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강 항일원로 문창주 (2)

2020-06-28 08:5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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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적들의 갖은 고초를 당한 문창주는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되여 전처럼 씽씽 나다닐 수 없었다. 그는 모든 심혈을 다하여 어린 자식들과 문씨 가족들, 주변의 마을 사람들을 반일의식으로 무장시키면서 거창한 운동에로 내세웠다. 말그대로 그는 자식들의 미더운 아버지요, 장인강 항일지사들의 어른이요, 항일원로였으니 그가 바라는 뜻은 누구보다도 먼저 딸애에게서 잘 보여졌다.

↑문창주 세 손자네 부부.(뒤줄 좌1과 앞줄 좌1이 넷째 손자 문명전과 부인 류경애, 뒤줄 가운데와 앞줄 가운데가 셋째 손자 문명호와 부인 최화숙, 뒤줄 우1과 앞줄 우1이 둘째손자 문명학과 부인 리귀복.) 2020년 6월 8일 촬영.

딸애 문두찬이 열두살 되던 해이니 1924년이다. 어느 날 두찬이는 왕복 수십리 길을 걸어 투도구약방에 가 아버지께 드릴 약을 사게 되였다. 귀가길에 진화촌을 지날 때 한 찌그러진 초가집에서 웬 울음소리가 들리였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문두찬은 그대로 지나칠 수 없어 그 집 문을 두드렸다.

초가집 구들에는 세대주가 누워있고 마누라 되는 녀인은 구들목에 앉아 넉두리를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세대주는 골병이 깊어만 가는데 돈이 없어서 약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아버지와 같은 병이라 두찬이는 자기 약봉지를 서슴없이 내놓았다. 후에 그 집에서는 두찬의 할아버지를 보고 고마운 인사를 거듭 올리였다.

뒤미처 사연을 알게 된 문창주는 내 딸답다고 거듭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딸애는 녀자라고 얕볼 수가 없었다. 일찍부터 그러했지만 딸애의 소행에서 문창주는 자기를 이어갈 딸애의 앞날이 보이는 듯했다.  딸애 두찬이는 마을의 사립일신학교에 다니면서 완연 다른 사람으로 변해갔다.

문창주의 셋째 손자 문명호와 문창주 셋째동생 문창렬의 딸 문해복(1942년생)이 장인촌 혁명렬사기념비를 찾아. (문명호 제공. 2019년 1월 9일 현지촬영)

때는 20년대 중반이라 로씨야 10월혁명의 사상과 맑스주의사상은 세찬 물결마냥 장인강 두메 골안을 휩쓸었다. 그 진두에는 룡정의 조선공산당 동만도 화요계렬의 동지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룡정 서쪽 비암산너머 래풍동을 거쳐 줄을 뻗쳐오더니 장인강의 마을마다 야학실이 꾸려지고 학교에는 토요일마다 강연회가 열리였다. 그때마다 문두찬은 곧잘 연단에 나섰다.

아버지 문창주의 호소가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더니 딸애 문두찬 또한 아버지에 못지 않았다. 그는 번마다 발언고도 없이 연단에 올라 열변을 토하며 온 장인골에 소문이 자자하더니 1927년에 룡정에서 열린 간도청소년웅변대회에서 세인을 놀래웠다. 룡정에 본부를 둔 동만청년총동맹에서 조직한 웅변대회인데 장인강지역을 대표해 참가한 문두찬은 단연 으뜸이였다.

청중들의 가슴가슴엔 세찬 격랑이 일고 감독차 나온 일제 총령사관의 경찰들은 세번이나 제지시키며 길길이 뛴다. 그래도 두찬이의 열변은 멈출줄 모르니 경찰놈들은 두찬이를 령사관으로 끌고 가서 호통쳤다.

“이년아, 이 강연고는 누가 작성했느냐?”

“내가 작성했어요.”

“정말 내가 작성했어요.”

오늘의 화룡시 투도진 장인촌 일각. (문명호 제공. 2019년 1월 9일 현지촬영)

문두찬의 처음 말이자 마지막 말이였다. 놈들은 문두찬을 한동안 구류시키다가 풀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장인강 시골의 문두찬은 대번에 온 연변에 소문이 났다. 키는 작은편이고 얼굴색이 감실감실했지만 혁명동지들에게 있어서 그는 흠모와 선망의 대상이였다. 이는 16살 때의 일이라 소녀 두찬이는 아버지 문창주의 희망대로 앞길이 창창한 소녀로 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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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가 문창주는 자식들에 이어 문씨 가문의 혁명화에 신경을 썼다. 그 첫 사람이 문창주 넷째 동생의 아들 문화준(문두찬과 사촌남매)이라면 장인강 도대구 출신 전형기(全衡基)도 문창주의 영향하에 항일혁명의 걸음마를 뗀 혁명가이다. 전형기는 문창주의 셋째 동생 문창렬의 안해 되는 전근숙의 사촌동생으로서 1930년 가을에 조직된 평강구유격대의 한 대원이였다.

이해 1930년 가을 평강구유격대 주요 책임자의 한 사람인 로창호가  늘 장인강으로 다니며 이곳 주둔 중국 륙군대의 총을 빼앗을 기회를 노리였다. 마침 이해 음력 9월 3일은 장인강 도대구 혁명가 문화준의 조부 생일날이라 조선 흰두루마기를 입은 중국 륙군대 몇몇이 문화집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이날 아침 로창호는 구유격대 대장 차남균 그리고 장인강의 리명희, 리구희, 리동희, 전형기, 문화준 등 동지들과 함께 리명희 집에 재빨리 모여앉았다. 로창호와 차남균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면서 급히 행동하기로 하였다. 전형기, 문화준을 중심으로 한 무기탈취소조가 인차 무어졌다. 전형기는 문화준의 처남이기도 하였다.

음력 9월 3일 아침, 무기탈취소조는 쥐도 새도 모르게 문화준의 집을 에워쌌다. 문화준과 전형기는 로창호와 차남균의 권총을 몸에 지니고 형기가 작탄 하나를 더 휴대했다. 어느덧 형기가 방문을 열어제끼면서 “꼼짝 말앗!” 하고 벽력같이 소리쳤다. 헌데 ‘땅!’ 하는 소리와 함께 전형기가 륙군대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륙군대 병사 하나가 총을 잡고 있는 줄을 미처 몰랐었다. 의외의 돌변에 뒤문으로 뛰여든 문화준은 급한 김에 총을 쏜다는 것이 천정을 맞히고 말았다.

륙군대 놈들이 행동하는 통에 무기탈취소조는 쓰러진 전형기를 뒤에 남기고 줄행랑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전의 정찰과 경험부족으로 인한 실수였다. 동지들은 아쉽게도 전형기를 잃고 말았다. 로창호 등은 로창호가 갖고 다니던 등사기와 작탄 제조용 약 그리고 망원경을 당지 한 동지의 집에 보관시키고 장인강을 떠났지만 장인강은 자기 동지 전형기를 잃은 손실을 입었다. 문화준은 항일혁명의 길로 드팀없이 나아갔다.

장인강 도대구 출신 문씨 가문에는 문두찬과 나이 비슷한 문창룡(1911ㅡ1932, 항일렬사)이라는 문씨 후예가 있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문창룡은 문씨 가문의 어른 문창주와 사촌관계였다. 어려서부터 살림이 너무 궁색하여 마을의 사립일신학교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부모를 도와  집일을 돌봐야 하였다. 마을의 야학교에 다니며 글을 익히더니 문창주 사촌형님의 영향을 받으며 항일의 길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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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룡은 1930년 6월에 공청단에 가입하고 그해 가을에 장인강 조이구 산속에서 조직된 평강구유격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역시 그해 가을, 문창룡은 장인강부근의 비밀아지트에 피신했다가 장인강주둔 중국륙군대에 체포되여 연길감옥에 투옥되였다. 연길감옥에서 갖은 고초를 겪다가 풀려난 후 1932년 가을에 재건된 평강구유격대에 다시 참가하였다. 그러던 그는 그해 1932년 11월 한차례 무기탈취투쟁에 나섰다가 빛나는 생을 마감하였다.

문창주를 대표로 하는 장인강 문씨가문에는 또 하나의 혁명렬사가 있으니 그 이름은 문두산.

문두산(文斗山, 1920ㅡ1945)은 문창주의 다섯째 동생, 즉 막내동생 문창국의 아들이다. 문창주의 딸애 문두찬과는 사촌관계인데 두살 때인가 두산이는 부모님을 잃고 셋째 큰아버지 문창렬 집에서 자라게 되였다. 문창주의 영향, 더우기 두찬 누나의 영향으로 문두산은 1930년에 벌써 마을의 항일아동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적들에게 굽어들지 않는 굴강한 성격을 키워왔다.

1930년 6월 이후 항일에 온몸을 내번진 문두찬으로 하여 삼촌집은 말이 아니였다. 어느 날 적들은 문두찬을 잡으려다가 헛탕을 치고 두찬의 삼촌 내외와 문두찬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발광하던 적들은 비밀아동단원으로 활동하는 두찬의 남동생 두만(斗万)이도 찾지 못하게 되자 삼촌집에 거처하던 문두산의 두 손을 말꼬리에 잡아매고 마을이고 가시밭이고 마구 끌고다녔는데 말이 아니였다.

이 문두산이 자라서 1945년 8.15를 맞이하더니 총을 메고 연변의 토비숙청에 뛰여들었다. 그러다가 1945년 그해 11월 15일에 토비들에게 피살되였으니 해방전쟁 렬사이다. 누나 문두찬의 손과 발이 되여 뛰여다니던 그제날 항일아동단원의 빛나는 발자취이다. 두찬의 남동생 문두만도 문두산과 더불어 항일아동단원이였다.

장인강 항일 원로 문창주의 영향과 역할은 문씨 가문의 김옥수(렬사), 문두찬(렬사), 문두만, 문화준, 전형기(렬사), 문창룡(렬사), 문두산(렬사), 리진옥(문두만 처제 남편) 등 10여명을 넘어 장인강 골마다 뻗어가니 그 대표주자가 바로 김병수라는 항일혁명가이다.

20년대 중반 그 시절 장인강 도대거우에는 김병수(金炳洙, 1901ㅡ1933, 항일렬사)라는 가난한 집 자식이 있었다. 그는 째질 듯이 어려운 살림에 서당 문고리도 쥐여보지 못한 채 젊은이로 자라났다. 벌써 20대 중반에 들어서는 그는 키도 껑충하고 몸집도 좋아 마을과 주변마을에서 둘도 없는 힘장사로 떠올랐다.

김병수가 씨름선수로 투도구 쪽 대회나 룡정 쪽 대회에 나서면 무조건 1등이였다. 마을사람들은 김병수를 ‘김곰’이요, ‘김바위’라고 불렀는데 문창주는 김병수의 사람됨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항일운동가 문창주는 김병수에게서 장인강의 래일을 내다보았다. 문창주는 김병수를 자주 만나 일제놈들을 때려부셔야 쏘련과 같은 사회가 온다고 마음을 터놓았다.

과연 김병수는 문창주 어른의 뜻을 맘에 새기였고 조선공산당 화요파측에서 조직한 ‘혁명자후원회’에 가담하면서 항일혁명가의 첫발자국을 내디디였다. 그 후 1930년 2월과 3월에 투도구와 이도구에서 벌어진 반일학생시위투쟁의 쟁쟁한 장인강 지도자로 나섰다. 1930년 가을 장인강 조이구에서 조직된 평강구유격대의 주력대원이였다. 1932년 여름부터는 중공평강구위 제7임 서기로 활동하면서 재건된 평강구유격대를 이끌고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 창설에 뛰여든, 장인강을 대표하는 견실한 항일혁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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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보면 문창주는 지난 세기 20세기 초엽 조선의 고향을 떠나 장인강으로 이주한 후 줄곧 항일운동에 참가한 이름난 항일혁명가였다. 1922년 이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나온 후에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불구의 몸으로 다시 항일운동을 벌리면서 장인강 문씨 가족과 장인강일대 많고 많은 사람들을 항일운동에로 부른 뜨거운 항일혁명가였다. 그러던 그는 1930년을 앞두고 실종되고 더는 보이지 않는다. 투도구일본령사분관 경찰서 놈들을 통한 일제놈들의 암해였다.

그에 앞서 문창주의 아버지도 아들과 가족의 항일운동을 성원하다가 세상을 하직했다. 10대 중반과 후반의 문두찬과 문두만은 셋째 삼촌 문창렬 가족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후어머니를 모시고 가족살림을 이어갔다. 문두찬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일제침략자들과 끝까지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의하였다.

1930년 3월에 6년제 사립일신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자유결혼으로 장인강 도대구 한 마을의 리언삼(李彦三, 항일렬사) 리씨댁의 며느리로 되였다. 그해 6월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선후하여 마을의 공청단지부 선전위원과 부녀회 회장, 공청단평강구위 소선대 총책임자 책임을 맡고 활동무대를 장인강으로부터 온 평강구로 넓히였다.

1931년 봄에 문두찬은 평강구 비암촌 부근의 개척 포지골에서 열린 공청단평강구위 확대회의에 참가하였다가 동지들과 함께 개척의 공안분주소 순사들에게 체포되여 연길감옥에 압송되였다. 1932년 3월에 연길감옥에서 풀려나온 후 그는 계속 줄기찬 항일투쟁에 뛰여들었다. 그러던 그는 그해 1932년 12월 2일(음력 11월 5일) 갑자기 달려든 일본토벌대 기마대놈들에 장인강 도대구에서 시아버지 리언삼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다.

문두찬의 남동생 문두만은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 문창주, 누나 문두찬의 이 피의 원한을 가슴에 아로새기였다. 1933년 그는 1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장인강  문씨 가문을 중심으로 주변 여러 마을의 익숙한 포수군 10여명으로 연변에서 유일한 적후 비밀항일자위대를 조직하였다. 비밀항일자위대는 점차 2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장인강과 투도, 룡정, 개산툰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도처에서 일제놈들을 타격하였다.

  문두만은 1939년에 장인강 맹산촌 출신 처녀 리순선과 결혼하고 맏이 문명훈(1942년생)부터 차례로 문명학, 문명해(큰딸), 문명호, 문명전, 문영애(막내딸) 여섯 남매를 두었다. 이태 사이 필자는 이들 맏이를 제외한 5남매를 연변과 서울에서 모두 만났고, 할아버지 문창주와 아버지 문두만 관련 상세한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그네들 이야기에 따르면 아버지를 대장으로 하는 적후비밀항일자위대 항일투쟁은 줄곧 1945년 8월 해방의 날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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