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녀투강’의 또 한명의 렬사 리봉선 (3)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101

2020-09-14 10:13:14

림구현 경내 팔녀투강유적기념관 내에 모셔진 ‘팔녀투강’ 반신상. 가운데 리봉선 반신상도 보인다. (2017년 8월 1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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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가을에 적들의 가을대토벌이 시작되였다. 향수하자(响水河子), 쟈피거우(夹皮沟) 등지에 설치된 5군의 후방기지ㅡ밀영과 병원, 재봉대 등은 엄중한 파괴를 당하였다. 리봉선 소속 부녀퇀은 9월에 5군 군부를 따라 목단강 좌안(左岸)의 사도하자(四道河子) 후방밀영으로 전이하였다. 9월 29일, 이곳 사도하자 후방밀영에서 중공길동성위 상무위원회 사업회의가 열리고 항일련군 제4군과 5군, 7군, 8군, 10군을 망라한 제2로군을 결성하기로 결의하고 제2로군 총지휘로 주보중 5군 군장을 추대하였다. 회의기간에 리봉선과 그의 소속 부녀퇀은 성위 사업회의의 작식과 근무를 리행하면서 회의의 순리로운 진행에 최선을 다하였다.

9월의 성위 회의 이후 5군 부녀퇀 퇀장 왕옥환과 진옥화(陈玉华), 최순선, 주신옥, 류영 등은 장진화(张镇华) 사장의 기병사를 따라 보청(宝清)일대로의 원정길에 나서고 나머지 녀전사들은 5군의 여러 부대에 귀속되여 활동하게 되였다.

1937년 겨울과 1938년 봄에 이르러 삼강성(三江省,지금의 흑룡강성 합강지구)일대에 대한 일본침략자들의 대토벌은 보다 심해졌다. 적들의 발광적인 군사토벌과 경제봉쇄를 짓부시며 하동(哈东)지구와 남만 항일련군 부대와의 련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중공길동성위와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부에서는 제4군과 제5군의 주력부대는 근거지를 떠나 오상, 서란 일대로 전이하기로 결정하였다. 항일련군 제2로군 서정군은 5군 1사를 선견대로 하고 4군 1사와 5군 2사를 한갈래, 4군 2사와 5군 교도퇀을 한갈래로 하여 3개 부대로 편성되였다. 주보중 등과 5군 3사, 7군, 8군, 9군, 10군은 남아서 투쟁을 견지하기로 하였다.

1938년 4월, 세갈래 서정군은 보청에 집결하였다가 5월에 보청(宝清)에서 출발하였다. 리봉선 등 5군 부녀퇀의 한갈래가 서정부대와 함께 머나먼 원정길에 올랐다. 그들은 남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심산밀림을 헤치였다. 서정길은 그야말로 기아와의 싸움, 대자연과의 싸움, 적들과의 싸움이였으나 녀전사들은 조금치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리봉선은 녀전사들과 더불어 서로 의지하고 받들며 걸음마다 사선을 헤치며 나아갔다.

그 시절 오늘의 림구현 삼도통진(三道通镇) 사도하자골(四道河子沟)과 오도하자골(五道河子沟)엔 항일련군의 여러 밀영들이 설치되여있었다. 그중 앞에서 잠간 스친 사도하자밀영은 중공길동성위와 항일련군 제2로군 총부의 활동지기도 하여 이 밀영은 5군 부녀퇀의 대대지도원 랭운과 조선족녀전사 리봉선 등 30여명 녀전사들 숙박지기도 하였다.

팔녀투강기념관에 전시된 ‘팔녀투강’ 사진과 소개. (2017년 8월 2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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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서정부대 책임자 송일부(宋一夫)는 서정지휘부 회의를 가지고 주보중의 서정계획을 개변하면서 4군과 5군이 함께 서란(舒兰)으로 진출하기로 하였다. 다음날 관서범(关书范)은 5군 1사 150여명 선견대를 이끌어 출발하고 5군 군장 채세영(柴世荣)은 송일부 등과 함께 삼도통을 습격하고 12일 아침 주하현(珠河县, 오늘의 상지시) 루산진(楼山镇) 전투를 벌리였다.

우리 항일련군 서정부대가 루산진 부근에 이르렀을 때 지닌 식량과 탄약 등이 동강나 말이 아니였다. 그런 현실에서 서정부대는 루산진전투를 벌리고 승리하였지만 서정부대의 루산진에서의 행동은 이미 적들에게 드러나 비행기가 폭격하고 지면부대가 사처에서 달려드는 데서 거의 매일이다싶이 격전이 벌어지며 부대의 손실은 참중하였다.

주하현 루산진전투 후 나머지 항일련군 서정부대 속 제4군과 제5군은 두갈래 나뉘여지고 제4군의 안순복 등 녀전사들은 5군의 부녀퇀에 소속되여 5군 1사를 따라 행동하게 되였다.1938년 8월말에 서정부대는 할빈 이서(以西)의 오상현 경내에 들어섰다. 부녀퇀 소속 5군 1사는 5군 2사와의 련계를 잃은 데서 관수범은 적들의 포위를 헤치면서 1사의 나머지 100여명 대오를 동으로 조령근거지 방향으로 돌리였다. 5군 군부를 찾아 다시 적들과 싸우기 위한 대책이였다.

이때 부녀퇀의 녀전사는 랭운(冷云), 안순복(安顺福), 리봉선(李凤善),호수지(胡秀芝), 양귀진(杨贵珍), 곽계금(郭桂琴), 황계청(黄桂清), 왕혜민(王惠民)등 8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은 5군 1사를 따라 풍찬로숙하면서 해림의 불탑밀북창자(佛塔密北淌子)에서 투도하자(头道河子)강을 넘어섰다.

반라자(半砬子)에서는 삼림경찰대의 배 세척을 탈취하여 가지고 도도히 흐르는 목단강을 건너고 망천령(望天岭)을 넘어 오늘의 림구현 경내 동류수하자(东柳树河子) 북골에 들어섰다. 한총하(寒葱河)와 몇개 산령을 넘으니 이미 10월 초순이다. 다시 소과회산(小锅盔山)에서 조령의 삼가자(三家子)촌을 에돌아 줘무강(柞木岗) 동쪽의 습지(草甸子)를 지나며 우스훈하(乌斯浑河) 하류의 서안(西岸) 줘무강(柞木岗) 산 아래 우스훈하가 굽이를 타는 곳에 이르러 숙영하였다. 바로 오늘의 림구현 경내 조령진 줘무강 산아래 우스훈하 서안이다.

5사 1사의 지도자는 사장 관수범과 참모장 김석봉이였다. 김석봉은 1887년생이고 쏘련의 동방대학에서 공부를 한 지식인으로서 1929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로련한 혁명가로 알려진다. 1936년 9월 5군 군부 류수처 부주임이고 중공도남특위 위원이기도 한 김석봉은 실상 항일련군과 당내에서의 직무가 더욱 높아 항일련군 제2로군 비서장과 중공길동성위 비서처 주임으로도 나타난다.

팔녀투강기념관에 전시된 ‘팔녀투강’ 동상. (2017년 8월 2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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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5월 제4군과 5군으로 무어진 제2로군의 서정에 참가한 후 김석봉은 서정부대의 주요책임자의 한사람으로 군부직속 부녀퇀을 친히 이끌었다. 한데서 김석봉은 부녀퇀의 녀전사들, 더우기 안순복, 리봉선 등 조선족녀전사들과의 관계가 스스럼없이 좋았다.

우스훈하 서안에 이른 후에도 그러하다. 김석봉은 사장 관수범과 토의하고 나머지 5군 1사 부대를 이끌어 우스훈하를 건너 의란현 토성자일대의 목단강 류역에 가서 주보중이 이끄는 제2로군 총부와 5군 련락처를 찾으려 하였다. 부대는 련일 이어지는 간고한 행군으로 지칠대로 지치며 굶주림에 시달린 데서 밤을 우스훈하가에서 숙영하고 날이 밝으면 강을 건너기로 하였다.

그런데 춥다고 피워놓은 몇무더기 우등불이 마침 주변을 지나던 원 항일련군 9군 부관이고 반역자인 갈해록(葛海禄)에게 발견되여 일이 험악하게 번져갔다. 갈해록의 고발로 조령 일본군사령관 구마가이 대좌(熊谷大佐)는 밤도와 일본군과 위만군 1000여명을 출동시켜 5군 1사의 숙영지를 삼면으로 포위하고 들었다.

새날이 밝아오자 1사의 조선족 참모장 김석봉은 부녀퇀의 리봉선 등 8명 녀전사들을 데리고 먼저 강을 건너게 되였다. 그러나 비가 많이 내리며 강물이 불어 강물의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 김석봉은 녀전사들의 안전이 걱정되여 선참 강물에 뛰여들어 대안으로 나아갔다.

그때다. 난데없는 총소리와 함께 적들의 공격이 시작되였다. 랭운과 안순복은 뒤늦게야 부대가 적들에게 포위된 것을 알고 녀전사들과 함께 적의 배후를 답새기기 시작하였다. 적들을 자기들한테로 끌기 위한 선제사격이였다. 적들은 과연 아군의 매복에 든 줄로 여기고 일부 병력을 급급히 녀전사들 쪽으로 돌려 대였다. 그사이 100여명 대오는 신속하게 떡갈나무골로 전이하였다.

그러나 부녀퇀의 녀전사들만 강변속에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적들이 우리 녀전사들을 알아보고 빨리 투항하라고 고함지를 때 부대는 수차 돌아서서 녀전사들을 구출하려 했지만 적들의 포위권돌파는 전혀 불가능하였다. 리봉선 등은 적들과 결사적으로 싸우다가 탄알이 떨어지자 모두가 우스훈하에 뛰여들었다. 그녀들이 사품치는 강물과 사투를 벌리며 강심으로 나아가자 적들은 투항하라고 소리치다말고 급기야 기관총사격을 들이대며 박격포탄을 쏘아댔다. 그녀들은 우스훈하 강물 속에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지 못하였다.

우스훈하는 목단강시 림구현 조령진 경내를 흐르는 목단강의 한 지류로서 만족어로 ‘사품치는 강(汹涌的河流)’이란 뜻을 가지였다. 이미 강대안으로 건너간 김석봉은 녀전사들이 적들과 싸우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리봉선 등 8명 녀전사들은 김석봉을 따라 강을 건넜더라면 모두가 살 수 있었으나 그게 아니였다. 그들은 적들의 주의력을 자기에게로 끌며 싸우다가 모두 장렬히 희생되였다. 김석봉은 8녀투강의 전과정을 목격한 유일한 견증자였다.

그날의 적장 구마가이는 투항하라는 고함소리에도 굴함없이 싸우다가 강심에 들어서는 8명 녀전사들을 보고 “독한 년들” 하고 머리를 절레절레 젓더니 그 후에도 “중국의 녀인들까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중국을 멸망시킬 수 없다… (中国的女人死的都不怕,中国的灭亡不了…) ”고 길게 탄식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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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항일련군 5군 부녀퇀 녀전사 리봉선을 비롯한 ‘팔녀투강’의 전후 관계를 헤아려보았다. ‘팔녀투강’의 이런 생생한 력사사실은 할빈의 동북렬사기념관과 림구현 관련 연구일군들 오랜 연구활동 가운데서 밝혀진 사실로서 해방 후 오랜 기간 동안 ‘팔녀투강’ 사건의 발생시간이며 전투지점이며 8명 녀전사들 옳바른 이름조차도 잘 몰랐다.

1957년에 길림대학을 졸업한 온야(温野)라는 대학생이 할빈 동북렬사기념관에 배치를 받았다. 1962년에 온야의 신청으로 ‘팔녀투강’ 력사조사가 동북렬사기념관의 주요연구과제로 떠올랐다. 그에 따라 온야는 병환에 있던 주보중 장군과 5군 부녀퇀 녀전사인 서운경(徐云卿) 등 로동지들을 방문하면서 주요단서와 더불어 많은 이야기들을 듣게 되였다. 그럼에도 그이들은 ‘팔녀투강’ 전투에 직접 참가했거나 목격한 사람들이 아니였다.

하지만 온야는 주보중 장군한테서 ‘팔녀투강’중에는 성이 안씨라는 조선족 녀전사가 있다는 사실을, 서운경한테서는 5군부대에서 수장들 경위원을 맡은 적 있다는 김수산씨를 새로 알게 되였다. 온야가 길림시에 가서 조선족 김수산씨를 찾으니 그는 ‘팔녀투강’은 들은 사실일뿐 잘 모른다면서 자기 아버지 김상걸(金尚杰)을 만나라고 하였다. 이분 김상걸이 바로 중공길동성위 비서처 주임이고 당년 5군 1사 참모장인 김석봉이였다.

온야가 길림시 교외에 가서 김수산의 아버지 김상걸, 즉 김석봉을 찾으니 김석봉은 보통 농민으로, 이름을 김상걸로 바꾸고 살아가는 70여세 로인이였다. 온야는 김석봉 로인에게서 ‘팔녀투강’의 정확한 전투지점과 시간이 1938년 음력 8월말 혹은 9월초라는 것을 처음 듣게 되였다. 따라서 ‘팔녀투강’의 진실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졌다.

후에 항일련군 4군 재봉대 대장 안순복 전기가 조선문으로 정리된 것도, 필자가 최근년간 리봉선전기를 정리할 수 있은 것도 모두 김석봉 로인이 팔녀투강의 전후 관계와 림구현 우스훈하 전투현지를 자상히 밝혔기에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면 팔녀투강의 관련 인물과 현지목격자를 오랜기간 찾을 수 없었기에 팔녀투강의 진실한 이야기를 펼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중공길동성위 비서처 주임이고 5군 1사 참모장였던 김석봉은 1938년 10월 하순의 어느 날, 우스훈하 강물의 깊이와 물길을 알려고 먼저 강을 건너게 되였고 어찌할 수 없는 처지에서 ‘팔녀투강’의 전과정을 목격하게 된 력사의 견증자였다. 그후 김석봉은 소속부대를 찾아 중공길동성위 비서처 주임 등으로 계속 활동하다가 어찌하여 길림시 변두리 농촌으로 돌아가 농민으로 살아가게 되였다.

  농촌으로 돌아간 후 김석봉은 이름을 김상걸(金尚杰)로 변성명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1962년에는 당적을 회복하고 1970년에 병사하였다고 한다. 김석봉은 생전에 동북렬사기념관 온야 등에게 ‘팔녀투강’의 진실한 목격과정을 여실히 알리였고, 팔녀투강의 진실한 전투위치를 확인하여주었다. 그 확인으로 하여 관련 부문은 1982년에 림구현 조령진 줘무강 산아래, 우스훈하 서안을 팔녀투강 순난지로 정식 확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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