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녀투강’ 영웅 안순복의 이야기 1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97

2020-08-17 09:13:05

1988년 8월 1일, 락성된 목단강시 목단강반의 강빈공원에 세워진 팔녀투강기념군상. (2017년 7월 31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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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9년 9월 15일과 9월 22일, 내 고향 연변 연길시에서 동녕현 로흑산특별지부 서기 리경천(李擎天,1896ㅡ1941) 렬사의 친손녀와 친손자들인 리은화씨와 리근강씨 취재기회를 가지였다. 취재 가운데서 리은화씨와 리근강씨는 어려서부터 부모님들께서 들은 이야기라면서 북만 항일련군 부녀퇀의 팔녀투강중에 그들 리씨 관련 친척이 있음을 터놓았다. 리경천 렬사 관련 안순복 렬사 관련 처음 듣는 신선한 얘기였다.

리경천 렬사의 친손녀 리은화씨는 팔녀투강 관련 흥미를 끄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줬다. 이야기는 30여년 전의 흑룡강성 동녕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리은화씨는 어머니 주옥순을 모시고 목단강 해림에 사는 녀동생 리선일(李善一1947년 생, 남매에서 둘째) 집으로 놀러 갔다.

때는 1988년 9~10월경의 일이였으니 목단강시 목단강반의 강빈공원(江滨公园)에 항일련군의 ‘팔녀투강기념군상’(1988년 8월 1일 락성)이 금방 세워졌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뉴스를 알게 된 주옥순 로인은 진정하지 못하더니 목단강시 강빈공원으로 기어이 가보자고 하셨다. 그렇게 리은화씨와 리선일씨는 60대 중반의 어머니 주옥순을 모시고 팔녀투강기념군상을 찾았고 어머니는 팔녀투강의 아무개는 항일가족인 우리 친척이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팔녀투강’은 중국혁명사에서 빛나는 영웅집체이고 항일련군 제5군과 제4군의 녀전사로 무어진 항일련군 부녀퇀의 한갈래라는 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 8명중 제4군 재봉대 대장 안순복과 제5군 소속 리봉선은 항일련군의 조선족 녀전사들이였다. 리은화씨와 리근강씨 취재에서 인차 갈피를 잡기 어려운 것은 ‘팔녀투강’ 중의 안순복과 리봉선 가운데 누가 항일렬사 리경천의 친척일가하는 점이다.

우리의 시선은 목릉현 신안툰(穆棱县新安屯) 태생이라는 안순복(安顺福,1915ㅡ1938)한테로 모아진다. 2010년 9월의 연길 현지취재와 귀가 후 전화통화에서 안순복이 옳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안순복은 목릉출신으로 알려지지만 알고 보니 동녕현 출신 항일렬사 리경천의 사촌동생 리봉수의 부인 안순화의 사촌 녀동생으로 밝혀져 엄청 고무를 받았다.

리경천의 친손녀 리은화씨에 대한 취재에 따라 지금껏 세상이 잘 모르던 리경천 렬사의 고향마을이 서서히 펼쳐졌다. 동녕사람들은 리경천 렬사를 동녕출신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동녕이 아닌 훈춘현 대황구사람으로 알려진다. 사실 대황구는 고향마을은 아니고 진짜 고향은 함경남도 단천군 운송리, 1896년생 리경천은 고향에서 잔뼈를 굳히며 자라다가 결혼하기에 이르렀으니, 리은화씨의 아버지로 되는 리명호도 1919년생 단천태생이고 어머니 주옥순도 1924년생 단천태생이였다.

동녕요새유적진렬관내 동녕항일련군영웅원에 모셔진 당년 동녕현 중공로흑산특별지부 서기 리경천 렬사 조각상과 손자 리근강씨. (사진 리근강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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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항일렬사 안순화는? 안순화(安顺花, 1909ㅡ1937)도 당연히 함경남도 단천군 운송리 사람. 본가집은 털면 먼지 뿐인 신세라 안순화는 15살 때에 결혼문에 들어서야 했고 18살에 첫 아이를 낳기에 이르렀다. 그의 남편은 1901년생 리봉수였으니 이 리봉수는 단천군 운송리에서 함께 지내는 리경천의 사촌동생이다.

이는 또 후일 항일련군의 녀전사 안순복도 그의 부모님들 고향이 목릉현 신안툰이 아니라 조선 단천군임을 시사하고 있다. 안순복의 부모님들은 운송리의 전주 리씨 일가들보다 먼저 두만강을 건너 목릉현으로 이사하고, 전주 리씨네도 살기가 좋다는 두만강 이북이주를 강단하기에 이른다. 그때가 1930년 초경으로 헤아려지는데 사촌들인 리경천네와 리봉수네가 새삶의 터전을 잡은 곳은 두만강 북쪽의 훈춘현 동포대(东炮台, 원 마천자향 한개 촌)였다.

그 시절 훈춘현 동포대는 악패지주로 소문난 한희삼의 관할구역이였고 리경천네와 리봉수네는 한희삼의 소작살이를 면치 못하였다. 1930년 연변 5.30폭동 이후 동포대에 중공지부가 조직되고 리경천과 리봉수, 안순화 등은 모두 선후로 동포대지부 중공당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리경천과 리봉수의 입당시간은 1930년 가을과 겨울 사이로 보이고 안순화는 1931년초로 알려진다.

1931년 가을과 1932년 봄, 추수춘황을 거치면서 리경천의 사촌 리봉수와 안순화 부부는 1932년 5월에 현안의 연통라자로 전이하고 리경천은 가족과 더불어 훈춘현성에서 북으로 90리쯤 되는 대황구로 전이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때 안순복은 1932년 초에 앞서 조선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목릉현 신안툰에서 소녀시기를 거쳤다.

목릉현 신안툰은 1920년대 초반부터 조선인혁명가들이 많이 드나들며 활동하던 유서깊은 고장이다. 이런 마을에서 자라며 안순복은 어려서부터 항일구국의 사상으로 물들어 있었다. 순복이는 13~14살 때부터 아버지와 오빠를 따라 혁명활동에 열성을 보였다. 1931년 9.18사변 후 신안툰에는 중국공산당 기층지부와 공청단, 부녀회, 소선대 등 조직들이 뿌리를 내리며 군중적 항일활동이 활발해졌다.

1931년 이해 17살인 안순복은 마을의 안영신(安永信) 소녀들과 더불어 소선대에 가입하여 보초를 서고 포스터를 붙이며 나쁜 사람을 가만두지 않았다. 어느 날, 마을에 토비가 나타나 물건을 빼앗으며 발광하다가 안순복을 보자 겁탈하려고 달려들었다. 안순복은 흉악한 토비를 무서워할 대신 결사적인 박투를 벌리며 틈탈 기회를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토비가 총이라도 쏠가봐 겁이 나서 눈물을 머금고 딸애와 말하였다.

“얘, 잘못하면 죽어. 토비가 하자는대로 내버려두면 안되니?”

“안돼요. 난 죽어도 깨끗한 몸으로 죽을 거예요.”

그러면서 안순복은 목숨을 걸고 토비와 싸웠다. 나중에 토비는 순복이를 내버려두고 달아나버렸다. 안순복은 바로 이 같은 소녀였다. 혁명활동의 경력은 그에게 굴강한 성격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림구현 우스훈하 현지에 세워진 팔녀투강유적기념관내 안순복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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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월의 어느 날 적들은 반역자의 밀고로 신안툰에 달려들어 30여명의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 혁명자들을 마구 체포하였다. 그중 일곱 사람이 생매장당하면서 마을의 당단 조직은 엄중한 파괴를 당하였다. 그들 7명 가운데는 안순복의 아버지와 동생도 들어있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지만 안순복은 무너지지 않고 이를 옥물었다. 아버지의 원한, 오빠의 원한, 마을의 원한, 민족의 원한은 안순복의 가슴을 활활 불태웠다.

이해 1933년 안순복은 우리 나이로 19살이였다. 이미 결혼한  안순복(安顺福)은 남편 박덕산(朴德山)과 더불어 복수를 다짐하면서 산속에 자리잡은 밀산항일유격대ㅡ공산당원 리연록이 이끄는 항일구국유격군에 가입하였다. 시간은 1933년 2월을 가리킨다. 안순복은 재봉대에 배치되였고 인차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안순복의 남편인 박덕산의 첫 등장이다. 박덕산을 알리는 자료가 없어 박덕산의 신상을 알 수가 없지만 목릉현 신안툰 사람이고 밀산항일유격대 골간대원으로 활약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이에 앞서 목릉 신안툰에서 혁명활동을 시작하면서 결혼한 이들 부부는 슬하에  어린 딸애 하나를 두었었다.

안순복과 박덕산 부부 등이 머무르며 활동하는 고장은 밀산현 서대림자(西大林子) 마을이였다. 서대림자 마을은 조선족 20~30세대와 한족 10여호가 모여 사는 마을로서 외지에서 온 혁명자가족도 적지 않았다. 마을에는 지하당지부가 조직되고 반일회가 활동하니 적들의 주시가 따르기 시작하였다.

1934년 가을에 서대림자당지부에서는 일제놈들과 위만군 놈들의 때도시도 없는 피해를 미연에 막아내고서 밀산현위의 지시에 좇아 마을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당원과 단원들, 항일회원들을 모두 80리 밖의 양강구(杨岗沟)로 전이하기로 결정하였다. 항일유격대의 엄혹한 생존환경과 투쟁환경에 따른 조직의 결정이였다.

그러나 이 전이결정을 실시하기란 쉽지만은 않다. 외지에서 모여든 혁명자가족들중에는 어른들을 따라 행동하기 어려운 어린아이 8명이 있었는데 서대림자당지부에서는 이 아이 8명을 모두 서대림자의 한족 반일회원들에게 맡겨 부양하기로 하자 반발이 심하였다. 누구도 응하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죽을지언정 넘겨줄 수 없다.”는 것이  유격대 녀전사들의 견결한 태도였다.

그때 박덕산과 안순복 사이에 두어살되는 어린 딸애가 있었고 목릉현 항일유격대 대장 김한식(金汉植)과 그의 안해 리범숙(李范淑) 사이에도 금방 다섯살 나는 아들애 김현철(金贤哲)이 있었다. 밀산현위 위원이고 서대림자-백포자(白泡子)지구구위 서기로 활동하는 황옥청(黄玉清)과 부녀회 책임자 허현숙(许贤淑)에게도 동행하지 못할 세살배기 딸애가 있으니 모두 8명이였다.

안순복은 남편의 설복을 받으면서 조직의 결정을 견결히 따르기로 하였다. 허현숙 녀전사도 받들어 나서면서 하나 둘 마음이 움직이였다. 안순복 등 녀전사들은 애들의 옷자락에 생년월일, 이름, 부모 이름을 적은 천오래기를 달아주면서 부양할 분들에게 15년가량이면 돌아올 수 있으니 아무쪼록 잘 키워달라고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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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아이들 8명을 맡은 분들은 반일회원들인 루경명(娄景明) 등 당지 혁명군중들이였다. 안순복 부부는 이같이 어린 딸애를 중국인 집에 부탁하고 서대림자를 떠나야 했으니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이를 본 군중들은 깊이 감동되여 눈물을 흘리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신들은 정말 녀영웅호걸들이오!”

1934년 10월, 박덕산 소속 밀산항일유격대는 밀산현 하다하 북산골(密山县哈达河北山沟)에서 열린 현위확대회의 결의에 따라 동북인민항일혁명군과 합병하면서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개편되였다. 중공밀산현위에서는 부대의 지도력량을 보다 충실히 하고저 박봉남, 리근숙, 황옥청, 허현숙, 김근, 박덕산, 안순복 등 동지들을  제4군에 파견하였다. 그에 따라 양강구는 서대림자 마을에서 전이한 조선족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 반일회 가족들이 모여 사는 밀영으로 되였다.

안순복, 박덕산 소속 동북항일동맹군은 중공밀산현위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는 항일무장으로서 산하에 1개사, 3개 퇀, 1개 독립영을 두었다. 박덕산 등 밀산항일유격대의 수십명 조선동지들은 모두 제1사 제2퇀에 배치되였다. 제2퇀은 물론 동북항일동맹군 산하 여러 퇀들은 군사자질을 높이며 적들과 싸우는 한편 1934년 12월부터 1935년 1월말까지 지방당조직과 배합하면서 밀산, 벌리, 액목 3개현의 산간지대접근지대에 항일구국회 47개를  조직하였다. 소속 항일구국회 회원은 300여명에 달하였다. 안순복은 동북반일동맹군 제4군 재봉대 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은 설립된 후 밀산지구에 대한 적들의 중점소탕을 피하고저 군지휘부를 밀산의 하다하지구에서 벌리의 대통구일대(勃利大通沟)로 옮기고 밀산, 벌리, 목릉 3개현 변계지대에서 활동하였다. 이 지구들에서 박덕산 소속 2퇀은 류가지주장원(刘家地主大院)을 습격하기도 하고 산림대와 배합하여 각봉루(阁凤楼)전투를 벌리기도 하면서 천과 밀가루, 신 등 대량의 군수물자를 해결하여나갔다. 거듭되는 전투의 시련 속에서 박덕산 소속 2퇀은 군사, 정치 자질을 끊임없이  높이며 항일련군 제4군의 주력부대로 성장하였다.

  1936년 3월,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은 동북항일련군 제4군으로 재편성되고 조선족 황옥청이 군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박덕산은 4군 4퇀 정치부주임으로, 안순복은 4군 재봉대 대장으로 부임하였다. 그해 11월에 4군의 제2사가 항일련군 제7군으로 개편되였다. 4군 소속부대는 새롭게 정돈되면서 박덕산은 제4사 정치부 주임으로 승진하였다. 4사는 400여명으로서 3개 퇀을 편성하였다. 1937년초, 4군은 원래의 700명으로부터 4개 사, 10개 퇀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성과에는 안순복, 박덕산 부부의 숨은 노력도 깃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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