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련군 제1로군 군수부장 엄필순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107

2020-11-02 08:46:08

엄필순 관련 하리회의 현지에 세워진 안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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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30년대 중반 항일련군 제1군과 제2군으로 무어진 제1로군의 력사를 펼치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한 군급장령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엄필순(严弼顺,?ㅡ1936), 별명은 엄수명(严洙明), 항일련군 부대에서의 계급은 제1로군 군수부장. 그러나 우리는 그의 고향이며 나이며 래력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직책이 제1로군의 군수품과 후방기지를 책임진 후방장령이다 보니 알려지는 바도 별반 없다.

항일련군 제1로군 군수부장시절 이전에 대해서는 1933년 1월, 중국로농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시절 제1대대 정위와 후근기지 건설에 힘을 다했다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남만유격대 제1대대 정위와 후근기지 건설 이 자료는 엄필순이 항일련군 제1군의 전신인 남만유격대시절부터 그 후의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시절을 거치며 줄곧 남만에서 활동하였음을 알려주어 엄필순 발자취를 추적할 기회는 주어지고 있다.

항일련군 제1로군과 제1군의 력사 추적에 앞서 남만유격대시절을 헤아리면 유격대나 그 뒤를 이은 동북인민혁명군시절 모두가 부대의 후방기지건설을 떠나서는 운운할 수가 없다. 이 후방기지 건설이 너무나도 절실하여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남만의 항일무장은 1932년 여름부터 1933년 가을까지 버리하투(玻璃河套), 홍석라자(红石砬子)를 중심으로 한 반석(磐石)유격근거지내에는 선후 15개의 밀영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반석유격근거지의 이런 밀영들은 1932년 9월부터 일본군과 위만군의 거듭되는 련속 ‘토벌’로 엄중히 파괴되다가 1934년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파괴당하는 상황을 면치 못하였다.

1933년 9월 18일 홍32군 남만유격대는 중공반석중심현위와 남만유격대 총부에서 반석 서버리하투 저요령(西玻璃河套猪腰岭)에서 열린 회의결의에 따라 300여명의 병력을 가진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로 개편되였다. 이해 10월 하순에 제1군 독립사의 주력은 휘발하(辉发江)를 건너 남하하면서 제1군의 유격구는 원래의 반석항일유격근거지로부터 이통(伊通), 영길(永吉), 몽강(蒙江), 휘남(辉南), 화전(桦甸), 금천(金川), 류하(柳河), 통화(通化), 림강(临江)을 망라한 보다 광활한 지역으로 확대되였다.

그중 하리(河里)의 자연조건이 유격근거지 건립에 가장 알맞춤이여서 제1군 독립사 사부는 조선족인 엄필순과 한진(韩震), 김로숙(金鲁淑)을 금천하리 후방기지 건설에 살손을 대도록 하였다. 적들과의 싸움터에서 뛰던 원 남만유격대 제1대대 정위, 그때부터 엄필순은 총탄이 비발치는 싸움터를 떠나 천고의 밀림으로 덮인 심산 속을 전전하는 후방부대 군수부장생애를 이어가게 되였다. 부대의 군수부장이면 소속부대의 모든 군수품 구입과 관리, 후방기지ㅡ병기수리소(修械所), 피복공장(被服厂), 후방병원 등 설치와 관리를 맡아보아야 했다. 그만큼 책임이 중하고 베일에 가려진 생활이여서 그의 발자취가 잘 알려질 리가 만무하였다.

2013년에 항일련군 후손 류복(刘福)이 통화현 흥림진 곡류천촌(兴林镇曲柳川村)에 투자하여 세운 하리항일근거지기념관.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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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는 룡강산맥(龙岗山脉) 중부의 하니하(哈尼河) 상류지대인 금천, 림강, 류하, 통화, 몽강현의 접경지대 즉 지금의 류하현과 혼강시(浑江市)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력사의 고장이다. 엄필순과 김로숙 등은 소속부대를 동원하여 먼저 반석현 경내 홍석라자의 병기수리소, 피복공장, 후방병원을 금천하리로 옮기는 한편 류하현 곡류천(曲柳川, 지금의 통화현 兴林镇)에 5개의 병기수리소와 곡류천과 서남차(西南岔) 등지에 각기 피복공장을 일떠세웠다.

엄필순과 김로숙은 30여명의 후방부대를 직접 인솔하면서 신생한 하리후방기지를 보위하여나섰다. 하리후방기지에서 만든 군복과 무기 후송, 부대내 상병원 후송과 치료도 후방기지와 후방부대의 몫이였다. 1934년 11월 5일, 하리근거지의 림강현 사도이차(四道二岔, 오늘의 훈강시 경내)에서 중공남만당 제1차 대표대회가 열리고 조선족 리동광을 서기로 한 중공남만림시특위가 조직되였다. 따라서 제1군 독립사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으로 개편되는 과정을 거치였다.

1936년 7월초에 리동광과 양정우는 하리근거지 혜가구(惠家沟)밀영에서 중공남만림시특위 제2차 대표대회를 열고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을 동북항일련군 제1군으로 재편성하였다. 보다 중요한 회의는 역시 이해 1936년 7월 상순에 펼쳐진 중국공산당 동만성위와 남만성위, 항일련군 제1군과 제2군 주요간부 련석회의였다.

그번 련석회의는 하리후방기지의 통화현 흥림진 혜가구(通化县兴林镇惠家沟)에서 열리였는데 력사상 ‘하리회의’(河里会议)라고 부른다. 혜가구는 오늘의 흥림진 동북방 맹가촌(孟家村) 서쪽, 흥림진정부 소재지에서 10여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중공동만특위 서기이고 2군 정위인 위증민(魏拯民)이 국제공산당(共产国际) 제7차 대표대회의 정신과 중공만주성위를 취소하고 4대 유격구에 따라 4개 성위를 구성할 데 관한 국제공산당주재 중공대표단의 지시를 전달하였다.

하리회의는 신생한 항일련군 제1군과 2군을 합치여 항일련군 제1로군을, 동만성위와 남만성위를 합치여 남만성위(동남만성위라고도 한다)를 조직하기로 하고 남만성위가 신생한 제1로군을 지도하기로 결의하였다. 회의 결과 위증민이 남만성위 서기로, 리동광(李东光)이 남만성위 조직부장으로, 양정우(杨靖宇)가 제1로군 총사령 겸 정치위원, 제1군 군장으로, 왕덕태(王德泰)가 제1로군 부총사령 겸 제2군 군장으로, 송철암(宋铁岩)이 정치부 주임으로, 안광훈(安广勋)이 참모장으로, 한인화(韩仁和)가 비서처장으로, 엄필순(严弼顺)이 군수처장으로, 서철(徐哲)이 군의처장으로 부임하였다.

하리회의에서 엄필순은 항일련군 제1로군 군수처장으로 등장하였다. 회의기간에 엄필순은 회의 참가자이면서도 김로숙(金鲁淑, 리동광의 안해) 등과 함께 회의의 보위사업을 맡고 수요되는 식량과 식품 공급을 담당하여나섰다.

하리항일근거지기념관 내 일각. (사진자료)

3

1936년 7월의 통화 하리회의와 더불어 엄필순의 위인됨을 알리는 자료는 또 일제 조선총독부 관련 자료(김준엽, 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에서 나타난다. 이 자료에 의하면 엄필순의 또 다른 이름은 엄수명이다. 엄수명은 남만의 이름난 조선족혁명가들인 오성륜(吴成仑, 즉 全光), 리상준(李相俊, 즉 李东光) 등 셋의 이름으로 1936년 6월 10일,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 선언’과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을 발표하면서 그해 7월의 하리회의보다 먼저 남만의 조선족혁명가로, 수령인물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었다.

엄수명이란 가명으로 나타난 엄필순은 1936년 6월과 7월에 련속 선포된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 선언’과 ‘하리회의’를 통해 남만의 이름난 조선족혁명가로 떠올랐다.

엄필준이 군급으로의 제1로군 군수부장일 때 오성륜은 남만성위 선전부장이고 리동광은 남만성위 조직부장이였다. 엄필준, 오성륜, 리동광 세 사람의 급별은 그 시절 동만과 남만 당조직과 항일련군 부대를 망라하여 조선동지들의 최고급 급별이였다.

하다면 엄필순이 친히 지도하는 항일련군 제1로군 군수부와 군수부 소속 하리후방기지의 진면모를 속속 헤아릴 순 없을가? 연변대학 김창국(金昌国) 교수의 저서 《동북항일유격근거지연구》(연변인민출판사, 1992년 6월 출판)와 동북항일련군사료총서ㅡ 《동북항일련군 제1군》 [손계영(孙继英) 등. 흑룡강인민출판사, 1986년 6월 출판]이 하리후방기지의 진면모를 알리고 있다. 《동북항일유격근거지연구》와 《동북항일련군 제1군》에 따르면 하리후방기지에 꾸려진 무기수리소(즉 병기공장), 피복공장(즉 우리가 말하는 재봉대), 창고는 물질면으로부터 인민혁명군(후에는 항일련군)에 수요되는 량식, 무기, 탄약, 작탄, 의복 등 물자를 보장하여 주는 부대의 중요비밀기관이였다.

그중 하리후방기지의 무기수리소, 피복공장, 후방병원을 실제적으로 보기로 하자. 하리후방기지내에 설치된 곡류천무기수리소에는 20여명의 전문인원이 있었는데 그들은 전문 총을 수리하고 총부속품과 탄알을 만드는 과업을 수행하였다.

회두구(会头沟 )의 동유수천(东柳水川)무기수리소에는 마기술원과 그의 안해, 아들과 2명의 로동자가 있었다. 그들은 자체로 각종 무기를 수리하면서 탄알을 손수 만들어냈다.

곡류천피복공장에는 4대의 재봉기에 7명의 재봉대원이 있었고 서남차피복공장에는 3대의 재봉기에 6명의 재봉대원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흰 광목천에 추리나무(榨树皮) 등 나무껍질을 삶아 우려낸 초록색물감을 들여 군복이나 군모, 이불, 탄약띠를 만들어냈다.

하리후방기지내 후방병원들에는 병원마다 보통 1~2명의 의사와 3~5명의 간호원이 있었다. 말이 병원이지 통나무로 지은 귀틀집인 데다 설비가 간단하고 약품원천이 따르지 못하였다. 의료일군들은 산에 올라가 약초를 채집하여서는 탕약이나 알약을 만들었다. 1로군 군수부에서는 또 경상적으로 후방부대를 적구에 파견하여 사선을 헤치며 약품을 구입하였다. 때론 일본군과 위만군과의 싸움에서 일부 약품을 로획하기도 하였다.


4

하리후방기지의 이모저모를 통하여 우리는 항일련군 제1로군 군수부장 엄필순과 제1로군 후방부 책임자인 김로숙 등의 존재와 그들 역할을 나름 대로 헤아려볼 수가 있다.

그러나 항일련군 제1군과 제1로군의 후방기지인 하리기지는 1933년 가을에 세워지기 시작하여 절대적 비밀리에 유지되다가 1936년 하반기에 일제에 발견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적들이 대량의 병력을 투입하여 하리지구를 중점적으로 토벌하자 엄필순과 김로숙은 소속 1로군 후방부대를 인솔하여 적토벌대와 거듭되는 혈전을 벌리면서 하리후방기지의 동지들을 몽강, 집안(集安) 일대의 심산밀영으로 륙속 전이시키였다.

그때가 1936년 8월이였다. 엄필순과 김로숙은 하리후방기지의 전이, 1로군 부대의 겨울복장,  식량을 해결하고저 소속 후방부대를 거느리고 몽강과 집안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적들과 수십차례의 전투를 벌리였다. 겨울나이 식량은 그런 피어린 전투 속에서 마련되여 산속의 비밀식량창고에 보관되였다.

그런 전투의 시련 속에서 둬달 시간이 흘러갔다. 그해 1936년 10월 엄필순과  김로숙이 이끄는 후방부대는 집안현 대청구(大青沟)일대에서 후근물자구입에 나서고 있었다. 후방부대 20여명 동지들이 여러 지방에 파견되여 물자구입 과업을 수행할 때 일본수비대 200여명이 집안현 대청구숙영지를 불의습격하였다. 숙영지에는 엄필순 부장과 김로숙, 경위원 약간명에 녀전사들까지 도합 10여명에 불과하였다. 어떤 녀전사들은 어린아이를 데리고있었다. 엄필순과 김로숙은 어린아이를 업은 녀전사들을 먼저 철거시키려 하였지만 때는 늦었다. 그들은 10여명 동지들을 지휘하면서 적들과 생사판가리 싸움을 벌리였다.

김로숙은 1932년 그 시절에 벌써 중공반석현위를 지켜선 무장대ㅡ부녀대 대장이였다. 그의 멸적의 사격술과 동지들의 반격은 달려드는 적들을 련속 거꾸러뜨렸지만 적아 병력대비는 너무도 현저했다. 엄필순과 김로숙을 비롯한 제1로군 후방부대 10여명 장병들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가 전부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 뒤 여러 지방에 파견된 동지들이 대청구숙영지를 찾았을 땐 비운이 감도는 어수선한 싸움터가 기다릴 뿐이였다.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군수부장이고 중공남만성위와 1로군 주요지도자의 한 사람인 엄필순ㅡ엄수명은 이렇게 갔다. 엄필순이 동지들의 곁을 떠나간 시절은 항일련군의 초창기시절인 1936년 10월이고 1로군 부대 비밀후방기지였기 때문에 엄필순에 대해서 알려지는 자료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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