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녀투강’ 영웅 안순복의 이야기 2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98

2020-08-24 08:48:41

팔녀투강유적기념관내 전시된 안순복의 남편이며 항일련군 제4군 4사 정치부 주임인 박덕산 사진. (2017년 8월 1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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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복과 박덕산은 부부 사이라지만 박덕산은 전방에서 뛰고 안순복은 후방밀영에서 활약했기에 서로 어울릴 기회가 거의 없었다. 몇달씩 종무소식일 때도 가끔 있었으니 항일련군의 군사환경은 험악하게 번져갔다. 1937년 겨울 이후 적들의 대토벌과 봉쇄정책으로 북만항일련군 부대들의 처지는 갈수록 어려워갔다.

1938년 여름, 박덕산은 소속부대를 이끌어 의란현 경내에서 대합탕(大哈塘)전투를 벌리였다. 전투는 의외로 매우 치렬하게 번지였다. 부대가 임무를 수행하고 철퇴할 때 박덕산은 주동적으로 부대의 엄호 임무를 맡아나섰다. 엄호수행중에서 박덕산은 불행하게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 밖에 우리는 안순복의 남편 박덕산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1938년 봄에 일본침략자들은 삼강성(三江省, 지금의 흑룡강성 합강지구)일대에 대한 대토벌을 시작하였다. 중공길동성위와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부에서는 제4군과 제5군의 주력을 근거지를 떠나 오상, 서란 일대로 전이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족 황옥청(黄玉清)이 제4군 정치부 주임 겸 제1사 정치위원이였다. 그는 4군과 5군의 동지들과 함께 목단강지구의 5군 후방기지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병력을 집중하여 서정(西征)을 다그치기로 결의하였다.

1938년 5월에 제4군과 제5군은 보청(宝清)에서 출발하였다. 7월 2일에 서정부대는 목단강 연안의 삼도통(三道通)을 습격하였다. 이날 그들은 일본군수비대와 경찰분주소를 까부시고 많은 무기와 탄약, 식량을 로획한 뒤 정식으로 서정을 시작하였다.

제4군과 5군으로 구성된 서정부대에는 녀전사들이 적지 않았다. 4군 정치부 주임 황옥청의 안해 허현숙도 그중의 한 사람이였다. 그들은 부대와 함께 풍찬로숙하면서 삼도통전투에 뛰여들었다. 평소엔 선전원, 봉사원이 되여 앞뒤로 뛰여다니며 부대의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7월말에 서정부대는 주하현(지금의 상지시) 루산진(楼山镇)전투를 벌리였다. 허현숙 등 조선족녀전사들은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다. 아군은 전투에서 큰 승리를 얻었으나 적들이 계속 수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지꿎게 달려들자 제4군과 제5군은 두갈래로 나뉘여 행동하게 되였다. 제4군의 녀전사들은 제5군의 부녀퇀에 소속되여 5군 1사를 따라 행동하게 되였다.

5군 부녀퇀은 1936년 봄에 조직된 항일부대이다. 시초 그들은 녕안일대서 활동하다가 목릉일대로 전이하게 되였는데 부녀퇀의 대다수 전사들이 각 련에 소속되다 보니 이해 여름 군부를 따라 행동한 부녀퇀의 녀전사는 10여명에 불과하였다. 이 10여명중 책임자 왕옥환(王玉环)을 제외하고는 최순선(崔顺善), 주신옥(朱信玉) 등 모두가 연변의 2군에서 넘어온 조선족녀전사들이였다. 1938년 서정길에서 부녀퇀은 20여명으로 구성되였는데 그중 안순복, 리봉선(李凤善), 허현숙 등 적지 않은 녀전사들이 조선족으로 헤아려졌다.

림구현 팔녀투강유적기념관내 모셔진 안순복 반신조각상. (2017년 8월 1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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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舒兰), 오상(五常) 일대에로의 서정길은 피로 얼룩진 서정길이였다. 안순복, 리봉선 등 녀전사들은 강의한 의력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간난신고를 이겨내며 부대를 따라 오상현 경내에 들어갔다. 부대는 오상현 경내에서 적들의 첩첩한 포위 속에 빠지였다. 적들은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대거 진공하였는데 낮에는 비행기가 마구 폭격하고 밤에는 포사격을 퍼부었다. 전투는 도처에서 가렬처절하게 벌어졌다.

1938년 8월, 제5군 서정부대 책임자 송일부(宋一夫)가 변절하여 부대의 서정계획이 드러났다. 게다가 5군 1사가 오상 경내에서 5군 2사와 련계를 잃게 되자 부대의 처지는 자못 어려웠다. 1사 사장 관수범(关书范), 후에 변절)은 부대를 거느리고 목단강일대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왕복 수천리의 서정길에서 5군 1사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귀로에 올랐을 때는 병력이 10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부녀퇀의 희생도 막대했다. 조선족 녀전사 허현숙도 오상 경내에서의 한차례 전투에서 불행히 체포되여 무참히 살해당했다. 서정에 참가한 부녀퇀이 그해 10월에 부대를 따라 림구현(林口县) 경내의 우스훈강(乌斯浑河) 기슭에 이르렀을 때는 안순복(安顺福), 랭운(冷云), 양귀진(杨贵珍), 왕혜민(王惠民), 호수지(胡秀芝), 곽계금(郭贵琴), 황계청(黄桂清), 리봉선(李凤善) 등 8명밖에 남지 않았다.

11월을 앞둔 북만의 10월 하순은 제법 썰렁했다. 강심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한겨울을 방불케 하였다. 5군 1사는 이튿날 새벽에 강을 건너가 제5군 사령부를 찾기로 하고 우스훈강과 목단강 합수목에서 8리쯤 떨어진 우스훈강 기슭의 줘무강(柞木岗,짜작나무)고개에 숙영지를 정하였다.

어느덧 부대숙영지 여기저기에 우등불이 타올랐다. 1사 전사들은 주린 배를 달래다 말고 이리저리 쓰러져 굳잠에 빠져들었다. 그 시각에도 안순복, 랭운, 리봉선 등 부녀퇀의 녀전사들은 우등불가에서 밤을 패면서 전사들의 옷깁기에 여념이 없었다.

허나 여라문개의 우등불은 부대를 로출시켰다. 그날 밤 이 부근 양자구(样子沟)의 특무 갈해록(葛海禄)은 삼가자(三家子)에서 계집질에 등이 달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귀가길에 올랐다. 도중에 이자는 우등불을 발견하고 일본수비대 대장 하시끼한테 알리였는데 이자는 또 저들 두목 구마가이에게 보고를 올리였다. 구마가이는 밤도와 일본군과 위만군 1000여명을 출동시켜 5군 1사의 숙영지를 삼면으로 에워싸고 날밝기를 기다렸다.

림구현 팔녀투강유적기념관내 전시된 안순복과 박덕산 사진과 글 전시부분. (2017년 8월 1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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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이 푸름푸름 밝아왔다. 중공길동성위 비서처 주임이고 1사 조선족 참모장인 김석봉(金石锋)은 안순복 등 녀전사들을 데리고 먼저 도강하게 되였다. 김석봉과 녀전사들이 강가에 이르니 물이 많이 불어 강폭이 넓어져 강물의 길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녀전사들의 안전이 걱정되였다. 김석봉은 주저 없이 선참 강물에 뛰여들어 대안으로 나아갔다.

바로 이때 난데없는 총소리가 고요한 새벽공기를 썰며 귀청을 때렸다. 야단났다. 김석봉 참모장은 이미 대안에 닿았지만 강 서쪽 기슭에는 아직도 8명의 녀전사가 대기중이였다.

적들은 삼면으로 1사 주둔지에 공격을 들이댔다. 부대와 1500메터쯤 떨어진 우스툰강가 버드나무 숲속에 엎드린 부녀퇀의 전사들은 적들을 자기들한테로 끌고저 안순복과 랭운의 지휘하에 3개 전투소조로 나뉘여 적들에게 사격을 들이댔다.

적들은 과연 녀전사들의 유인술에 걸려들었다. 미련한 적들이 강기슭에 신경을 쓸 때 1사 주력부대는 인차 떡갈나무골로 전이하였다. 그러나 녀전사들을 남겨두고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들은 다시 원 지점에로 지쳐왔으나 적들은 이미 그 일대와 강기슭을 전부 통제한 데서 어찌할 수 없었다.

적들은 강기슭의 병력이 고작 몇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생포하기 안성맞춤이라 여겼다. 그때 녀전사들에게는 보총과 수류탄밖에 없었다. 그들은 적들의 거듭되는 진공을 련속 격퇴시키다가 가까이 다가들었을 때 일제히 수류탄을 뿌리였다. 놈팽이들은 일부 주검을 내고 수림 쪽으로 물러섰지만 100여명에 달하는 적들을 막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아침해가 벌써 저만치 솟아올랐다. 적들이 전술을 바꾸어 박격포를 들이대니 버드나무가 송두리채 날아나면서 은페할 곳마저 없었다. 황계청, 곽계금이 부상입고 비칠거리였다. 그들이 강변 쪽 둔덕진 곳으로 철거하니 탄알이 거덜났다. 인젠 수류탄도 마지막 하나였다.

적들은 바싹바싹 다가들었다. 최후를 각오할 때가 되여왔다. 녀전사들이 사품치며 흐르는 우스툰강을 두고 생사결단을 준비할 때 안순복과 랭운이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다.

“우리는 절대 놈들의 포로가 될 수 없어요. 우리 함께 물속에 뛰여듭시다!”

“옳아요. 물속에 뛰여듭시다!”

여덟 자매는 한결같이 손에 손잡고 강물에 들어섰다. 적지휘관놈은 “빨리 산 채로 잡아라 산 채로!” 하고 고아대다가 강변으로 나오면 목숨도 살려주고 상금도 많이 준다고 희떠운 소리를 질렀다.

적장의 고함소리는 우리 여덟 자매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다. 그들은 사나운 격류와 박투하며 계속 강심으로 나아갔다. 물속에 쓰러졌다가는 일어서고 일어섰다가는 다시 쓰러지는 비장한 장면장면이 이어졌다.

적들은 그녀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이윽고 기관총이 울부짖고 박격포탄이 련속 강심에서 작렬하더니 부녀퇀 녀전사들의 모습은 물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우스훈강에 고요가 깃들었다. 버드나무숲과 언덕에는 적들의 시체로 너저분했다. 이윽고 강심을 바라보던 적들은 아연해지고 말았다. 적장 구마가이는 “독한 년들!”이라고 하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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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복 등 제5군과 4군으로 무어진 항일련군 부녀퇀 녀전사들의 빛나는 최후였다. 사랑하는 남편 박덕산은 1938년 여름 의란현 경내 대합탕전투에서 쓰러지고 안순복은 그해 10월 림구현의 우스훈강에서 장렬하고도 비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밀산의 서대림자마을에서 중국인 집에 부탁한 사랑하는 딸애도 일제놈들의 등살에  한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럼 이야기는 여기서 끝일가, 아니, 끝이 아니다.

안순복과 안순복으로 이어진 그의 사촌언니 안순화, 안순화로부터 그의 남편 리봉수를 통해 리경천으로 이어진 이들 세 가족은 보통 가족이 아니였다. 본문에서 안순복의 아버지와 동생이 1933년 1월, 목릉현 신안툰에서 적들에게 피살되였음을 밝히였다면 안순복 부부도 항일의 피어린 싸움터에서 쓰러지고 어린 딸애도 광복의 새 아침을 기다리지 못하였다.

사촌언니 안순화는 부부가 함께 1932년 봄에 훈춘현 연통라자로 전이하였다가 1934년 봄에 새로 개편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훈춘퇀) 제4퇀에 편입되였다. 안순화는 4퇀의 재봉대 대장으로, 남편 리봉수는 4퇀의 군의로 활동하였다. 안순화, 리봉수 소속 4퇀은 1936년 봄에 동북항일련군 제2군 4퇀으로 다시 제5사로 개편되였다.

안순화는 항일련군 2군 5사 재봉대 책임자, 그는 소속부대를 따라 연통라자항일유격근거지를 떠나 왕청현 금창으로 전이하고, 다시 녕안현 경내로 전이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간다. 그러던 1937년 3월, 녕안현 동경성의 한 산속 재봉대밀영에 절대적으로 우세한 적들이 달려들고 안순화는 포위돌파중 다리에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다.

안순화의 남편 리봉수의 사촌형님은 후일 조직의 지시로 동녕현 로흑산에 숨어들어 후일 중공로흑산특별지부 서기로 활동하면서 항일련군의 튼튼한 후방기지 건설에 나섰다. 그후 그는 1941년 8월 항일련군 5군 소속부대를 따른 쏘련행을 앞두고 비밀리에 로흑산에 숨어들었다가 불행히 동녕헌병대 놈들에게 체포되여 목단강 액하감옥으로 압송되였다가 빛나는 삶을 마감하였다. 리경천의 넷째 동생도 항일전쟁에서 희생되였다.

남편 리경천이 희생된 후 그의 안해 주옥순은 로흑산 남촌에서 갖은 어려움을 딛고 다섯 아이를 키우며 1945년 8월의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나 필자는 연길에서 리경천 렬사의 친손녀와 친손자들인 리은화씨와 리근강씨를 만나 리경천 렬사의 빛나는 생의 발자취를 추적하게 되고 항일련군의 녀전사들인 안순화와 안순복에 엉킨, 이들 전주 리씨들과 엉킨 항일의 혈연관계, 친척관계 진실을 비로소 알게 되였다.

  리경천의 후손들을 통해 팔녀투강 영웅 안순복의 가족관계와 친척관계가 새롭게 알려졌다. 동북항일련군 제4군 재봉대 대장 겸 팔녀투강 일원인 안순복, 동녕현을 대표하는 중공로흑산특별지부 서기 리경천에 항일련군 제2군 제5사 재봉대 대장 안순화ㅡ그들은 실로 중국혁명사에, 조선족항일사에서 길이 빛날 항일영웅들이요, 이름난 항일가족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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