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길동성위 비서처 주임 김석봉 1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95

2020-08-03 08:59:30

항일련군 장령 김석봉 옛 사진. 림구현‘8녀투강유적기념관’ 전시사진. (2017년 8월 1일 현지촬영)

1

동북항일련군의 력사를 펼치면 항일련군의 장령으로 활동한 조선족 영웅인물들이 수두룩하다. 그 가운데는 중공길동성위 비서처 주임, 항일련군 제2로군 비서장, 항일련군 제5군 1사 참모장으로 활동한 김석봉도 있으나 항일련군 연구가들은 조선족 김석봉을 잘 몰라서 마땅한 주의를 돌리지 못하고 있으며 항일련군 장령대오에 편입시키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항일련군 장령으로서의 김석봉은 1938년 10월의 항일련군 부녀퇀 8명 녀전사들 8녀투강 전 과정을 함께 하고 목격한 이로서 흑룡강성 림구현 경내 우스훈강반에 세워진 ‘팔녀투강유적기념관’에서 김석봉을 김세봉으로 사진과 함께 전시하여 그나마 마음의 위안을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 관련 연구자료를 보면 김석봉(金石峰, 1887ㅡ1970)은 래력자료는 보이지 않으나 1887년생이고 쏘련의 동방대학에서 공부를 한 지식인으로서 1929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세련된 혁명가임은 분명하다. 김석봉이 어디서 어떻게 동북의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지만 1930년 8월 그 시절 북만의 주하현에서 지희겸 등과 함께 첫 중공당지부를 조직한 자료는 보인다.

1936년 9월에는 5군 군부 류수처 부주임으로, 중공도남특위 위원으로 등장하여 주의를 끌기도 한다. 그만큼 김석봉의 발자취는 모두 항일련군 제5군과 이어지며 제5군의 시초 활동무대인 녕안현으로 모아진다.

동북항일련군 제5군의 력사는 수녕(绥宁)반일동맹군,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 동북항일련군 제5군이란 3개의 발전변화 시기를 거치면서 흘러왔다.  첫번째 발전시기인 수녕반일동맹군 구성은 1934년 2월의 일이고, 그해 12월에 녕안반일유격대 등과 함께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으로 개편된다. 그때의 주요 활동지는 녕안현 경내였다. 그에 따라 자료연구로부터 보는 김석봉의 5군 등장은 녕안현으로부터 시작된다.

1935년 4월 이후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은 동부파견대, 서부파견대, 녕안류수부대 등 세갈래로 나뉘여져 새유격구 개척에 나서게 되였다. 1936년 2월에는 주보중 장군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동북항일련군 제5군으로 재편성되면서 그 주력부대가 중동철도 북부(中东铁路道北)를 넘나들면서 활동하게 되였다. 그런 와중에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갔다.

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섰다. 1936년 9월 24일, 녕안현 천안두(오늘의 宁安市江南乡泉眼村 동쪽 1킬로메터 되는 곳)에서 길동-동만 지구 당조직과 항일련군 제2-제5군 당위 특별회의ㅡ천안두회의가 열렸다. 회의참가자들로는 5군측의 주보중, 장중화(张中华,제5군 정치부주임), 김석봉 등과 2군측의 왕윤성(王润成, 제2군 2사 정치위원), 진한장(陈翰章, 2군2사 참모장), 후국충(侯国忠, 2군 2사 4퇀 퇀장)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천안두회의는 5군 군장 주보중이 제5군 군부와 교도퇀 제1, 제2대를 지휘하여 계속 북진하면서 먼저 중동로 동쪽 북쪽지구(中东路东段道北地区)로 진출한 5군 제1, 제2사와 회합하기로 하고, 5군 부분적 부대와 2군 2사로 도남 류수부대(道南留守部队)를 결성하여 수녕지구의 로유격구에서 투쟁을 견지하기로 결정하였다.

목단강시 ‘8녀투강기념관’ 외경 (2017년 7월 31일 현지촬영)

2

김석봉 관련 회의결의는 또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새로 조직하는 항일련군 제5군 녕안류수처(宁安留守处)가 도남(道南)에 남은 2군과 5군의 류수부대를 통일적으로 지휘하기로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길동지구의 녕안현위와 동만지구의 동부 현들로 중공도남특위를 구성하여 중동철도 동쪽구간 도남(中东铁路东段道南)의 수녕지구와 액목(额穆),돈화, 왕청, 훈춘, 연길 등지의 당의 조직과 각지 항일련군부대 및 남호두(南湖头)의 교통기관을 지도하기로 한 것. 따라서 장중화가 5군 류수처 주임과 중공도남특위 서기로, 김석봉이 5군 류수처 부주임과 중공도남특위 위원으로 임명되였다.

5군 군부가 5군 주력부대에 이어 중동로를 넘어 북진한 후 장중화와 김석봉은 류수부대로 남은 5군 경위영과 5군 1사 제3퇀, 2군2사 5퇀의 제3련 등 부대를 지휘하면서 녕안현의 제4, 제7,제8구 등지에서 기동령활한 유격투쟁을 벌리였다. 1936년말에는 류수부대를 이끌어 중동철도 북쪽의 액목현에 감쪽같이 진출하였다. 그리곤 진한장이 이끄는 2군 5사 부대와 회합하고 ‘구참(九站)’, ‘구표(九彪)’ 등 반일산림대와의 련합으로 대마구(代马沟)에서 일본군과 위만군의 군용렬차를 습격하여 일본군 105명을 격사하고, 70~80명을 격상한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다. 렬차에 앉은 위만군 부대에 대해서는 ‘중국사람이 중국사람과 싸우지 않는다’는 구호를 선행시키면서 총 한방 쏘지 않고 그들의 무기를 몽땅 해제하였다.

5군 류수처 부주임과 중공도남특위 위원으로서의 김석봉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김석봉은 실상 항일련군과 당내에서의 직무가 더욱 높아 항일련군 제2로군 비서장과 중공길동성위 비서처 주임으로도 나타난다. 그중 제2로군 비서장으로서의 김석봉은 아직 알려지는 자료를 찾지 못했으나 중공길동성위 비서처 주임으로서의 김석봉은 길동성위 비서처 녀전사였던 왕일지(王一知)의 회고문ㅡ <중공길동성위 비서처에서의 나날>에서 잘 보여진다.

왕일지의 회고문은 동북항일련군사료편찬조에서 편찬하고 중공당사자료출판사에서 1987년 12월에 출판한 《동북항일련군사료》(하)에 선참 실리였다. 주보중 장군의 부인인 왕일지의 회고문에 따르면 왕일지가 항일련군 제5군 군부기병대로부터 중공길동성위 비서처로 전근한 것은 1937년 8월 하순이다.

왕일지가 두 기요교통원의 안내하에 의란현 경내 깊은 산속 밀영에 자리한 성위 비서처에 이르니 비서처에서는 그날 저녁으로 전문 환영회를 열어 뜨거이 맞아주었다. 왕일지는 회고문에서 비서처의 동지들은 모두 12명이였다면서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성위 비서처는 도합 12명으로서 비서처 요신일(姚新一)은 실제상 총편집이고 비서처 주임 김석봉은 조선문 총편집이였다. 비서로는 서걸(胥杰), 전창철(全昌哲), 김동식(金东植), 왕일신(王日新), 왕일지. 이 밖에 사업일군 박××이 취사를 관리하고 김영남(金永南)이 잡일과 교통련락을 관리하였다. ”

왕일지는 이 밖에 항일련군의 자제들인 풍만상(冯万祥, 11살)과 고전민(顾全民, 9살) 그리고 중공남만성위와 북만림시성위, 지방당조직을 련락하는 4명의 교통원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1938년 7월, 서란현 삼도통전투를 보여주는 삼도통 옛 사진. (2017년 8월 1일 현지촬영)

3

길동성위 비서처의 주요한 과업은 《구국주보(救国周报)》와 당내간행물 《전초(前哨)》를 출판하고 식자교과서(识字课本), 정치상식교과서, 자체로 편집하는 혁명가곡, 삐라, 동포들에게 드리는 글(告父老同胞书), 위만군사병들을 대상하는 글(告伪满士兵书), 일본군장병들을 대상하는 글(告日本官兵书)을 만들고 찍어내는 등등으로 헤아려진다. 이런 신문간행물과 교과서 등은 모두 중국문, 조선문, 일본문 등으로 등사하는데 한장의 등사용지로 1200부를 찍어낼 수 있었다.

성위 비서처의 일군들의 주요한 업부는 기사나 글들을 쓰고 등사용지에 옮겨놓고 교정을 보는 것이였다. 이 밖에 전체 일군들은 신문지 절단(裁纸), 인쇄, 장정, 부수나누기(分份), 포장 등 여러가지 일을 맡아 했다. 명절의 신문 첫면 첫머리(节日的报纸报), 간행물의 표지(刊物的封面)는 또 세가지 색으로 등사하여야기에 숙련된 전문기술을 수요로 하였다. 이런 일련의 신문간행물 꾸리기는 늘 밤을 새면서까지 해내야 하기에 아침시간대가 되면 서로의 얼굴은 잠기가 어린 얼굴이 아니면 검은 등사기름이 여기저기 찍히여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해마다 7~8월 즈음이면 비서처의 일군들은 큰 곤경을 겪어야 했다. 그 곤경은 바로 모기 따위한테의 시달림이였는데 흐리거나 비오는 날이면 더구나 말이 아니였다. 얼굴이며 손이며 발목이며 살갗이 드러난 곳마다 달려들어 매일 모기류와의 숨가쁜 전쟁을 치러야 한다. 박정희 등 비서처의 동지들은 이런 곤경 속에서 맡은바 과업에 충실하면서 부근의 밀영재봉대와 후방병원, 무기수리소 등지를 찾아 정기적으로 정세보고를 하지 않으면 혁명가요를 가르치고 부대의 전투소식을 통보하거나 부상병들을 위문하며 그곳 동지들과 더불어 공연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절실한 문제는 식사 문제였다. 만일을 위하여 밀영과 떨어진 곳에 밭을 일구어 옥수수나 콩, 수수, 감자, 무우, 배추 등을 심기도 했지만 식량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할 수가 없어 산 아래 지정된 곳에 가서 식량을 메여와야 하였다. 비서처 녀전사들인 박정희 등은 흔히 별을 이고 나가면 달을 지고 돌아와야 했는데 편도 100여리 길을 60~70근씩 지고 걸어야 하니 녀전사들로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이같이 김석봉 소속 성위 비서처는 중공길동성위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았다. 중공길동성위의 설립은 1937년 3월 14일로 알려진다. 이날 북만 방정현의 사도하자(方正县四道河子) 5군 밀영에서 주보중의 지도하에 당의 확대회의가 열리면서 도북(道北)특위를 토대로 중공길동성위를 조직하였다. 새로 탄생한 길동성위는 산하에 도남특위와 벌리-목릉-밀산 3개 현위(勃利、穆棱、密山3个县委), 항일련군 4군과 5군 당위, 8군 당총지를 두었다. 1938년 이후에는 하강특위(下江特委)와 항일련군 제7군 당위도 길동성위의 지도를 받았다.

중공길동성위는 조직된 후 성위기관으로 성위 비서처를 두면서 5군류수처 부주임 겸 중공도남특위 위원으로 활동하던 김석봉을 비서처 주임으로 배치하였다. 이로부터 보면 김석봉은 5군 류수처와 더불어 1936년 9월 천안두회의 이후 중동철도 남부지구에서 활동하다가 1937년초 중동철도 북부지구로 전이하면서 점차 방정현 사도하자 5군밀영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4

길동성위 비서처의 동지들은 항일련군의 문화일군들로서 그 문화수준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주임 김석봉을 놓고 말해도 쏘련 동방대학 출신으로서 중국어, 조선어, 로씨야어, 일본어 등 4개국 언어를 잘 구사할 뿐만 아니라 서법이나 회화도 제법인 직업혁명가로서 항일련군 제5군의 문화건설에 크게 기여했다.

1937년 9월 29일, 이곳 사도하자 후방밀영에서 중공길동성위 상무위원회 사업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에서는 항일련군 제4군과 5군, 7군, 8군, 10군 부대로 제2로군을 결성하기로 결의하고 제2로군 총지휘로 주보중 5군 군장을 추대하였다. 회의결의에 의해 김석봉은 길동성위 비서처 주임 겸 제2로군 비서장 중책을 짊어졌다. 길동성위가 산하 여러 항일련군 부대들을 지도하고 있었으니 사실은 길동성위 비서처 책임이나 제2로군 비서장 책임은 별반 다름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37년 12월부터 1938년초 사이 일본침략군은 2만여명의 병력으로 의란현과 화남현 지구에 대하여 대대적인 대 ‘토벌’을 감행하였다. 비행기 수십대도 토벌에 배합하여 나섰다. 1938년 새해 첫날 이른새벽부터 적들의 포소리가 쿵쿵 울리였다. 중공길동성위와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부에서는 제4군과 제5군의 주력부대가 원유의 근거지를 떠나 오상, 서란 일대로의 서정에 나서기로 결정하였다. 항일련군 제2로군 서정군은 5군 1사를 선견대로 하고 4군 1사와 5군 2사를 한갈래, 4군 2사와 5군 교도퇀을 한갈래로 하여 3개 부대로 편성되였다.

김석봉은 5군 1사 참모장 신분으로 서정에 참가하였다. 김석봉과 길동성위 비서처 사이의 관계는 잘 모르나 1938년 4월 세갈래 서정군은 보청에 집결하였다가 5월에 보청(宝清)에서 머나먼 서정길에 올랐다. 7월 초순과 7월 중순 서정부대는 서란현 삼도통(三道通)전투와 주하현(珠河县, 오늘의 상지시) 루산진(楼山镇)전투 시련을 겪으면서 부대의 손실도 커졌다.

  주하현 루산진 전투 후 나머지 제4군과 제5군은 두갈래 나뉘여지고 제4군의 안순복 등 녀전사들은 5군의 부녀퇀에 소속되여 5군 1사를 따라 행동하게 되였다. 1938년 8월말에 김석봉 소속 5군 1사는 할빈 이서의 오상현 경내에 들어섰지만 5군 2사와의 련계를 잃은 데다가 병력손실이 엄중하여 더는 서정작전에 나설 수 없었다.

  •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互联网新闻信息服务许可证编号:22120180019

吉ICP备09000490-2号 | 吉新出网备字005号 | Copyright © 2007-2020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