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ㅡ항일련군의 녀전사로 성장 (5)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106

2020-10-25 23:54:39

1964년 여름, 연길에서의 김선 부부. (김선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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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6월 10일, 유명한 화룡현 올기강전투 이후 김선은 2방면군 부대를 따라 화룡현과 안도현, 조선의 삼장지구를 선회하다가 올기강밀영에 들어섰다. 1940년 2월경에는 무송현 백석탄밀영에서 군정학습을 하다가 밀영으로 기여든 적들을 본때있게 답새기고 안도 쪽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도중에 로수하에서 또 한차례의 전투를 하고는 투도백하, 이도백하, 삼도백하를 가로질러 안도현 남단으로 빠지였다. 화룡현 장산령인 대마록구부근에 이르니 식량이 결단나고 의복과 신발도 볼품없었다. 김선 등 녀전사들도 람루한 차림이였다.

대마록구는 적 ‘토벌대’의 본거지로서 평소 삼림경찰중대 본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주밀한 정찰을 거쳐 대마록구에는 50명의 삼림경찰이 남아 수비하고 나머지는 청산리 쪽으로 ‘토벌’을 나갔다는 것이 알려졌다. 1940년 3월 11일 저녁 8시경에 김선 소속 제2방면군부대는 방면군 총지휘의 지휘하에 대마록구를 불의에 습격하였다.

이날 저녁 불의 습격에서 우리 부대는 적 10여명을 살상하고 10여상자의 탄알과 경기 1정, 보총 10여자루, 숱한 밀가루와 군수물자를 로획하였다. 로획물자가 하도 많아 부대장병들이 한짐씩 지고도 남았다. 식량 등이 결단나 굶주려야 했던 김선 등 녀전사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피여났다. 수십명의 목재소 로동자들이 너나없이 짐을 지고 따라섰다.

1940년 3월 25일, 항일련군 제2방면군은 다시 대마록구방향으로 진출하였다. 적들은 매일 같이 산속을 헤매다가 드디여 우리 군의 행방을 탐지하고 뒤를 물기 시작하였다. ‘토벌대’에 인부로 뽑힌 두 농민에 의해 이른바 화룡현 경무과에서 조직한 ‘토벌대’가 150명가량 되고 그뒤에 위만군중에서도 악질적인 정안군 300여명이 따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적 ‘토벌대’ 대장은 마에다란 놈이고 일본인 중대장과 소대장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지방에서 모집한 위경찰출신들이였다.

2방면군 사령부는 뒤따르는 적‘토벌대’를 홍기하 골짜기에서 소멸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는 적들을 유인하기 위하여 부대를 거느리고 골짜기를 따라 한참 내려가다가 왼쪽켠의 산릉선을 타고 다시 상류 쪽으로 올라갔다.

1982년 여름, 항일련군 장령 풍중운(冯仲云)의 부인 설문(薛雯)이 연길에 왔을 때 연길시 몇몇 항일련군 로전사들 연변호텔에서 합영. 좌로부터 박춘일, 교수귀, 설문, 김선, 려영준. (김선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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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하 골짜기 상류를 향한 오른쪽에는 삼형제를 방불케 하는 3개의 봉우리가 솟아있었다. 골짜기 완쪽에도 봉우리가 있고 그 기슭에는 수림까지 있어 매복전을 벌리기에 알맞춤했다. 2방면군의 기관총소대와 경위중대, 지휘부는 골짜기 오른켠의 3개 봉우리에 배치되고 7퇀과 8퇀의 주력부대는 왼켠 봉우리의 변두리 수림 속에 배치하기로 하였다. 골짜기의 첫 고지 북쪽과 골짜기 끝에는 차단대와 방차대가 배치되였다.

해가 퍼그나 기울어진 저녁 때에 적 척후병이 홍기하 골짜기에 나타났다. 그뒤에 ‘신선대’놈들과 ‘토벌대’의 주력이 줄레줄레 따라섰다. ‘신선대’란 1939년 12월에 화룡현의 각 자위단과 경찰대에서 조직한 100명쯤 되는 무장대오를 가리킨다. 신선대는 박승벽이 대장을, 김일로가 부대장을 맡았는데 3개 소대가 말짱 일제에 충실하는 악질적인 조선놈들로 이루어졌다.

아군지휘부에서는 적척후병과 나부랭이 ‘신선대’놈들이 지나치도록 내버려두었다. ‘토벌대’의 주력 앞머리가 매복권 안에 깊숙이 들어설 때 군도를 찬 마에다 중대장이 골짜기에 들어섰다. 마에다가 한나무 밑에서 걸음을 멈추자 부하장교들이 모여들었다. 마에다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 지시를 줄 때 ‘토벌대’의 주력전부가 매복권 안에 들어섰다.

이때 2방면군 총지휘가 사격신호를 내리였다. 아군진지에서는 일제히 명중탄을 퍼부었다. 여러개의 기관총이 불을 토하고 수류탄이 적진으로 연방 날아갔다. 전투에 나서지 못한 김정숙, 김선 등 녀전사들도 뒤질세라 묘준사격을 들이댔다. 순식간에 적들은 반수 이상이 쓰러지고 살아남은 놈들은 숨을 곳을 찾아 허둥거렸다. 한편 아군진지에서는 “조선사람들은 개목숨을 팔지 말고 나서라!”고 대적 함화를 들이댔다. 함화가 효과를 보아 매복권에서 벗어난 ‘신선대’놈들은 싸울 념을 않고 황황히 줄행랑을 놓았다.

적진이 수라장을 이룰 때 돌격나팔소리가 울리였다. 아군전사들은 멸적의 함성높이 남북 량측에서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다. 중상을 당하고도 마지막 순간까지 군도를 휘두르던 마에다는 황천객이 되고 필사적으로 발악하던 놈들은 무리죽음을 당했다. 김선 등 녀전사들은 “우리는 승리했다!” 하고 소리치며 기쁨을 금치 못하였다.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였다. 이날 전투에서 제2방면군은 적 70여명을 소멸하고 30여명을 투항시키고 ‘신선대’놈들은 달아나도록 내버려두었다. 싸움터를 수색하니 전리품은 기관총 6대를 망라하여 100여자루의 보총과 권총, 무전기 1대, 탄알 수만발이였다.

우리 항일부대를 소멸하겠다고 기고만장하던 마에다토벌대가 도리여 항일련군의 유인매복전에 걸려 졸지에 풍비백산났다. 먼발치에 있던 정안군 300여명은 달려들 엄두도 못내고 눈먼총질만 할 뿐이였다. 총지휘는 로획한 기관총 6대를 전부 걸어놓고 정안군을 향해 위협사격을 퍼붓도록 하였다. 정안군놈들은 어둠을 타서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적들은 며칠이 지나고 항일련군이 확실히 전이했다는 것을 알고서야 비로소 마에다의 시체를 삼도구로 옮겨갔다. 다른 시체들은 머리만 베여 몇대의 마차에 싣고 갔다.

1993년 7월 22일, 김일성 주석이 조선을 방문 중인 항일련군 녀전사 김선 일가를 친절히 접견. (김선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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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하 전투 후 김선 소속 항일련군 제2방면군은 계속 안도현 처창즈, 돈화현의 소할바령과 화룡현, 훈춘현경내에서 신출귀몰하면서 적들에게 거듭 타격을 안겨 항일련군의 위력을 만방에 떨치였다.

그러나 1940년초부터 적들의 참혹한 대토벌은 날로 우심해졌다. 동북항일련군의 여러 부대들은 동북 각지에서 천신만고를 헤가르며 영용하게 싸웠지만 거대한 희생을 냈다. 김선 소속 제1로군만 보아도 이해 2월 23일 제1로군 총사령 양정우가 적들과의 조우전에서 장렬히 희생되고, 제1로군 부총사령이며 중공남만성위 서기인 위증민은 중병을 앓아 밀영에서 지내는 몸이였다. 남만성위와 제1로군을 정돈회복할 중책이 제1로군 제2방면군 총지휘의 두 어깨에 놓이였다.

1940년초 쏘련 극동지구 하바롭스크회의 정신에 따라 동북 경내에서 활동하는 여러 항일련군 부대들은 항일무장력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부 소부대들만 동북에 남아 투쟁을 견지하게 하고 대부분의 부대들은 선후로 극동지구의 하바롭스크일대로 전이하였다. 김선 소속 제1로군 제2방면군 부대들은 여러 소부대로 나뉘여 륙속 동으로, 동으로 향하였다.

동북항일련군은 1936년과 1937년의 전성기에 모두 11개군 4만여명으로 발전하였지만 1940년초 이후 쏘련 극동지구로 전이하였을 때 20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 2000명은 쏘련의 하바롭스크에서 쏘련 극동방면군 독립 제88보병려단 5개 영으로 개편되여 쏘련경내에서의 학습과 훈련생활을 시작하였다. 대오가 비교적 정예한 제1로군 제2방면군 부대들은 88려 제1영에 편입되였다. 김선은 쏘련홍군과의 혼성려단이라 하여 국제려단으로 불리우는 제88려 제1영의 녀전사였다.

김선의 회고와 취재에 따르면 김선 녀전사는 한번의 짝사랑을 겪고 세번 결혼한 결혼사를 가지고 있다. 김선은 녀인이라지만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쾌활하여 ‘말괄량이’로 불렸다. 김선은 항일무장투쟁의 어려운 그 시절에 부대의 기관총수- 김춘액이라고 부르는 남전사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지만 천연덕스럽게 의식적으로 피하기만 하였다. 후에 김춘액은 한차례 전투에서 희생되여 사랑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김선이 사랑한 사람도 아니였다. 아니, 김선은 그때까지 사랑이란 무엇인지도 몰랐다.

첫번째 남편은 항일련군 제5군의 한 책임자인 황광림이라고 한다. 이는 김선의 자유련애가 아닌, 상급의 의사에 따른 결혼으로 1940년초 쏘련으로 움직이던 도중인 그해 8월에 항일련군 제5군 시세영의 결혼선포로 이루어졌다. 쏘련에 가서 김선은 쏘련부대에서 황광림과 함께 생활하였다. 황광림은 소부대활동으로 중쏘국경을 넘나들며 활동하다가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 쏘련군은 그를 오해하고 붙잡아갔는데 다시는 소식이 없었다. 그 후 김선은 조선사람들이 많은 부대로 넘어왔고 황광림과의 사이에 태여난 딸애는 태여나 45일 만에 소화불량으로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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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남편은 쏘련 시절 자유련애로 사귄 한족 항일련군 전사 우일수였다. 1945년 8.15 이후 김선은 항일련군 부대와 쏘련에서 귀국하였고, 그해 12월 29일에 목단강사령부에서 먼저 동북으로 파견된 그리운 남편을 만났다. 1946년 10월에 그들 사랑의 결실인 아들애가 태여났다. 그때 남편은 목단강사령부 경위련의 련장이였다. 그 후 남편은 전방에 나가 싸우다가 1948년 3월 사평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영웅칭호도 수여받았다.

세번째 남편은 항일련군 전사였던 한족 교수귀이다. 두번째 남편이 희생된 후 김선은 소속부대를 따라 목단강, 사평, 도문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49년 3월에 연길에 들어섰다. 김선은 아들을 잘 키우며 다시 재가하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그게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였다. 조직에서는 홀로 지낸다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고 중매까지 서주었다. 이렇게 만난 세번째 남편이 항일련군 제5군 군장 주보중의 부관이였던 교수귀였다.

교수귀는 마흔이 되여도 장가를 들지 못한 로총각이였다. 1949년 7월에 김선은 교수귀(후일 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와 결혼하고 1956년에 아들을 보았다. 항일의 싸움터를 거쳐오면서 온몸이 그대로 병투성이여서 자식을 늦게 본 것이였다.

연길에서의 김선은 지방사업으로 바삐 보내다가 소속부대에서 정식으로 제대한 것은 1956년 9월이였다. 해방된 이 땅이 한창 건설로 들끓을 때 김선은 신경쇠약에 풍습성 관절염으로 하여 바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10여년에 걸친 항쟁의 피어린 나날은 김선에게 갖은 병을 가져다주어 50년대 중기에 벌써 장기휴양치료의 행렬에 가담하여야 했다. 1964년에 퇴직휴양수속을 밟았다가 리직휴양으로 넘어갔다. 그 후 10년 동란 기간 김선은 가족과 더불어 돈화에서 6년간 지내다가 1976년 8월에 연길에 다시 돌아왔다.

그러던 김선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여러가지 치료를 곁들었더니 온몸을 괴롭히던 병들이 진짜 신기하게도 사라져버렸다. 아침이면 남먼저 일어나서 거리와 주택 주위, 층계를 깨끗이 쓸면서 동네와 거리환경 미화에 살손을 대였다. 가두 위생과 청소년교양사업, 항일운동사 발굴 등에 알심을 들이니 김선은 해마다 여러가지 사업의 선진일군으로 당선되여 표창을 받았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1958년 10월,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항일가요집 《혁명의 노래》가 아닌가 싶다. 이 가요집엔 <국제가>와 <맑스 레닌 추억> 등 노래가사와 항일가요 70수가 수록되여있는데 그중 60수가 김선 녀전사의 개인수첩에서 옮겨진 것이였다. 해방 후 김선은 우리 항일련군 부대에서 부르던 개인노래수첩을 관련부문에 넘겨줬고 후에 연변박물관이 설립된 후 연변박물관에서 보관하게 되였다.

  1982년 이후 필자는 조선족항일사 연구차 연길시에서 김선 항일련군 녀전사를 수차 방문하면서 많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연변일보사 편집기자 시절이였던 1992년 9.3 전야 취재도 그 가운데 한차례였고, ‘제대군인증명서’와 1983년에 보충발급한 ‘로간부리직휴양영예증’도 직접 보게 되였다. 김선 녀전사는 2001년 3월에 세상을 하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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