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 항일련군의 녀전사로 성장 (3)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104

2020-10-09 15:00:56

1980년 3월, 그 시절 중공연변주당위 서기 조남기(우1)와 항일련군 전사들인 김선(우2), 교수귀(우3), 왕일지(王一知, 우4), 왕명(王明, 좌1) 합영. (김선 가족 제공)

9

남자가 없는 집안의 설음은 그 집안 녀인들만 안다고, 남자의 손포가 그리울 때면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하늘이 돕는 건지, 그럴 때마다 단합살림의 남창수가 나타나서 일손을 도와주며 살뜰히 굴었다. 눈치는 불보 듯 뻔했다. 리계순도 마음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 마음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어느날 남창수가 또 찾아왔다. 김선은 일부러 구실을 달아 자리를 피하며 능청을 떨었다.

“숙모는 마음이 동하면서도 아닌 보살하네.”

할머니는 어린 것이 버릇이 없다고 때리는 척 하다가 입을 열었다.

“며늘애기, 며느리 마음을 내가 다 알지. 남창수가 좋으니 나의 눈치를 보지 말고 어서 마주 서게나!”

숙모는 드디여 남창수와 부부를 이루었다. 꼭 두번째 남편 김일환이 희생되여 1년 남짓한 뒤의 일이였다. 남창수도 화룡현유격대 녀전사인 첫번째 안해 김정옥이 1934년 5월에 희생되고 두번째로 맞이한 안해다. 둘다 혁명가였고 봉건통이 아니였다. 혁명가도 피와 살로 되고 감정을 가진 인간이였다.

김선 일가는 처창즈 동남차골짜기에서 1936년 음력설을 맞이하였다. 김선 소속 처창즈반일자위대는 백두밀림으로 이어진 심산속에서 투쟁을 견지하다가 갓 동북항일련군으로 개편된 제2군 제3사 8퇀을 찾고있는 김명주를 만났다. 3사 부대라면 화룡퇀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독립사 제2퇀으로 개편되여 백두밀림의 안도현 내두산 방향으로 떠나간 친인들이 아닌가, 그 반가움은 이를데 없다. 처창즈근거지를 마지막까지 지켜섰던 반일자위대원들이여서 반가움은 눈물로 번졌다.

이날 처창즈반일자위대는 연길감옥을 탈옥하였다 하여 ‘연길감옥’으로 불리우는 김명주한테서 3사 8퇀이 안도현 경내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또 김명주의 도움으로 8퇀과 련계가 닿았다. 나이가 지숙한 중국인 8퇀 퇀장 전영림은 반일자위대의 헌신적 항일열성에 감동된 나머지 그들 모두를 조건부 없이 8퇀의 특수반으로 받아들이였다. 장백의 심산 속에 겨울이 아직도 발버둥질치는 1936년 3월경의 일이였다.

전영림은 워낙 처창즈일대에서 구국군으로 자칭한 한갈래 무대였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독립사에서는 전영림부대를 쟁취하기로 결정하면서 연길현 팔도구 출신이고 사부 정치간부인 김산호를 전영림부대에 파견하였다. 김산호의 근질긴 노력으로 전영림은 우리 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1935년 5월 제2군 군부가 정식으로 조직될 때 처창즈일대에서 제2군 직속유격대대로 편성되였다. 전영림은 대대장, 김산호는 대대 정위. 그러던 직속유격대대가 1936년 3월, 2군 소속부대들이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재편성될 때 2군의 제3사 8퇀으로 확건되는 과정을 거치였다.

1983년 8월, 할빈에서 열린 동3성 부녀운동사협력회의에 참가한 조선족녀전사들. 김백문(좌1), 김선(가운데), 리재덕(우1). (김선 가족 제공)

10

처창즈반일자위대가 3사 8퇀에 소속되자 이들 특수반에는 젖먹이 정자도 있는가 하면 어른인 오옥경 어머니도 있었다. 어느날 김선 소속 특수반은 부대와 더불어 산속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한 적의 ‘토벌’대와 맞띄워 으슥한 자리에 은페하게 되였다. 이때 첫돌이 갓 지난 아기 정자가 배고프다고 울기 시작했다. 뜻밖의 울음소리는 부대 전체를 적들에게 드러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생사가 갈리는 위험한 시각이였다.  김선의 숙모 계순이는 무엇을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결연히 저고리솜을 뜯어 아기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기는 낯색이 파랗게 질려갔다. 다행히 시어머니 오옥경이 내 아들 김일환의 피붙이는 이것 뿐이라며 입의 솜을 빼고 아이를 안은채 천방지축 산속으로 깊이 들어간 덕분에 아기도 살려내고 부대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였다. 더는 부대에 시끄러움을 끼칠 수 없었다. 그 시끄러움은 부대 전체의 생사와 관계되는 무시무시한 일이였다. 처창즈근거지가 해산될 때 죽어도 산을 내릴수 없다며 일가족을 데리고 더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던 오옥경은 또 한차례 강단을 내리였다. 어린 정자를 데리고 하산을 결정했다. 리별이 각일각 다가오는 이 시각에 며느리는 철모르는 유복녀를 누가 앗아가기라도 하듯 꼭 업고 시어머니를 따라나섰다. 김선이도 따라나섰다.

“며느리! 내가 살아있는 한 정자도 살아있을 것이니 근심 말고 잘 싸우게!”

“김선아, 내 몫까지 다해 잘 싸워라!”

시어머니는, 할머니는 며느리와 김선을 밀치면서 정자를 받아업었다. 찰나 무슨 낌새를 느꼈는지 아기 정자는 어머니한테 가겠다고 기를 쓰면서 울어댔다. 오옥경도 울고 계순이도 울고 김선도 흐느꼈다. 시어머니는 강잉히 정자를 둘쳐업고 급급히 그 자리를 떴다.

정자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내내 발버둥질이였다. 그러는 아기가 너무 불쌍해서 계순이는 막 달려가면서 시어머니를 불렀다. 그러건말건 시어머니ㅡ 오옥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아래로, 산아래로 내려가기만 하였다.  한번 마음먹으면 드놀지 않는 녀성혁명가이고 중국공산당 당원인 오옥경, 서로 의지하며 살던 일가 세 녀인은 이렇게 헤여졌다.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겨레혁명가들의 눈물겨운 인생리별사의 한페지였다.

그후의 오옥경 어머니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하산한 후의 오옥경이 손녀를 살리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것, 마음 속에 혁명이란 두 글자를 고이 간직하고 결백하게 살아갔다는 것이 전부이다.

1983년 11월 초, 화룡현 항일전사좌담회에 참가한 분들.

11

김선과 숙모 리계순은 할머니이자 시어머니인 오옥경과 헤여진 후 이해 4월과 5월, 6월에 항일련군 2군 3사부대를 따라 무송현 만강, 동강, 소탕하, 시난차, 서강 등 전투들에 련속 참가하며 단련을 받았다.

1936년 7월, 김선 소속 항일련군 제2군 3사 8퇀은 남만의 금천현 하리회의결정으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 제8퇀으로 재편성되였다. 퇀장과 정위는 의연히 전영림과 김산호였다. 하리회의 후 6사 8퇀은 소속 6사를 따라 계속 무송현 경내에서 활동하면서 무송현성의 적을 끌어내기 위한 8월 16일 송수진전투와 8월 17일 무송현성 진공전투에 뛰여들었다. 4월과 5월, 6월의 일련의 전투들에서 전투경험을 쌓으며 단련을 받은 김선은 어제날의 무명소녀가 아니였다. 송수진전투와 무송현성 진공전투에서 김선은 항일련군 녀전사로서의 존재를 남김없이 과시하여 부대의 주목을 끌었다.

1936년 8월 무송현성 진공전투 이후 김선소속 6사부대는 무송현 최남단의 만강을 지나 만강물줄기를 거스르며 천고의 수림과 되골령을 넘어 장백현 경내로 진출하였다. 김선은 9월초 장백현 이도강 부근의 대덕수, 소덕수 전투들에서 다시 남자들에 못지 않게 용맹을 떨친 후 여러 조선족녀전사들과 함께 백두의 횡산일대에 설치된 후방밀영으로 전이하였다. 그에 앞서 숙모 리계순은 몸이 허약한데다가 발에 심한 동상을 입어 여러 부상자, 로약자들 속에 섞이여 무송현의 후방밀영으로 넘어갔다.

전투의 세례 속에서 새해 1937년이 밝아왔다. 김선은 6사 통신부에 배치되였다. 통신부 귀틀집으로 가니 녀전사 김정숙이 누워 쉬고 있었다. 김선은 도끼를 가져다가 박달나무를 토막토막 패고 불을 지피였다. 솥에 눈을 퍼다가 넣으니 인차 끓어올랐다. 김선이 머리를 감으려고 서두를 때 김정숙이 깨여났다. 김정숙과는 처음 만나는 사이여서 서로 눈인사로 알은체 하였다. 통신을 나갔던 전사들이 돌아오자 김정숙은 저 친구가 불을 피우고 눈을 녹였다며 칭찬을 잊지 않았다.

전사들은 기쁜 나머지 저마끔 더운물을 퍼다 손과 발을 씻으며 야단이였다. 더운물은 잠간새에 바닥이 났다. 김선은 머리를 감으려던 생각을 버리고 김정숙의 곁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김정숙은 김선이 다가들면 자꾸 피하기만 했다. 첫날밤은 두루 그렇게 지나갔다. 이튿날 아침 김선은 일찍 일어나 다시 불을 지피며 눈으로 더운 물을 준비하였다. 머리를 감으려고 군모를 벗으니 놀란 것은 김정숙 녀전사다.

“아유, 넌 녀자구나. 난 또 남자라구.”

“?”

김정숙이 깔깔 웃어대자 김선은 그제야 김정숙이 누운 자리에서 자꾸만 자기를 피하는 원인을 알았다. 김선도 호호 웃고 말았다. 알고보니 김정숙은 김선보다 3년 선배였다. 그번 일을 겪으면서 김정숙과 김선은 언니, 동생으로 지내며 친자매처럼 가까이 어울렸다.


12

6사 통신부 전사들은 평소는 통신련락 과업을 수행하지만 전투시에는 총을 들고 전투장에 나선다. 부대를 따라 행군할 때면 남자들보다 수고가 더 많았다. 총과 탄알 외에도 식량과 가마, 대야 등 화식도구들을 더 지녀야 했다. 달거리가 오면 밀가루포대를 찢어 깨끗히 씻어서 말린 천으로 꼭 동여매고 행군해야 하지만 번마다 달거리천을 씻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그것도 누가 보지 않는데서 감쪽같이 씻어야 했으니 말이다. 숙영지에 도착하면 불을 피우고 밥을 지어야 하고 겨울날 물이 없으면 눈을 녹여 쌀을 일고 식사를 준비하여야 했다. 전사들이 휴식할 때면 불무지옆에서 해진 군복을 깁는 일을 녀전사들은 의례 자기들이 해야 하는 일로 간주하였다.

1937년 6월 4일 밤, 김선은 6사의 여느 녀전사들과 함께 부대를 따라 압록강 대안의 조선 보천보전투에 참가하고 또 조선쪽에서 추격해 오는 일제놈들을 족치는 6월 30일 장백현 간삼봉전투에 참가하였다. 그해 겨울에는 소속부대와 함께 몽강현 마당거우밀영 군정학습에 참가하고 1938년 봄부터는 압록강연안에서의 춘기공세에 참가하여 무수한 전과를 올리였다.

1938년 초에 김선 소속 6사는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으로 개편된 후 몽강현 남패자회의 결의에 따라  1938년 12월 초에 또다시 몽강현 남패자를 떠나 압록강 국경지대로의 행군길에 올랐다. 제2방면군의 장백원정 낌새를 알아챈 일제침략자들은 아예 산에서 먹고 자면서 집요하게 뒤를 물었다. 부대는 매일 간고한 행군을 하면서 앞뒤로 달려드는 적들과 싸워야 했는데 어떤 날에는 몇차례씩 전투를 벌려야만 했다.

적들의 지꿎은 추격과 포위 속에서 식량마저 떨어졌고 부상자와 허약자가 갈수록 늘어나면서 부대의 행동과 안전에 극히 불리하였다. 이해 12월 초부터 이듬해 3월말까지 몽강현 남패자에서 장백현 북대정자에 이르는 그번 행군을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1939년 정초,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지 한달 만에 제2방면군 주력부대는 장백현 7도구치기에 이르렀다. 2방면군지휘부ㅡ사령부에선 이곳에서 급히 지휘관회의를 소집하고 부대를 세개 방향으로 나누어 행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의해 7퇀 정위 김준(즉 리동걸)은 부대내의 부상자와 허약자 20여명을 책임지고 후방기지인 장백의 청봉밀영에 가서 한달가량 휴식하면서 몸조리를 하게 되였다.

  방면군지휘는 또 녀전사들인 김정숙, 김혜순, 김선 등 셋을 작식대원으로 파견하면서 이들의 화식을 부탁하였다. 그러고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비상미로 남은 약간한 식량과 소금을 몽땅 털어서 건네주었다. 김선 일행이 한동안의 행군 끝에 청봉밀영에 이르니 후방책임일군 엄광호가 벌써 밀영의 동지들과 함께 마중나와 있었다. 밀영의 동지들이 너나없이 뜨거이 맞아주어도 처음 부대를 떠난 그들의 밀영의 생활은 단조롭기만 하였다.

  •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互联网新闻信息服务许可证编号:22120180019

吉ICP备09000490-2号 | 吉新出网备字005号 | Copyright © 2007-2020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