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ㅡ항일련군의 녀전사로 성장(2)

2020-09-27 09: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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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1932년 봄에 5촌 삼촌 김일환은 달라자 금곡출신인 현위비서 리계순과 뜻이 맞아 새 가정을 이루었다. 집안에 새사람이 들어서니 한결 환해지는 것만 같았다. 김선 소녀는 숙모를 졸졸 따라다니며 살갑게 굴었다. 이젠 집안 가마목일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였다.

1933년 봄은 어랑촌근거지에 희사도 많았다. 이해 봄에 화룡현반일회가 설립식을 가졌는데 당단조직 밖의 사람들은 모두가 반일회에 가입할 수 있었다. 설립대회장에는 어랑촌 주민 50~60호 전부와 외지 망명자들, 유격대원들, 구국군 일부, 적위대원들, 부녀회원들, 아동단원 모두가 참가하여 수백명 대오를 이루었다. 집합대오가 질서정연히 네줄로 선 가운데 적위대원들은 토총을 메고 김선 등 아동단원들은 붉은 술 달린 창을 메니 그 위용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어 아동절을 경축한다며 굉장한 모임이 열리였다. 근거지의 군민들이 참가하고 구국군 손장상 대대장도 일부 대오를 거느리고 참가하였다. 무대도 꾸미였다. 김선 소녀는 근거지 아동단원들과 더불어 일매지게 붉은 넥타이를 매고 붉은 술 달린 창을 들고 나섰다. 이날의 아동모임을 위해 여러 비행선전대들이 근거지 밖 적통치구역으로 드나들더니 어랑촌근거지 남쪽의 산너머 쟈피거우와 고사리평 일대에서 소년아동들과 아동들 가족 수십명이 대회에 참가하여 성세를 이루었다. <어린이 노래>, <소년행진곡> 등 노래소리가 하늘땅을 진감하였다.

근거지에서의 두차례 굉장한 모임 이후 김선 소녀는 아동단원이자 소년적위대원으로도 활동하였다. 하루는 김선이 어랑촌근거지에서 화룡현수류탄이 나온다는 말을 들으니 자못 궁굼하기만 하다. 마침 근거지 병기공장 책임자 박영순을 만났다.

“아저씨, 화룡현수류탄을 어떻게 만들어요?”

“너의 삼촌 현당위 김일환 서기가 지시해서 만든단다.”

그러면서 화룡현수류탄을 만드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또 일환 삼촌이 지시해서 다섯발배기 5련발을 개작하여 열발배기 보총으로 만든다면서 흥을 돋구어주었다. 그 후 김선 소녀는 소년적위대원들과 함께 과연 화룡현수류탄을 척 차고 근거지 보초에 나서니 신나기만 했다.

1933년 가을, 일제놈들과 위만군 련합‘토벌’대 수백명이 어랑촌근거지에  살기등등하게 덮쳐들었다. 삼촌 김일환이 현위 제2임 군사부장 김락영과 토의하고 사전에 어랑촌바닥을 비우고 모든 혁명군중들과 당정군의 간부들을 산속의 샘물골과 버섯골로 전이시켰으니 말이지 큰일 날 번하였다. 적들은 근거지 여기저기에서 얻어맞기만 하다가 물러섰다. 그런데 그 시절 동만특위로부터 현과 구의 당정간부들을 로농출신의 간부들로 바꾼다고 하더니 삼촌 김일환을 현위서기의 직무에서 떨구어버렸다. 이름 좋게 처창즈일대 구국군사업대로 파견한다고 했다. 김선 소녀는 할머니랑 삼촌이랑 숙모랑 더불어 이번에는 미개척지인 처창즈로 들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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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속의 처창즈는 오늘의 화룡현 서성진 화안촌일대를 가리키지만 그 시절 처창즈는 안도현 처창즈라고 불리였다. 처창즈로 간 후 삼촌 김일환은 리씨로 변성명하고 처창즈 동쪽골에 있는 중국인 지주집의 일군으로 들어갔다. 무명바지저고리에 검은 조끼를 입고 머리에 수건까지 질끈 동이니 제법 농군이 진배없다. 할머니 오옥경은 통신공작에 나서고 숙모 계순이는 부녀공작에, 손녀 김선은 아동공작에 나서니 온 가족이 기계의 치륜처럼 척척 물려 돌아갔다.

삼촌이 남먼저 처창즈로 진출한 박덕산(김일)과 리억만과 지하당지부를 구성하고 구국군쟁취 사업을 드세게 내미니 처창즈 주변 구국군들은 유격대와 함께 항일하겠다고 힘을 냈다. 열이 난 것은 일제놈들과 그의 앞잡이들. 놈들은 1934년 봄에 안도에서 일본놈 앞잡이질하는 리도선토벌대를 처창즈로 내몰았다. 처창즈 주변의 구국군공산화를 막는다면서 구국군무장을 해제하기 위한 짓거리였다.

리도선토벌대는 처창즈를 샅샅이 뒤지다가 김선 소녀의 일가를 붙잡고 다짜고짜로 공산당이라고 몰아세웠다. 놈들이 김일환한테 손을 대니 김선은 약수동 시절처럼 바보차림을 하고 왜 우리 아버지를 때리는가고 덤벼들었다. 놈들의 시선이 김선에게 쏠리였다. 놈들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가봐 오옥경 할머니는 애는 워낙 바보인데 용서해달라고 비는 척하였다.

이때라고 리도선은 성이 뭔가고 물어왔다. 이미 리씨로 통하고 있던 터라 리씨라고 시미치를 뗐다. 물어보는 본도 되는 대로 돌려댔더니 신통이도 리도선의 본과 같았다. 리도선의 얼굴에서는 금시 살기가 사라지며 태도가 누그러들었다.

“우리 동성동본엔 공산당이 하나도 없어.”

리도선은 한발 물러서면서도 뭔가 지푸래기라도 잡으려 했다. 오옥경은 인차 말을 돌리며 틈을 주지 않았다.

“조카, 동성동본은 본래 한집안인데 우리가 어떻게 공산당이 될 수 있소, 공산당이 뭔지도 모르오, 정 못 믿겠으면 우리 집주인과 물어보오.”

집주인이란 지주집 어른을 말한다. 집주인이 이 사람의 아들이 알짜 농사군이라고 증명하여 나섰다. 리도선은 그래도 미덥지가 않아 김일환의 손을 보더니 농군의 손이 옳긴 옳다고 머리를 끄떡거렸다.

오옥경 할머니와 김선 소녀의 지혜로운 림기응변은 무시무시한 사태를 돌려세웠다. 리도선 토벌대는 구국군부대와 3일간이나 싸움을 벌리다가 패주하고 말았다. 김선일가의 헌신적인 항일선전과 받들림이 구국군부대의 큰힘이 되였으니 한맘으로 뭉친 구국군의 힘은 무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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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봄에 이르러 연길, 화룡, 왕청, 훈춘 4개 현의 유격대는 모두 유격대대로 개편되여 활동하다가 다시 차례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 제2퇀, 제3퇀, 제4퇀으로 개편되였다. 이어 퇀마다 1개련 무력을 내세워 독립퇀을 무으니 처창즈와 그 일대의 지주무장과 지방무장들은 말끔히 가시여졌다. 1934년 가을에 화룡현 어랑촌항일근거지의 당정기관과 혁명군중들이 새로 개척된 처창즈항일근거지로 전이하여 왔다. 그해 겨울에 이르러 신선동에 집결하였던 연길현 여러 근거지의 유격대와 혁명군중들도 륙속 들어섰다.

헌데 누가 바라기라도 했을가, 연변의 여러 항일근거지들은 물론 1933년 봄과 가을에 걸쳐 어랑촌근거지에서 열풍처럼 번져지던 반‘민생단’ 투쟁은 새로 개척된 처창즈근거지에서도 험악하게 번져갔다. 연변 당내 ‘좌’적 사조에 물든 사람들은 어랑촌근거지를 철옹성으로 꾸려가던 중공화룡현위 제5임 서기 김일환을 해임시키고도 모자라 이번에는 처창즈개척의 선두 공훈자인 김일환을  ‘민생단’이라며 잡아가두었다. 1934년 음력 11월에는 이른바 군중재판대회를 열었다가 총을 멘 구국군부대가 들고 일어나니 암암리에 살해하는 극단조치를 취하였다.

김선 소녀와 그들 일가 모두를 혁명에로 내세운 5촌 삼촌이고, 중공화룡현위 제5임 서기이고 견실한 공산주의자였던 김일환의 비극적인 최후였다. ‘민생단’의 어머니 오옥경도 ‘민생단’이라며 끌려갔다.

임신중인 숙모 리계순과 김선 소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캄캄해났다. 이듬해 1935년 3월, 숙모가 몸을 푸니 더욱 그러했다. 먹을 것도 없이 살아갈 일이 아득했다. 몸을 풀어 한달 만에 시어머니, 즉 김선 소녀의 작은 할머니가 ‘민생단’에서 풀리여 다행이라지만 먹을 것이 없어 문제였다. 별 수 없이 김선 소녀는 밖에서 먹다버린 소뼈나 말뼈를 주어다 깨끗이 씻었다. 또 소똥마다 뒤져서는 소똥 속에 간혹 보이는 옥수수알이나 콩알들을 씻고 또 씻어서는 소뼈와 말뼈들에 같이 넣어서 몇번이고 우려 산모를 대접하였다. 산모로 말하면 최고의 생활개선이였다.

1935년 봄파종 때의 일이다. 적위대원인 김선은 할머니와 숙모를 떠나 집단살림을 하면서 밭에 옥수수종자와 감자씨를 심게 되였다. 김선이 밭이랑을 타고 나가면서 옥수수알을 떨구면 김선보다 조금 이상인 남자대원이 뒤따르면서 묻어주었다. 썩거나 잘못된 옥수수알이 보이면 김선은 골라서 던지군 하였다. 그때 성이 박씨인 대원이 김선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던질 바엔 먹는 것이 낫다고 귀띔을 주었다. 옳은 말이여서 배고픈 김에 썩은 옥수수알 몇알을 먹었더니 박씨대원이 김선이를 고자질하는 것이였다.

이튿날 김선은 가차없이 처창즈인민정부에 체포되여 3일 동안이나 묶여지내야 했다. 종자로 쓰일 옥수수알을 먹었으니 ‘민생단’이란다. 아니라고 변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변명할수록 악질적인 민생단이라 몰아세웠다. 현위 서기 삼촌이 ‘민생단’ 혐의로 피살되고 할머니도 따라서 ‘민생단’이라고 몇달 고생하더니 나어린 소녀도 ‘민생단’으로 밀어붙였다. 생각할수록 억울하여 눈물을 왈칵 쏟았지만 ‘종자파괴분자’란 민생단 혐의는 벗겨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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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정부에서는 두번이나 고된 심문을 들이대다가 15살밖에 안된 소녀를 새로 개편된 동북인민혁명군 화룡2퇀 사무실로 끌고갔다. 화룡2퇀의 한 책임자는 어린 소녀가 뭘 안다고 민생단분자인가며 혀를 끌끌 차더니 두말없이 소녀의 묶인 손을 풀어주었다. 그러면서 이 며칠간 얼마나 고생했는가며 좁쌀죽 한사발을 가져왔다. 덕분에 김선은 오랜만에 쌀죽을 먹어보고 한주일 만에 ‘민생단’ 혐의에서 풀리여 할머니한테로 돌아갔다.

집문을 열고 들어서니 할머니와 숙모는 김선의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숙모 계순은 너무도 기가 막힌 일이라며 밭머리에 나가 통곡하였다. 할머니와 김선이도 따라나가서 셋은 다시 붙안고 통곡하니 눈물이 바다를 이루었다. 혁명하겠다고, 일본놈들을 몰아내겠다고 산구에 모인 사람들을 ‘민생단’이라니 하늘이 무심해도 이다지도 무심할 수가 없다.

기막힌 현실 속에서도 시간은 흘러 무더운 여름이 왔다. 처창즈근거지의 식량사정은 절정에 달하여 매일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칠 줄 몰랐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죽어나갔지만 시체를 처리할 힘도 모자랐다. 가까이 내다 버리니 어느덧 백골더미가 ‘산’을 이루어 백골산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그래도 산사람은 살아야 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소나무껍질을 벗겨 속껍질을 우려서 먹으니 너무 삶으면 쓰겁고 뒤를 보기 힘들어 말이 아니였다. 그나마 가까운 소나무들은 전부가 껍질을 벗겨내여 먼 데로 가야 하는데 걸어갈 힘마저 없었다. 허약한 숙모 계순이는 젖이 나올리가 만무하고 헌 두루마기에 싸인 갓난애는 배가 고파서 울기만 했다. 그러다가도 맥이 진하여 울지도 못하니 가슴이 미여지는 것만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1935년 7월부터 적들의 대토벌이 시작된다. 화룡현과 연길현에서 모여든 혁명군중들을 두고 해산문제가 제기된 것은 그때부터의 일이다. 이해 음력 10월 수백에 달하는 일제와 위만군 놈들이 처창즈로 대거 밀려들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독립사 연길1퇀과 화룡2퇀은 주동적으로 철거하여 유격전을 벌리고 혁명군중 대부분을 조직의 지시로 무조건 산에서 내려가야 하였다. 진짜 군중해산이 선포되던 시각 사람들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하산이냐, 산속 생활이냐. 김선의 할머니 오옥경은 죽어도 산을 내릴 수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일가 녀인 셋은 태여나 돌도 되지 않은 정자를 번갈아 안으며 더 깊은 동남차골짜기로 들어갔다. 혁명을 강단한 이들은 이들 녀인일가 뿐이 아니였다.

  처창즈의 근거지 골골마다에는 숨어든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니 동남차골짜기에만도 김일네 집안, 남창수네 삼형제 집안, 권일수네 집안까지 네가족 16명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단합살림을 꾸리는 한편 산속 여기저기 흩어진 사람들을 찾으며 자기들 반일자위대를 조직하였다. 김선과 그의 숙모 리계순은 반일자위대 녀대원으로 뛰였다. 오옥경 할머니는 그들의 드팀없는 뒤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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