에게 중국공산당의 사상과 승리의 전과를 선전하였다.

1949년 5월, 장철민은 의흥현공안국 방교파출소 간사직을 맡고 지방안전수호를 책임지고 파괴분자들과 잔여 적대세력을 체포하였다. 같은 해 11월 12일 장철민은 의흥현 방교구 분저향에서의 비적토벌과정에 희생되였으며 희생 당시 33살밖에 안되였다. 1950년 2월 소남행정공서는 장철민을 혁명렬사로 추인하였다.

아버지가 희생될 때 장영법은 3살밖에 안되였으며 그는 이와 같은 영렬 가정에서 태여난것을 자호감으로 느꼈다. 1971년부터 장영법은 방교장우촌 지부서기직을 맡았다. 그는 시시각각 아버지 장철민을 본보기로 삼고 공산당원의 표준으로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였으며 사람됨됨이가 정직하고 청렴결백하였으며 크고 작은 일에서 항상 촌을 념두에 두었다. 그는“아버지가 비록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아버지의 정신은 나의 일생에 영향주었다”고 말했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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