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길동성위 비서처 주임 김석봉 2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96

2020-08-10 08:51:16

림구현 ‘8녀 투강 유적기념관’ 외경. (2017년 8월 1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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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 관수범은 참모장 김석봉과 토의하고 1사의 나머지 100여명 대오를 원래의 목단강 연안지대ㅡ조령근거지 쪽으로 돌리기로 하였다. 제2로군 총지휘부를 찾아 다시 적들과 싸우기 위한 대책이였다. 그때 2로군 총지휘 주보중과 5군 3사, 7군, 8군, 9군, 10군은 서정에 나서지 않고 목단강 연안지대에 남아서 투쟁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 부녀퇀의 녀전사는 랭운(冷云), 안순복(安顺福), 리봉선(李凤善),호수지(胡秀芝), 양귀진(杨贵珍), 곽계금(郭桂琴), 황계청(黄桂清), 왕혜민(王惠民) 등 8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은 5군 1사를 따라 풍찬로숙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목단강대안의 조령근거지에 이르러 우스훈하(乌斯浑河) 하류의 서안 줘무강산아래 우스훈하가 굽이를 타는 곳에 이르러 숙영하게 되였다. 오늘의 림구현 경내 조령진 줘무강 산 아래 우스훈하 서안인데 때는 이미 날씨도 쌀쌀한 10월 초순이였다.

우스훈하 서안에 숙영지를 정한 후 사장 관수범은 참모장 김석봉과 토의하고 소속 100명 대오가 우스훈하를 건너 의란현 토성자일대의 목단강 류역에 가 주보중이 이끄는 제2로군 총부와 5군 련락처를 찾기로 하였다. 때는 10월 9일 밤, 서정길에 지치고 귀로에서 지치며 굶주림에 시달린 그들은 날이 밝으면 강을 건너기로 하였다. 날씨가 추워 몇무더기 우등불을 피웠더니 마침 주변을 지나던 원 항일련군 9군 부관이고 반역자인 갈해록(葛海禄)이 보아내고 좋아라고 보고를 올리였다. 조령 일본군 사령관 구마가이 대좌(熊谷大佐)가 밤도와 일본군과 위만군 1000여명을 출동시켜 5군 1사의 숙영지를 삼면으로 포위하니 사태는 험악하게 번져갔다.

했으나 숙영 상태에 빠진 5군 1사는 아군의 숙영지를 포위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적들을 보아내지 못하였다.

10월 10일 새날이 푸름푸름 밝아왔다. 5군 1사는 부녀퇀의 8명 녀전사가 먼저 우스훈하를 건너기로 하였다. 평소 부녀퇀과 어울리며 부녀퇀을 직접 책임진 김석봉이 녀전사들을 데리고 나서기로 했지만 비가 내리며 강물이 많이 불어 강물의 깊이를 알아야 했다. 녀전사들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석봉은 강가에 이르러 녀전사들을 기다리게 하고는 자기가 선참 강물을 헤가르며 한걸음 한걸음 대안으로 나아갔다.

헌데 웬 일인가, 난데없는 총소리가 아침공기를 썰며 아츠랗게 들리였다. 이미 대안에 다달은 김석봉이 돌아보니 자기를 따르기로 한 부녀퇀 8명 녀전사는 뒤늦게야 아군이 적들에게 포위된 것을 보아내고 적의 배후를 답새기기 시작하였다. 100여명 대오의 안전을 위하여 결연히 도강을 포기하고 적들을 자기들에게로 끌기 위한 선제사격이였다.

중국혁명사에, 동북항일련군사에 이름난 ‘8녀 투강’ 전투는 이렇게 벌어졌다. 항일련군의 8녀 투강 영웅들은 이렇게 생겨났다. 부녀퇀 8명 녀전사의 눈물겨운 피어린 반격이야기, 나중에 탄알도 떨어지고 우스훈하에 뛰여들었다가 적들의 투항권고를 무시한 그들, 적들의 미친 듯한 기관총사격과 포격으로 전부가 물결치는 우스훈하에 쓰러지며 다시 일어서지 못한 그들을 강 대안에 이른 김석봉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일부 자료는 김석봉이 대안에서 적들에게 먼 사격을 가하며 주의력을 자기에게 끌려고 했다고도 한다. 그러는 김석봉은 자기의 가슴만 잡아뜯었다…

림구현 ‘8녀 투강 유적기념관’에 전시된 8녀 투강 립체상. (2017년 8월 1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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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봉은 8녀 투강의 전 과정을 목격한 유일한 견증자였다. 8녀 투강 전투 후 강의 깊이와 물길을 알려고 먼저 강을 건넌 항일련군 장령 김석봉은 항일련군 5군부대를 다시 찾아 합류함을 보인다. 그 연구자료가 5군 군사와 5군 부관장(副官长) 풍비양( 冯丕让)전기에 잘 알려진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항일련군 제2로군 총부의 결의에 따라  2로군 소속부대(4군, 5군, 7군, 8군, 10군)들은 1938년 1월부터 1939년 4월까지 목단강지역의 조령(刁翎)근거지에서 선후 두차례 포위돌파를 거치면서 우리 항일련군부대 대부분이 성공적인 전이를 하게 된다. 5군 부관장 풍비양과 길동성위 비서처 주임 김석봉이 이끄는 400여명 부대가 남아 조령근거지에서 참새전(麻雀战)을 벌리면서 대부대의 전이를 엄호하여 나섰다.

항일련군 제2로군의 력사가 이를 잘 알려준다. 1939년에 이르러 동북의 항일련군 투쟁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들어선다. 2로군 소속부대가 대부분 림구 경내에서 전이한 후 중공길동성위는 5군 부관장 풍비양과 성위 비서처 주임 김석봉이 400여명 대오를 이끌고 림구, 즉 조령근거지에 남았다.

1939년 3월 30일, 북만의 삼강지역에 대한 일본군과 위만군의 ‘삼강대토벌(三江大讨伐)’이 시작되자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 주보중은 목단강 서안(西岸)의 사도하자(四道河子)골에서 중공길동성위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는 5군 군부 부관장 풍비양과 성위 비서처 주임 김석봉이 항일련군 류수부대 400여명을 이끌고 참새전술로 적들 정예부대를 분산시키면서 주의력을 끌어 우리의 주력부대가 적들의 겹겹한 포위를 돌파할 수 있도록 결의하였다.

그해 1939년 4월 10일, 항일련군 제2로군 총부와 소속 주력부대는 우스훈하 북안의 로투구(乌斯浑河北岸老头沟)일대에 집결하였다가 대오를 여러갈래로 나누어 포위돌파를 시작하였다. 주보중은 2로군 총지휘부를 직접 이끌면서 비밀리에 동쪽으로 빠지였다. 그들은 때론 적들을 주동적으로 공격하기도 하고 때론 적들의 추격을 벗어나기도 하면서 기동령활한 전술로 적들의 겹겹한 봉쇄선을 헤치였다. 그해 1939년 5월에 주보중이 이끄는 2로군 총지휘부는 보청(宝清) 서남에 위치한 제2로군 총부 류수처 주둔지에 이르면서 적들의 추격에서 벗어났다.

그럴 때 풍비양과 김석봉은 목단강지역에 남은 류수부대 400여명을 이끌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일본군과 위만군 ‘토벌’부대들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이들 류수부대의 신출귀몰과 엄호로 하여 제2로군의 주력부대들은 적들의 겹겹한 포위를 헤쳤다.

항일련군 제2로군 부대에서의 김석봉의 역할과 지위가 잘 알려진다. 항일련군 장령으로서의 김석봉의 역할과 지위는 1939년 5월 19일 한편의 서한에서도 잘 알려져 심심한 경의를 드리게 된다.


김석봉 주임동지:

갈지계(葛志啓) 부관, 김경석 비서 두 동지를 지정된 곳에 파견하여 당신들을 찾아 련락하니 당신이 요신일(姚新一), 리홍수(李洪秀), 방룡인(方龍仁), 손소당(孫紹堂), 서걸(胥杰), 박정희(朴正熙), 안병호(安丙浩), 량명승(梁名升) 등 동지를 인솔하여 밤길을 다그쳐 내가 있는 곳으로 모이기 바란다. 절대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된다! 가장 필요한 문건과 인쇄기는 반드시 휴대해야 할 것이다.

만약 채세영 군장동지가 이미 당신들을 만났다면 당신들은 제5군 군부를 따라 며칠 행동하고 다시 총지휘부로 오기 바란다. 그러나 갈지계 부관과 김경석 비서는 인차 나한테 와서 보고하기 바란다.

경례를 드린다 !

음력 4월 1일

1939년 2월, 그 시절 목단강 서안의 련화포 산곡에서 벌어진, 절대적으로 우세한 적들과의 조우전에서 중공길동성위 비서처 요신일, 박정희 등 10여명 동지들이 희생. 림구현 ‘8녀 투강 유적기념관’ 전시사진. (2017년 8월 1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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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한은 ‘인원을 파견하여 주요한 간부들을 소집할 데 관하여 ×××이 김석봉에게 보내는 서한’으로 시간은 1939년 5월 19일로 되여있다. 1939년 음력 4월 1일은 양력으로 그해 5월 19일이니 서한의 제목 아래 시간을 양력으로 밝힌 것 같다. 이 서한은 김우종 주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출판으로 된 《동북지역 조선인 항일력사사료집》 제9집 제263페지에 실리였는데, ‘내용에 근거하여 고증하면 작자는 주보중임’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러 면의 연구로부터 보면 서한의 작자는 확실히 그 시절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인 주보중 장군이 옳았다.

이 서한은 1939년 3월 30일, 목단강 서안의 사도하자에서 열린 중공길동성위 확대회의 결의로 5군 부관장 풍비양과 성위 비서처 주임 김석봉이 400여명 대오를 이끌고 조령근거지에 남아 투쟁을 견지하던 그 어려운 시절임을 잘 알리여 깊은 감회를 자아낸다. 풍비양과 김석봉은 비록 조령근거지에 남아 제2로군의 포위돌파를 엄호하고 담보하여 나섰지만, 제2로군 총지휘부와의 련락은 비밀교통선을 통해 자주 오고갔음을 보여주고있다.

또, 주보중의 이 서한은 김석봉 관련 중요한 정보가치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1939년 5월 그 시절의 김석봉은 5군 부관장 풍비양과 더불어 조령근거지에 남아 400여명의 류수부대를 지휘하고 있지만 그의 주요신분은 의연히 중공길동성위 비서처 주임이라는 데 있다. 생각해보시라. 그 시절 중공길동성위가 동북항일련군 제4군과 5군, 7군, 8군, 10군ㅡ5개 군을 직접 지도하는 당의 지도기관이라 할 때 김석봉은 그 지도기관인 길동성위 주요 책임동지의 한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둘째는 1939년 5월 그 시절의 김석봉은 의연히 중공길동성위 비서처 주임이라는 데 있다. 적지 않은 연구자료들이 요신일이 성위 비서처 주임이라고 못박고 있어 더욱 그러하다. 서한은 분명 김석봉이 요신일, 손소당, 박정희 등 동지들을 인솔하여 제2로군 총부를 찾아오라고 지시하고 있다. 그때의 요신일, 손소당, 박정희 등은 모두가 김석봉이 지도하는 길동성위 비서처 동지들이였다. 박정희는 필자가 한편의 전기로 정리하여 필자가 출판한 《항일련군의 조선족 녀전사들》에 올리다싶이 항일련군의 조선족녀전사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주보중 장군은 성위 비서처 주임 김석봉에게 지시서한을 쓸 때만해도 요신일, 박정희 등 한패의 성위 비서처 동지들이 적들과의 조우전에서 당년 피어린 투쟁환경에서 희생된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사연은 이러하다. 1939년 2월의 어느 날 요신일, 박정희 등 성위 비서처 10여명 동지들은 성위 비서처가 자리한 방정현 모지를 떠나 2로군 총지휘부로 돌아올 때 목단강 서안의 련화포(莲花泡) 산곡에서 400여명의 적토벌대와 조우하게 되였다. 박정희, 김영남(金永南), 김일(金一) 공례(孔礼, 胥杰), 손소당(孙绍堂) 등 10여명 동지들은 요신일의 지휘하에 적들과 결사전을 벌리면서 마지막 탄알 한발까지 다하며 싸우다가 모두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들의 더운 피는 바위와 흰 눈을 붉게붉게 물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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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동성위와 2로군 총지휘 주보중 장군은 뒤미처 성위 비서처 동지들의 비장한 최후를 알고 한갈래 소부대를 현지에 급파견하여 요신일, 박정희 등 10여명 렬사들의 유체를 수습하며 련화포 서안(莲花泡西岸)의 한 로송 밑에 묻도록 하였다. 추도회를 가지던 날 주보중 장군은 만가(挽歌) 한수를 지어 성위 비서처의 동지들을 추모하였다.

……

동지들이여 고이 잠드시라!

당신들 피의 발자취 따라

목숨으로 민족해방 쟁취하리니

앞은 곧 승리이고 전진은 곧 승리여라

당신들 위대한 빛발과 업적이여라!


(同志们!安息吧!

踏着你们洒下的血迹,

誓将民族解放进行到底。

前面就是胜利!前进就是胜利!

那是你们伟大光辉永不褪色的业绩。)


요신일, 박정희 등 10여명 동지들은 일찍 성위 비서처 주임 김석봉과 생사를 같이하던 동지들이였다.

1940년초 이후 동북 경내에서 활동하던 항일련군 부대들은 명령을 받고 륙속 쏘련 경내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된다. 1941년 가을 이후 풍비양, 김석봉이 이끌던 제2로군 류수부대도 쏘련으로의 전이길에 올라야 했다. 그런데 김석봉은 투쟁의 수요로 쏘련행에 나서지 못한 것 같다. 그 시절을 알리는 자료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 후의 관련 자료를 보면 김석봉은 어인 영문인지 항일부대를 떠나 길림성 영길현 산구로 돌아간 것으로 나타난다. 이름은 김상걸(金尚杰)이라 변성명하고 살다가 1962년에 당적을 회복하고 1970년에 병사하였다. 생전에 그는 자기가 항일련군 전사라는 것을 잊을 수 없었고 관련 부문에 8녀 투강의 진실한 목격과정을 여실히 알리였다.

  김석봉은 바로 그런 항일혁명가였다. 1938년 10월 10일 그날 포위를 헤치고 나온 전우와 함께 8녀 투강의 진실한 위치를 확인하여주었기에 관련 부문은 1982년에 림구현 조령진 줘무강 산 아래, 우스훈하 서안을 8녀 투강 순난지로 정식 확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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