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녀투강’ 또 하명의 렬사 리봉선 (1)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99

2020-08-30 10:32:35

흑룡강성 목단강시 림구현 경내 우스훈하 강반에 자리한 8녀투강유적기념관 내 전시된 리봉선 전시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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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강성 목단강시 림구현 경내 우스훈하 강반에는 ‘8녀투강유적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2017년 8월 1일, 8녀투강 중 조선족녀전사 안순복과 리봉선 발자취 추적차 이곳 ‘8녀투강유적기념관’을 찾았더니 당년 항일련군부녀퇀 8녀투강 전시물ㅡ 리봉선 전시부분에는 리봉선의 그림사진과 더불어 소장(少将) 차림의 왕효명(王效明) 사진과 사진설명이 나란히 전시되여 필자의 주의를 끌었다.

‘왕효명을 항일련군 5군부녀퇀 녀전사 리봉선과 나란히 전시할 땐 리봉선의 미혼부란 의미일 것이다.’

물론 항일련군 제7군 정치부 주임, 항일련군 제2로군 2지대 대장을 력임한 왕효명을 리봉선 녀전사와 이어놓은 자료는 림구현 우스훈하 강반의 ‘8녀투강유적기념관’에서 처음 보는 일이 아니였다. 중문인터넷으로 리봉선을 널리 추적하다보면 항일련군 장령 왕효명이 리봉선의 미혼부라는 자료를 가끔 대하게 된다. 그때마다 확인되지 않은 자료여서 지나쳤는데 나라의 공식적인 ‘8녀투강유적기념관’에서 왕효명이 리봉선의 미혼부라는 전시는 정말이지 웃고 지날 일이 아니였다.

그때로부터 필자는 항일련군 부녀퇀 ‘8녀투강’ 중 안순복과 리봉선 녀전사들에 대해 보다 깊은 주의를 돌리고 수차에 걸쳐 끈질긴 추적을 하면서 전에 모르던 적지 않은 부분을 새로 알게 되였다. 항일련군 4군 재봉대 대장 안순복의 남편과 가족관계를 새로이 밝히게 되였다면 항일련군 5군부녀퇀 녀전사 리봉선과 왕효명(王效明)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조명할 수 있게 된 것이 그러하다.

여러 연구자료로부터 보면 항일련군 5군부녀퇀 녀전사 리봉선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5군 참모 왕효명과 련인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5군 군부의 허락 하의 련인관계지만 둘 모두 선후로 이 세상을 떠난 지금에 와서 그 사랑내막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왕효명과 리봉선의 사랑관계는 력사의 진실로 밝혀진다.

지난해 2019년 10월 초 필자는 위해에서 모처럼 찾아 온 류영씨를 만난 적이 있다. 류영(刘颖)씨는 항일련군 제6군 녀전사 리계란의 딸이고 항일련군 연구전문가이고  일찍 상하 두책으로 된 중문 ‘리민회고록’ 80만자를 펴내고 《항일련군 녀병》 등 허다한 책을 펴낸 작가였다. 류영씨가 왕효명의 아들 왕민(王民)한테서 들은데 의하면 미혼처 리봉선이 1938년 10월에 8녀투강 영웅으로 희생된 후 왕효명은 비통한 나머지 다시 다른 녀성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하여 왕효명은 항일련군  5군 군장이고 제2로군 총지휘인 주보중한테 세차례나 지적을 받게 되였다. 그래도 왕효명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왕효명은 1945년 8월 동북이 광복되면서 소속 항일련군부대를 따라 활동지 쏘련 경내를 떠나 조국으로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개인의 혼인문제를 처리하게 되였다. 이는 조선사람 리봉선에 대한 왕효명의 감정이 보통 감정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시관내에 전시된 리봉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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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수집자료와 거듭되는 연구로부터 보면 류영씨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였다. 그러나 2015년 6월 9일의 신화넷(新华网)에 실린 한편의 글ㅡ<동북항일련군 장령 왕효명을 회고하여>란 글에 왕효명의 맏아들 왕민이 나오지만 왕민은 조직에서 아버지에게 녀성을 소개하여 주었고 둘사이 감정도 좋았다면서도 그 상대가 누구인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왕민은 기자한테 아버지는 그 사랑하는 녀인이 희생된 후 “일본침략자를 때려부시지 않고서는 절대 결혼하지 않는다”고 맹세하였고 과연 그 맹세대로 1945년 동북이 해방된 후에야  비로소 결혼하였다고 하였다.

또 한 자료는 역시 2015년 6월 9일의 신화넷으로 제목은 아예 <항일련군장령 왕효명 아들 왕민 방문실록(访谈实录)>으로 나오고 있다. 이 방문실록에서도 왕민은 부대 여러 지도일군들은 아버지에게 항일련군의 여러 녀전사를 소개하였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녀전사는 8녀투강의 한 녀전사였고, 이 녀전사가 희생된 후 너무도 상심한 나머지 다시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고 알리고 있다.

이상한 것은 같은 날 신화넷의 두 편의 기사 모두 왕효명의 맏아들을 취재하면서도 왕효명의 상대가 누구인가를 확실하게 밝히지 않은 것이다. 이로하여 항일련군의 후손 류영과의 이야기나 여러 자료들에서 보여지는 대로 리봉선이 옳으면서도 리봉선이라고 100% 단언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2015년 8월 6일자 흑룡강일보의 한편의 기사가 떠올랐다. 그 기사는 기자가 우춘방을 취재한 기사였는데 1942년 생인 우춘방(于春芳)은 지난 90년대 초부터 선후로 림구현 부현장, 림구현 정협주석을 력임하는 기간 10여년간의 품을 들여 항일련군 부녀퇀의 8녀투강에 대해 깊은 관심과 고증을 보여 주었다.

우춘방은 기자에게 8녀투강 관련 두가지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 두 이야기 중 하나가 리봉선 관련 이야기였다.

2008년 림구현에서 ‘8녀투강 70돐 기념활동’을 벌릴 때 먼곳에서 한 로인이 불원천리하고 우춘방을 찾아왔다. 알고보니 그 로인은 개국소장인 왕효명의 아들 왕민이였다. 이 왕민이 우춘방에게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니 당년 아버지 왕효명은 항일련군 제5군의 참모이고 리봉선 녀전사의 미혼부였다고 찍어 말하였다. 필자가 본, 리봉선의 미혼부가 왕효명이라는 왕효명 맏아들 왕민의 첫 서술이였다.

흑룡강일보 기사에 따르면 왕민은 우춘방에게 아버지의 미혼부 리봉선이 희생된 후 아버지는 비통한 나머지 마음을 굳게 다잡으면서 “일본침략자를 때려부시지 않고서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의하여 나섰음을 들려 주었다. 왕효명은 정말 자기의 결의대로 신의를 지키였고 항일전쟁이 승리한 뒤 1946년에야 마침내 37세의 나이로 결혼하였다고 한다.

림구현 팔녀투강유적기념관 내 리봉선 전시부분의 왕효명 사진과 사진설명. (2017년 8월 1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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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항일련군 장령으로 알려진 왕효명은 비범한 혁명경력을 가진 항일혁명가였다.

왕효명(王效明,1909~1991)은  료녕 창도현 사람으로서 1930년 11월에 장학량이 꾸린 동북륙군강무당을 졸업한 후 할빈에 주둔한 동북군 18려 76퇀 견습군관으로 배치를 받았다. 우리 동북반일련합군(후일 항일련군 제5군) 제5군 부대에 참가한 것은 1935년의 일, 군장 주보중은 왕효명을 유능한 군사인재로 보았고 군부 참모로 등용하였다. 그해 1935년 8월에는 주보중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동북항일련군의 나날 왕효명은 선후로 항일련군 5군 군부참모, 제5군 2사 참모장, 5군 3사 정치부 주임, 제7군 정치부 주임, 7군 참모장과 군특별위원회 상무위원과 서기, 항일련군 교도려 제2영 영장 등을 력임하였다. 우리 항일련군 부대가 그 시절 쏘련 경내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쏘련정부로부터 홍기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1950년에 조선전쟁이 폭발한 후 왕효명은 중앙군위의 결의로 해군해안포병학교를 꾸리게 되였다. 그로부터 그는 해군해안포병학교 제1임 교장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해안포병인재를 키워내고 1955년에 소장 직함(少将军衔)을 받게 되였다. 항일련군 장령으로부터 해방후 중국인민해방군 소장직함에 이르기까지 왕효명의 위인됨을 잘 알 수가 있다. 그런 왕효명, 소속 5군 군부 참모 왕효명을 미혼부로 둔 리봉선은 보다 돋보이기만 한다.

한편 리봉선은 세상이 널리 아는, 항일련군 제4군 재봉대 대장 안순복과 더불어 8녀투강의 또 하나의 영웅인물이다. 유감스럽게도 리봉선 녀전사에 대해서 알려지는 바가 거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그녀에 대해 안다는 것이 고작 리봉선은 조선족이고 1918년 생이며 흑룡강성 림구현 룡조향 사람이고 항일련군 제5군부녀퇀의 녀전사라는 두어줄 자료가 전부이다.

하긴 이 두어줄 자료ㅡ 리봉선은 조선족이다, 1918년 생이다, 림구현 룡조향(龙爪乡)사람이다, 항일련군 5군부녀퇀 녀전사이다 등을 소홀히 보지 말아야 했다. 이 두어줄 자료는 더없이 소중한 자료로서 이 자료는 리봉선 항일렬사의 발자취를 추적할 기회와 공간을 알리고 있었다.

리봉선의 출신지로 알려지는 룡조향은 림구현의 중부, 현성의 서남 12킬로메터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룡조향의 지명 래원은 룡조촌이라는 마을이름에서 나왔으니 룡조촌 마을형성은 1918년 이전으로 거스른다. 마을이 생겨날 때 마을은 심산밀림 속에 위치하고 있어 호랑이며 메돼지와 같은 산짐승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고장이였다. 더우기 야생사슴들이 많아 사람들은 마을이름을 사슴의 록용(鹿茸) 용자를 따서 용각구(茸角沟)로 불렀다. 1931년에 소리 음에 따라 룡조(龙爪)촌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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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조촌을 보면 중화민국 초년에 의란현(依兰县)에 소속되였다가 1917년에 벌리현(勃利县)에 귀속되고, 1939년 6월에는 림구현(林口县)에 귀속되는 과정을 거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뒤인 1947년에 룡조촌은 림구현 제5구에 소속됐다가 1956년에 구를 취소하고 향을 설치하면서 룡조향으로 되였다. 1958년에 룡조인민공사로 개칭되였다가 1984년에 이르러 다시 룡조향으로 회복되기도 하였다. 이같은 지명의 연변과정을 보면 리봉선을 림구현 룡조향 사람이라고 하면 원칙 상 틀린다고 볼 수는 없지만 바르게 된 지명부름으로 되지 못한다. 룡조향이 설립된 것이 해방 후 1956년의 일이고, 리봉선이 활동하고 희생되던 1938년 그 시절에는 림구현이 아닌 벌리현 귀속이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리봉선의 고향이 그제날 벌리현 룡조촌이라고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 룡조촌에서 태여났다는 자료가 아직까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하든 리봉선이1919년에 태여나 룡조촌에서 생활하였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리봉선 연구에서 룡조촌이란 지명에 이어 문제로 나서는 것은 리봉선이 어느 때 어떻게 항일련군 제5군부녀퇀에 가입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5군 부대와 5군부녀퇀을 연구하지 않으면 리봉선의 5군부녀퇀 가입을 알 수가 없으며 리봉선의 발자취를 추적할 수도 없다.

동북항일련군 제5군은 수녕(绥宁)반일동맹군,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 동북항일련군 제5군이란 3개의 발전변화 시기를 거치게 된다. 첫번째 시기인 수녕반일동맹군 구성은 1934년 2월의 일이고, 그해 12월에 녕안반일유격대 등과 함께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으로 개편됐다. 주요활동지는 녕안현 경내였다.

1935년 4월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은 동부파견대, 서부파견대, 녕안류수부대 등 세갈래로 나뉘여져 새유격구 개척에 나섰다. 동부파견대는 동부의 목릉현 쪽으로, 서부파견대는 액목현 쪽으로, 류수부대는 녕안현 각지에서 맹렬한 활동을 벌렸다. 하지만 그 시절의 반일련합군 5군은 녕안과 북으로 150킬로메터 떨어진 림구현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 시절의 5군부대에는 림구현의 리봉선이 가입할 여건이 주어지지 않았다.

1936년 2월, 주보중 장군이 지도하는 동북반일련합군은 동북항일련군 제5군으로 재편성되면서 그 주력부대가 중동철도 북부(中东铁路道北)로 전이하게 되였다. 1936년 9월 24일 녕안 천안두(泉眼头)에서의 2군-5군간부회의후 항일련군 5군군부는 북부지대의 림구현에 전이하여 군부림시판사처를 조직하였다. 따라서 5군군부와 1사부대는 림구현의 조령(刁翎)을 중심으로 하는 목단강 하류지구에서 정치, 군사활동을 벌렸다.

  1937년 2월과 3월 사이에 이르러 항일련군 제5군은 중동선 이남의 류수부대를 제외한 외 1사와 2사, 군부 직속부대 모두가 림구현의 조령을 근거지로 하는 목단강 하류지구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리봉선 소속 5군부녀퇀은 1936년 봄 녕안에서 동만 즉 연변의 훈춘현과 왕청현에서 넘어간 조선족녀전사들로 조직된 부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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